박인비는 올림픽 출전 전까지만 해도 골프에 치명적인 손가락 부상 때문에 출전 여부가 불투명했다. 그러나 주위의 우려에도 그는 극적인 반전 드라마를 만들며 ‘골프여제’의 존재감을 증명했다. 박인비와 8년째 동고동락 중인 매니지먼트사, 갤럭시아SM 이수정 국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박인비의 금메달 획득 뒷얘기를 들어본다.
리우올림픽에 출전한 박인비가 치명적 손가락 부상을 극복하고 금메달을 따내 ‘골프여제’의 존재감을 입증했다. 연합뉴스
―올림픽 출전하기 전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어떤 과정을 거쳐 올림픽에 나가기로 최종 결정을 했었나.
“사실 박인비 프로가 지난 6월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 1라운드에 출전하면서 명예의 전당에 가입했을 때만 해도 올림픽 출전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손가락 부상으로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었다. 경기 감각이 떨어진 상태에서 나라를 대표하는 올림픽 무대에 선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더욱이 성적이 뒷받침되지 않자 여론이 너무 좋지 않았다. ‘후배에게 양보하라’는 말부터 ‘지카 바이러스 때문에 올림픽을 꺼리는 것 아니냐’ ‘후배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매니지먼트사 입장에선 당장 뭔가를 결정하기보단 한 달 넘게 시간이 남아 있으니 부상 치료를 하면서 몸 상태를 판단해보자고 조언했다.”
―그런 조언을 선수가 잘 받아들였나.
“일단 손가락 부상이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그래서 박 프로는 아주대 병원 재활팀의 도움으로 매일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연습은 리우올림픽 골프장과 비슷한 환경인 인천의 잭니클라우스 골프클럽을 이용했다. 8월 11일 브라질로 떠나기 직전까지 그곳에서 죽기 살기로 연습에 매달렸다. 약 40일간을 그렇게 훈련에 몰두한 것 같다.”
―출전 여부가 불투명해지면서 은퇴설, 임신설 등 다양한 소문들이 떠돈 게 사실이다.
“명예의 전당 입성 후 한 달 정도 치료와 훈련에 몰두하면서 몸 상태를 체크하는데 중점을 둔 터라 이런저런 소문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항간엔 스폰서의 압력으로 올림픽에 나갈 거란 얘기도 있더라. 전혀 사실무근이다. 박 프로는 임신도 안했고, 은퇴는 생각지도 않았으며 지카 바이러스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손가락 부상에서 회복만 된다면, 그래서 자신의 스윙을 해나갈 수 있다면 올림픽은 당연히 나가려 했다. 누구보다 대한민국을, 태극마크를 사랑하는 선수이다.”
박인비는 7월 11일 리우올림픽 출전을 전격 발표했다. 당시 그는 “올림픽 출전은 오랜 꿈이자 목표다. 부상 회복 경과를 두고 깊이 고민해왔으나 최근 상당히 호전됐다. 남은 한 달 동안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다”는 내용의 각오를 밝힌 바 있다.
―올림픽 출전을 결정한 이후 훈련 프로그램에 변화가 있었나.
“당연하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해야만 했다. 8년 동안 박 프로를 봐 왔지만 이번처럼 많은 훈련량을 소화했던 게 처음이었다. 그만큼 박 프로의 의지가 대단했다. 우린 조용히 지켜보면서 선수가 편한 환경에서 훈련에 몰두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됐다. 한 달여 동안 비공개 훈련을 유지하며 상당히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박 프로는 훈련량이 많았던 아마추어 시절을 떠올렸고, 우린 그런 박 프로를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그런데 브라질로 떠나기 직전 올림픽 리허설 성격으로 출전한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에서 컷 탈락을 했다. 박인비의 몸 상태에 대한 의문이 의혹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골프 관계자들이나 팬들은 삼다수 마스터스에서의 결과를 보고 좌절했을지 모르지만 우린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단 스윙을 하는데 자신감을 찾았고, 샷감이 굉장히 좋았다. 결과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삼다수 마스터스를 리허설로 삼았기 때문에 올림픽 가서 잘하면 된다고 얘기했다. 행여 박 프로가 의기소침할까봐 ‘삼다수에서 잘 안 됐으니까 올림픽 가선 잘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도 해줬다. 선수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모든 상황을 ‘우리식’으로 이해해야만 했다.”
이수정 국장은 코칭심리 전문가이자 명리학을 공부한 지인을 통해 박인비가 8월에 세상을 이롭게 하는 큰일을 해낼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된 이 국장은 박인비에게 ‘무조건 나가보자. 8월에 좋은 기운이 있을 거라고 하니 믿고 도전해보자’고 손을 이끌었다고 말한다.
―브라질 도착 후 숙소는 다른 선수들과 함께 사용했나.
“대표팀 선수들이 묵는 빌라가 있었지만 박 프로 부부와 우리 회사 관계자들이 사용하는 빌라를 따로 마련했다. 박 프로 입장에선 아무래도 남편인 남기협 스윙코치와 함께 지내는 게 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잠은 우리 빌라에서 자고 식사는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했다.”
―리우 입성 후 연습 라운드에서 금메달을 예고하는 행운의 홀인원을 기록하는 등 출발 전부터 조짐이 좋았다. 당시 박인비는 어떤 상태였나.
“프로 선수들은 연습 라운드를 하며 감을 갖는 모양이다. 리우에서의 박 프로는 LPGA 투어 17승을 달성하고, 커리어 그랜드슬램까지 달성한 ‘골프여제’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연습 라운드 홀인원은 자신감을 배가시킨 행운의 상징이기도 했다.”
―걱정했던 첫째 날 경기를 1타 차 2위로 기분 좋게 마무리했고 이 기운이 마지막 라운드까지 이어졌다. 결국 금메달을 확정짓게 되었고.
“옆에서 지켜본 박 프로는 골프에 관한 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선수다. 코치가 살짝 터치만 해줘도 자기만의 스윙을 만들어낸다. 순간 집중력도 대단하다. 그게 이번 올림픽에서 빛을 발했다.”
―마지막 홀컵에 공을 집어넣은 후 이례적으로 두 팔을 번쩍 들고 금메달 확정을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며 어떤 느낌을 가졌나.
“‘이젠 됐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 금메달로 그동안 불거졌던 모든 소문들을 잠재울 수 있겠다 싶었다. 결국 박 프로 혼자 해낸 것이다. 경기력에 대한 비난이 지속됐지만 금메달을 가져오면서 모든 소문이 정말 소문이었고, 우려였다는 걸 증명해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스스로 그 모든 걸 해낸 부분이. 무엇보다 박 프로의 금메달이 대한민국 선수단 올림픽 순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들었다. 올림픽 마치며 선수단의 밤 행사가 있었는데 그때 대한체육회 관계자들이 다들 박 프로에게 고맙다는 얘길 전했다. 금메달 획득으로 11위로 끝날 수 있던 올림픽이 8위로 마무리됐으니 말이다.”
―박인비를 처음 만난 게 언제인가.
“8년 전인 2008년 US오픈에서 우승하기 전날 우리 회사와 계약하면서부터 인연이 시작됐다. 당시엔 앳되고 여린 소녀 같기만 했는데…. 사실 박 프로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을 때 기대했던 것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해 굉장히 속상했었다. 정말 힘들게 해서 올라간 명예의 전당인데 올 시즌 부상으로 성적이 떨어지면서 화려한 세리머니를 하지 못했다. 그땐 감히 올림픽에 나가자는 말도 못 꺼냈다.”
―박인비가 올림픽 출전 여부를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이 국장이 어떤 얘기를 전달했고, 그 얘기가 박인비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하더라. 그 내용이 뭔가.
“박 프로 부모님을 비롯해 나조차도 올림픽은 꼭 나가길 바랐다. 비난을 두려워하거나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한 염려로 일생일대의 기회를 저버리는 건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고 믿었다. 나도 체육을 전공했기 때문에 올림픽이 국민들에게 전하는 감동이라든지, 선수로서 올림픽을 경험하는 게 얼마나 큰 자양분이 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걸 설명해줬다. 선택은 선수의 몫이었다.”
―박인비라면 명예의 전당 입성과 올림픽 금메달, 둘 중 어느 부분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할 것 같나.
“아무래도 올림픽이 아닐까 싶다. 명예의 전당은 다른 선수들도 이름을 올렸지만 올림픽 금메달은 116년 만에 박 프로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 금메달 덕분에 뒤늦게 명예의 전당 입성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됐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투어생활도 결혼생활도 우린 운명” 박인비-남기협 코치 ‘잉꼬 부부’ 스토리 박인비와 남기협 코치는 소문난 잉꼬 커플이다. 사적으론 부부 사이지만 공적으론 선수와 코치 관계를 형성하며 공과 사를 넘나든다. 2006년 고3의 박인비는 7살 연상인 남기협 코치를 처음 만난다. 그때는 당연히 골프 선배이자 코치였다. 박인비는 이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남기협 코치와의 만남을 ‘운명’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인비 남기협 부부 “만약 내가 골프를 잘 가르치는 사람을 찾아서 결혼할 생각을 단 1%라도 갖고 있었다면 남편과 사적 관계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고교 시절 LA로 전지훈련을 가서 처음 알게 됐고, 가장 어려운 시기에 연인으로 발전했다. 2011년 부모님께 용기를 내 오빠와 함께 투어 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약혼식을 올렸다. 처음엔 ‘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보석’이더라. 오빠한테 골프를 배우면서 내 골프도 성장했고, 오빠와 결혼생활을 시작하며 여자 박인비도 완성돼 갔다. 대부분의 결혼한 골퍼들은 남편과 떨어져 지낸다. 그러나 우린 처음 만난 이후 단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다. 후배들이 24시간 붙어 다니면 자주 싸우지 않느냐고 묻는데 우린 지금까지 싸운 적이 없다.” 결혼 전 이미 약혼자와 함께 투어 생활을 강행했던 박인비. 그는 주위의 부정적인 시선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한다. “정말 많은 오해를 받았다. 한국 여자 골프 선수 최초로 약혼자를 대동하고 투어 생활을 했으니까. 모든 게 처음 가는 길이었다. 내가 남편을 만난 시기가 골프 인생 중 가장 바닥으로 내려갔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주위의 시선이나 소문들에 신경 쓸 만한 여력이 없었다. 부모님이 믿고 응원해주신 게 가장 큰 힘이 됐다. 골프를 시키는 부모로선 절대 있을 수 없는 결정이었는데 부모님은 나랑 오빠와의 관계를 인정해줬다. 지금도 그 부분이 가장 감사하다.” 박인비는 2013년 결혼 이후 골프 선수로서의 인생 못지 않게 여자로서의 인생도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그리고 남편이 돈 잘 버는 아내 만나서 인생 편 게 아니라 자신이 인간적으로 배울 게 많은 남편을 만나 더 행운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박인비에게 남편 남기협 코치는 든든한 버팀목과 같다. 그는 올림픽 금메달 획득 후 인터뷰를 통해 “남편은 내게 가장 중요한 스윙코치이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며 “그런 남편과 함께 투어를 하고 있다는 게 행복하다”고 애정 가득한 고마움을 담아냈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