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에서 43년간 환자를 돌본 외국인 수녀가 금년에 만해 대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았다. 연금으로 최저생활을 하고 있던 수녀는 받은 상금조차 모두 기부했다. 그 정도면 신이 그의 속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닐까. 합천의 산골짜기 암자에 사는 한 스님이 사무실에 들렀다. 그 암자 바로 아래는 작은 시골교회가 있었다. 목사는 닭을 쳐서 거기서 나온 계란으로 교회를 꾸려가고 있었다. 찾아온 스님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시골교회 목사님한테 가서 물어봤어요. 헌금도 안 나오는데 왜 이런 궁벽한 곳에서 목회를 하느냐고 그랬더니 그 목사가 나보고 스님은 왜 골짜기 암자에서 된장을 만들어 팔면서 절을 하느냐고 되묻더라구요.”
소유보다 진리가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가난은 가난이 아닌 것 같다. 정읍 부근의 농가를 개조해서 혼자 사는 여성을 만났다. 텃밭에 채소를 키우면서 경전이나 마하리쉬 같은 인도철학자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후 배낭 하나 메고 유럽과 인도 등 전 세계를 돌았다. 그리고 시골에 묻혀 한 달에 이십만 원의 생활비로도 영혼이 평안한 노년을 누리는 것 같았다. 스스로의 사상과 의지로 가난한 걸 청빈이라고 했던가.
임대아파트에 혼자 살던 유명한 시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암에 걸려 있었다. 인근 중학교식당에서 남은 누룽지를 보내주고 성당의 자원봉사자들이 나물반찬을 가져다주었다. 쇠약해진 몸으로 하루 종일 누워있지만 그는 행복하다고 했다. 창으로 보이는 아침이슬이 맺힌 호박꽃이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우냐고 했다. 욕심그릇이 작은 사람들은 항상 행복이 넘쳐흘렀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정작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이 주목받고 과시하기 위한 게 아니라면 돈은 노동자의 생계비로 충분하다고 했다. 없어도 가진 것에 만족하면 부자다. 있어도 더 가지려고 하면 거지다.
청빈한 영혼에는 사랑이 충만한 것 같다. 영등포역 부근에서 노숙인들을 무료로 진료하던 선우경식 원장의 처방전은 특이하다. 약 이름 옆에 ‘밥’이나 ‘담요’ 같은 단어가 씌어 있었다. 눌변이던 그는 말 한마디 글 한줄 남기지 않고 저세상으로 갔다고 한다. 가구점을 하는 논현동의 내가 아는 부부는 임대료도 밀리는 형편이다. 그래도 그들은 삼십년 전부터 남모르게 전과자들을 위해 돈을 보냈다. 그게 누적되어 십사억원의 기적이 된 걸 우연히 알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라고 한 예수는 무엇을 말했던 것일까.
엄상익 변호사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