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오후, 서울시 서초구청사 대강당에선 5급 이상 간부직을 포함한 전 직원이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시행에 대비한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강의는 박균성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맡아 법의 주요 내용과 위반사례 등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300여 명의 참석자들은 저마다 펜과 수첩을 들고 박 교수의 말을 경청했다. 박 교수는 “법령을 위반하거나 지위·권한을 남용해 나에게 또는 남에게 유리한 행위를 부탁하는 것 이게 바로 부정청탁”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교육에 참여한 한 구청 직원은 “전에는 피부로 와닿지 않았는데 직접 교육을 받아보니 정말 김영란법 시행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하지만 위반사례를 살펴보니 법 해석에 따라 위법 여부가 달라지고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았다. 설명을 들어도 어떻게 적용할지 몰라 두려운 게 사실이다”고 말했다.
서울시 서초구청 본관 대강당에 모인 300여 명의 직원들이 ‘김영란법’ 시행에 대비한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일요신문DB
요즘 관가에 부는 ‘뜨거운 이슈’는 단연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이른바 ‘김영란법’이다. 법 시행일(9월 28일)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관가에서는 때 아닌 ‘공부 열풍’이 불고 있다. 각 기관들은 직원 대상 교육 일정을 잡는가 하면 법을 면밀히 설명해줄 전문가 섭외에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민원인 청탁, 식사·선물·경조사비 등 그동안 관행으로 여겨왔던 것들이 모두 김영란법 저촉 대상이다 보니 행여 직원들이 구설에 오르거나 형사처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김영란법에 대비해 ‘예방접종’에 나선 공직사회 분위기를 짚어봤다.
김영란법의 주요 내용은 공직자와 언론사, 사립학교·사립유치원 임직원, 사학재단 이사진 등이 제3자에게 1회 100만 원, 연간 300만 원을 초과하는 금품을 받거나 요구하면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에 상관없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의 형사처벌에 처한다는 것이다.
정부 부처 중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인 곳은 보건복지부다. 복지부는 정진엽 장관이 직접 나서 직원들의 김영란법 교육을 챙기고 있다. 복지부 한 관계자는 “권익위에서 배포한 김영란법 책자가 있지만 정 장관은 ‘그 두꺼운 걸 누가 다 읽느냐’며 책자를 따로 만들고 별도 교육을 지시했다”고 말했다. 복지부는 지난해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실시한 ‘2015년도 공공기관 청렴도 평가’에서 10점 만점에 6.88점을 받아 2000명 이상 중앙행정기관 중 꼴찌를 기록했다. 정 장관이 직접 나선 것도 청렴도 평가 꼴찌의 불명예를 지우기 위함이라는 전언이다.
복지부는 다음달 23일까지 소속기관 및 산하기관을 대상으로 권역별 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다. 복지부 대변인실 관계자는 “지난달 10일 국장급 이상 고위공직자를 대상으로 한 특별교육을 시작으로 현재는 본부 각 실별 교육은 마친 상태다. 앞으로는 산하기관 직원들을 대상으로 교육이 예정돼 있으며 각 기관과 일정 조율 중에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복지부는 내부게시판을 이용해 김영란법 적용에 관한 직원들의 질문을 취합한다. 여기에 모인 사례들을 엮어 ‘질의답변(Q&A) 자료집’을 제작, 배포할 방침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은 잡지 못했지만 국민권익위원회 자료를 토대로 직원들의 궁금증을 모아 현실적인 행동강령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영란법 주무 부처인 국민권익위원회는 교육자료 배포와 설명회에 나갈 강사진을 꾸리는 데 분주한 모습이다. 권익위는 이달 초 국가공무원, 사학 관계자, 언론인, 공직 유관단체 등을 대상별로 구분한 ‘김영란법 매뉴얼’을 공개할 예정이다. 권익위는 이미 지난 7월 청탁금지법 해설서와 교육자료, 권역별 순회 설명회 자료집 등을 일반에 공개했지만, 각 부문에서 문의가 빗발치자 별도의 매뉴얼을 마련하기로 한 것이다. 권익위 관계자는 “교육 요청도 계속 늘고 있어 일정이 빠듯하게 짜여 있다”며 “요즘에는 외부 청렴 강사진을 꾸려 교육 일정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관가에서 김영란법에 대비한 청렴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법 시행 초기에 혹시나 ‘시범케이스’로 걸리는 희생양이 되지 않을까 긴장하는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교육부 한 고위관계자는 “아무래도 법이 시행되면 사정당국이 국면전환용으로 단속을 강하게 할 텐데 첫 사례로 이름을 올리지 않으려고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나중에 죄가 없다고 밝혀져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담이 된다. 자칫 잘못하면 인사상의 불이익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애초에 흠집 날 짓은 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실제 공직사회 내에서는 김영란법 시행 후 사람 만나기를 꺼리게 될 거라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아예 연말까지 인간관계를 끊겠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기획재정부 한 공무원은 “정책에 대한 피드백을 받거나 업계 동향을 알기 위해 업계 관계자를 만날 때가 많다”며 “하지만 단속 시범케이스가 되지 않으려면 연말까지는 업계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만나더라도 당분간은 더치페이를 철저히 하는 게 속 편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무원들 다수가 김영란법 시행에 대해 걱정하고 있지만 이를 반기는 일부 공무원도 있다. 이들은 대부분 부담스러운 식사 자리나 선물 등을 거절할 명분이 생겼다는 점에서 공감했다. 서울 강남 소재 한 초등학교 교사 김 아무개 씨(58)는 “가끔 학부모가 비싼 선물을 하면 이를 거절하는 과정에서도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준 적이 있었다”며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이런 부분이 줄어들고 학부모와의 관계도 깔끔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 세종청사에서 근무하는 한 공무원은 “그동안은 기업 사람들과의 저녁약속이 대부분 서울에서 잡혀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으니 오히려 몸은 편해질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결국 공무원 사회의 복지부동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란 지적도 잇따른다. 서원석 한국행정연구원 부원장은 “(김영란법이) 부정청탁이 줄어드는 효과를 위해서 필요한 제도는 맞지만 민원 성격이 강한 업무나 현장과 소통이 중시되는 분야에서 공무원의 소극적 대응이 우려된다. 이어 서 부원장은 “이는 오히려 현실을 보지 못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부작용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서 부원장은 공무원의 복지부동을 막기 위한 현실적인 해법으로 민관이 소통할 수 있는 공식 창구의 활성화를 강조했다. 서 부원장은 “공식적인 제도와 틀 안에서 만남을 가지면 된다”며 “일과 업무시간에 민원인과의 공식적인 토론·면담·의견교환 등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업무방식이 활성화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ilyo.co.kr
“그동안은 관행이었는데”…대학가·기업도 김영란법 대응 마련 ‘분주’ 김영란법 시행이 다가오면서 대학가와 기업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먼저 대학가는 산학협력 관련 행사의 축소가 불가피하다. 특히 대학이 산학협력 기관 등으로부터 받는 기부금이 쟁점으로 될 것으로 보인다. 직무 연관성과 기부금 형태를 따지지 않고 일정 금액 이상을 받을 수 없는 만큼 기부금 접수는 더욱 까다로워지며 자칫 처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소재 한 대학 관계자는 “사립대 교직원이 참석하는 학술대회나 세미나 등 식사 자리에 제한이 생겨 행사에 많은 변화가 생길 것”이라며 “국제교류 관련 행사 또한 영항을 줄 수 있는 애매모호한 조항이 많아 대학 차원에서 따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교직원에게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학원생들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동안 외부교수에게 일종의 거마비를 챙겨주고 식사를 대접하는 대학원 논문심사 관행에 김영란법이 적용될 것으로 관측되기 때문이다. 특히 하반기 논문심사를 앞두고 김영란법이 시행될 경우, 관행을 따르자니 부정청탁 시비로 불거질 수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학원생 김 아무개 씨(여·29)는 “관행대로 논문 심사 교수에게 거마비(교통비)와 식사를 제공하려니 법을 어기게 되고, 안 하자니 불이익을 당할 거 같다”며 “현재로서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심사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토로했다. 기업도 그동안 관행으로 여겨져 온 접대문화의 대폭 수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다양한 대책을 검토 중이다. 대기업 홍보팀 장 아무개 과장은 “시행 날짜는 다가오는데 그저 답답할 뿐”이라며 “법을 몰라 실수로 단속되지 않도록 시나리오별 가이드라인을 짜고 교육을 계획 중”이라고 말했다. 건설업체 한 관계자는 “여러 기관과 식사를 하며 친분을 쌓는 것이 부서의 주요 업무인데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많은 제약이 있어 난감하다”고 말했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김 아무개 과장은 “정책에 따라 업계가 받는 영향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는데 공무원이 업계 사정을 모르면 우리만 피해를 받게 된다”고 걱정했다. 기업 홍보팀 말단 직원들은 김영란법으로 인해 또 다른 애로사항을 겪고 있다. 대기업 홍보팀 2년차 사원 이 아무개 씨(32)는 “솔직히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저녁 있는 삶이 있을 것이라 꿈꿨다. 하지만 정작 회사에서는 애매한 방법으로 접대를 하라고 시나리오까지 짜 주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내직원들끼리 자신에게 접대 지시가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벌써부터 눈치 싸움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