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개막한 제4회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부코페)에 대거 참여한 개그맨들은 침통한 심경을 감출 수 없었다. ‘코미디의 대부’라 할 수 있는 구봉서가 27일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시계를 돌려보면 2008년 10월 2일에는 배우 최진실이 생을 마감했다. 그날은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일이었다. 동료 배우의 죽음을 알고 화려한 개막식에 참석할 수 없다면서 적잖은 배우들이 서울로 발길을 돌렸다. 그들의 의식 있는 행동에 많은 대중이 박수를 보냈다.
대들보를 잃은 개그맨들의 마음도 이에 못지않았다. 당장 빈소로 달려가 조문하고 슬픔을 토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8월 26일 개막식을 마친 부코페를 즐기기 위해 이미 수천 명의 인파가 부산으로 몰려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KBS2TV 캡처.
결국 전유성 명예집행위원장을 비롯해 김준호 집행위원장, 김대희 이사 등 31명의 개그맨은 본격적인 공연을 시작하기 앞서 검은 리본을 달고 추모의 시간을 가진 후 공연을 진행했다. 이 자리는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개그맨들이 묵념과 추모의 시간을 가진 후 곧바로 무대에 올라야 하는데 자칫 웃어야 하는 관객들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부코페 측은 “모두들 실의에 빠졌으나 코미디를 즐기기 위해 부산을 찾은 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곧바로 올라갈 수 없었다”며 “슬퍼도 누군가를 웃겨야 하는 코미디언의 숙명을 구봉서 선배님의 별세 소식을 통해 또 한 번 깨닫고 있다”고 전했다.
웃음을 본령으로 삼는 개그맨들은 종종 뜻하지 않는 상황에 처하곤 한다. 구봉서의 죽음 앞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무대를 지켜야 할 때가 있는 반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무대에 설 수 없을 때도 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2014년 4~6월이 개그맨들에게는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기간이었다. 당시 대표적 개그 프로그램인 KBS 2TV <개그 콘서트>,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 등은 5주 동안 결방됐고 대다수 예능 프로그램 역시 휴식기에 들어갔다.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것이 국민 정서에 반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대승적 차원에서 방송국이 내린 결정에 개그맨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결정에 동참했다. 하지만 결방 기간이 길어지며 이들은 생계를 고민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통상 <개그 콘서트> 등에 출연하는 개그맨들은 아이디어 회의부터 녹화까지 1주일 내내 이 프로그램에 매달린다. 당연히 출연료가 그들에게는 월급이자 생계비다. 방송일 기준으로 익월 말일에 출연료가 정산되기 때문에 대다수 개그맨들이 5월 결방의 여파로 6월에는 월급을 한 푼도 받기 힘든 상황에 놓였다.
이에 대해 한 개그맨은 “예능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각종 행사와 공연들도 모두 취소됐다”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한 동료들도 있다.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우리의 애환을 토로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당연히 받아들였지만 끼니를 잇기 어려운 상황에 힘겨워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제4회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 안내 포스터.
개그맨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 높지 않다는 것도 그들을 힘들게 하는 대목이다. ‘웃기는 사람’을 ‘우스운 사람’으로 보는 풍조가 만연해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배우들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코믹 연기를 펼치면 대중은 그들이 망가지는 모습에 호응한다. 하지만 개그맨들이 정극 연기에 도전하면 색안경부터 끼고 바라보는 이들이 적잖다. 엄밀히 말해 개그맨들은 ‘희극 배우’다. 수많은 콩트 속에서 그들은 연기를 하고, 웬만한 배우 못지않게 연기력도 뛰어나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개그맨들이 사석에서 자주 듣지만, 매우 기분 나쁜 대표적 표현은 “웃겨 보라”다. 이는 마치 가수들에게 “노래 한번 불러보라”고 하거나 배우들에게 “연기 한번 해보라”고 하는 것도 다를 바 없다.
이에 대해 많은 개그맨들은 “우리가 친근해 보이니까”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평소에 우스꽝스러운 분장이나 과장된 몸짓, 바보 연기로 웃음을 주는 만큼 대중이 격의 없이 바라본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을 다른 영역의 연예인보다 낮게 평가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분위기는 남아 있다.
전유성 명예집행위원장은 부코페 공연에 앞서 “‘큰 별이 지다’라는 표현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슬픔이다. 심사숙고 끝에 구봉서 선생님 생전의 의지인 ‘국민들에게 웃음을 드려야 한다’는 큰 뜻을 이어받아 무대에 올라 최선을 다해 공연을 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누군가의 웃음을 위해 오늘도 눈물을 삼키며 무대에 올라야 하는 것,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개그맨들의 숙명이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