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은 1-14로 대패했지만 이대호가 3안타 경기를 펼쳤던 9월 1일, 텍사스 레인저스의 베테랑 타자 카를로스 벨트란은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추신수에게 다가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추, 저기 1루 수비 보고 있는 선수가 추랑 아주 친한 친구 사이라고 하는데 맞아? (추신수가 맞다고 하자) 진짜 저 선수는 대단한 것 같아. 체격만 보면 야구 잘할 선수가 아닌데 컨택 능력이 정말 뛰어나 보이거든. 저 체격으로 야구 잘하는 게 신기할 정도야.”
벨트란뿐만 아니라 텍사스의 다른 선수들도 추신수에게 이대호의 체격에 대해 궁금증을 나타냈다고 한다. 야구하기에 다소 큰 몸집을 갖고 있는 선수가 안타를 치고 베이스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모습과 수비에 집중하는 태도 등이 텍사스 선수들의 눈에는 상당히 인상적으로 비친 것이다.
왼 팔목 수술로 현재 재활 프로그램을 소화하고 있는 추신수는 8월 31일, 댈러스의 한인타운에서 이대호를 만나 점심을 함께했다. 이들은 지난 4월 5일 텍사스 홈에서 열린 2016 메이저리그 개막전에서 한 번 만났던 사이다. 당시 추신수는 2번 우익수로 선발 출전했고, 이대호는 선발 라인업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7회 대타로 출전,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른 바 있다. 이후 추신수가 부상 등으로 경기에 뛰지 못하면서 만날 기회가 없다가 이번에 이대호가 텍사스 원정을 오게 되면서 재회한 것이다.
두 사람은 개막전에서 만났던 상황을 떠올렸다. 당시의 이대호는 메이저리그의 서른네 살 루키 신분이었다.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는 각오 하나로 시애틀 매리너스의 마이너리그 계약까지 받아들였고, 스프링캠프에서의 경쟁을 통해 25인 로스터 진입에 성공했다. 개막전에서의 이대호는 메이저리그 문화에 익숙지 않은 ‘초보’였고, 모든 상황이 낯설고 새로울 뿐이었다. 즉 그 당시만 해도 자신의 올 시즌 운명이 어떻게 펼쳐질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4개월이 훌쩍 지난 8월 말, 다시 텍사스 레인저스 홈구장을 찾은 이대호. 그동안 자신이 메이저리그에서 고군분투했던 일들을 추신수에게 전하며 결코 쉽지 않은 메이저리그 적응 과정을 설명했다. 이미 7년이란 시간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낸 추신수로선 이대호의 경험담이 재미있기도, 조금은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친구는 다른 선수도 아닌 ‘조선의 4번타자’ 이대호이기 때문이다.
텍사스 원정에서 기자를 만난 이대호는 경기 전 클럽하우스에서 자신이 경험한 마이너리그 생활을 자세히 전했다. 그는 좀 더 일찍 마이너리그로 내려갔더라면 팀에 도움되는 선수가 됐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손바닥 부상을 당했을 때, 그때 참지 말고 부상 치료에 전념했어야 했다. 행여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면 다시 올라오기 어려울 것 같았고, 그 경험을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부상을 악화시켰다.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니까 오히려 홀가분한 심정이 되더라. 감독님을 찾아가 될 수 있으면 매 게임 출전하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타격감 회복을 위해 투수의 공을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격에 임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뒤늦게 짧은 마이너리그 생활을 경험했지만 타코마에서 머문 시간들이 야구하는 데 자신감을 선물해준 건 사실이다.”
이대호는 트리플A팀인 타코마 레이니어스 소속으로 7경기에 나섰고, 27타수 14안타, 0.519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타코마 레이니어스 팀을 바로 접수했다.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면서 내가 갖고 있던 모든 부담을 내려놨다. 이전 한국, 또는 일본에서 야구했을 때처럼 자신감을 갖고 타석에 들어섰고, 상대 투수가 어떤 공을 던지든 내 스윙을 해버리니까 의외로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 사실 빅리그에선 매 경기마다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컸다. 그런데 마이너리그에선 못 쳐도 된다, 편하게 맞혀나가자는 마음으로 바뀌었고, 그런 사고의 변화가 타석에 들어선 날 자유롭게 만들어줬다. 그러면서 안타가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이대호가 플래툰시스템이 아닌 선발로 매 경기에 나섰더라면 그는 짧은 슬럼프를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방망이 실력만큼은 추신수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정도이고, 적응력이 뛰어난 이대호는 분명 팀의 주전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마이너리그에선 내가 못 쳐도 경기 중에 교체되는 데 대한 두려움이나 부담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빅리그에선 내가 보여주지 못하면 한두 타석 만에 바로 교체되니까 타석에 들어서도 자꾸 다른 데 신경이 쓰였다. 타석에 넣었다 뺐다 하는 방식에 적응하고 이겨내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잘 안됐다. 주전들이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걸 비집고 들어가기가 정말 어렵다는 걸 새삼 절감 중이다. 주전을 능가할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보이지 못하면 지금처럼 투수에 따라, 팀 상황에 따라 내 자리가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다.”
이대호는 야구에서 가장 어려운 건 기술보단 마인드 컨트롤이라고 강조한다.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생각이 많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진 적도 많았던 그이다.
“요즘 부쩍 한국 생각이 많이 난다. 타격에 어려움을 겪을 때 한국말로 질문할 수 있는 코치님이 계셨으면 했다. 내가 많이 의지했던 김무관 코치님이 옆에 계셨더라면 코치님 붙잡고 하소연도 하고 어리광도 부리며 위로 받았을 것이다. 아니 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코치님께서 알아서 다 말씀해주셨을 것이다. 이곳에선 말이 안 통하다보니 자꾸 소외받는 것만 같다. 뭐 별 수 없다. 내가 택한 길이고, 힘든 것보다 보람되고 가슴 벅찬 일들이 훨씬 많으니까 참고 가는 수밖에.”
그렇다고 절망하진 않는다고 말하는 이대호. 스프링캠프에서 메이저리그에 살아남았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이다.
“곧장 마이너리그로 내려갔어야 할 선수가 빅리그에서 오래 버텼다. 그렇게 할 수 있게끔 기회를 준 팀에 고마운 생각이 크다. 남은 시간 동안 잘해내고 싶다. 그래서 내 도전이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 있는 도전이었다고 내 자신에게 평가받고 싶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이대호-앤드루스 충돌 사건의 재구성…무쏘의 뿔처럼 쾅! ‘니 와이카노~’ 9월 1일(한국 시각) 텍사스 레인저스와 원정 3연전 중 마지막 경기를 치른 이대호는 “참으로 힘든 하루였다”는 얘기를 전했다. 땀으로 온몸을 샤워한 듯 지치고 힘든 표정이 역력했던 그는 40도가 넘는 텍사스의 뜨거운 날씨 속에서 오후 1시 경기를 치른 데다 이날 파울볼을 잡으려고 벽이랑 부딪히고 1루 수비 중 텍사스 레인저스 앨비스 앤드루스와 ‘충돌 사고’까지 경험하며 어느 때보다 긴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8일간의 마이너리그를 경험 후 빅리그에 복귀한 이대호는 전날 2안타를 터트린 데 이어 이날도 3안타 경기를 펼치며 자신의 존재감을 방망이로 재확인시켰다. 그러나 수비 중 두 차례의 해프닝이 벌어지면서 시애틀과 텍사스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먼저 이대호는 경기 중 파울볼을 처리하기 위해 1루쪽 관중석을 향해 달렸고, 파울볼이 그라운드가 아닌 관중석 쪽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공을 쫓던 이대호는 벽을 보지 못하고 몸이 관중석 안쪽으로 쏠려 고꾸라지고 말았다. 이대호는 경기 후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잡을 수 있는 공이라고 생각했는데 공이 관중석 쪽으로 계속 날아갔다. 조금 더 달려가면 잡겠다 싶어 펜스를 보지 못하고 달려갔는데 광고판에 부딪히면서 관중석 쪽으로 고꾸라졌다. 고꾸라지는 순간 너무 창피하더라. 텍사스 더그아웃 쪽에서 유독 (추)신수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통증이 심했지만 절대 내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대호가 파울볼을 따라가다 광고판에 부딪히면서 관중석 쪽으로 고꾸라진 모습(위)과 1루 수비 중 텍사스 레인저스 앨비스 앤드루스와 충돌해 넘어진 모습. 사진출처=MBC스포츠플러스 중계 화면 이날 경기에선 이대호와 텍사스의 앨비스 앤드루스가 충돌하는 위험한 장면이 발생했다. 2회말 앤드루스는 2루수 앞으로 떨어지는 땅볼 타구를 날렸고, 1루로 향하는 과정에서 1루 베이스 바깥쪽을 밟지 않고 안쪽을 밟다가 이대호를 밀쳤고, 이대호는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에 이대호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두 팔을 벌려 “이게 무슨 일이냐?”하는 제스처를 취하자 앤드루스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때리는 제스처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 전했다. 다시 이대호의 관련 설명이다. “솔직히 좀 황당했다. 내가 어렵게 잡아서 부딪힌 거라면 이해하는데 여유 있게 아웃되는 상황에서 충돌이 벌어져 ‘이게 뭔가’ 싶더라. 화가 났지만 상대가 실수했다고 사과하니까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그건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시애틀 매리너스 선수들은 앤드루스의 이 행동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7회 시애틀의 투수 카미네로는 앤드루스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가슴을 스치는 몸에 맞는 공을 던졌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데드볼이라면 앤드루스가 1루로 걸어 나가는 걸로 마무리됐겠지만 주심은 이 공을 이대호를 위한 보복구로 봤고 곧장 카미네로에게 퇴장 명령을 내렸다. 이대호는 카미네로의 몸에 맞힌 공이 사구라고 생각했을까? “일부러 맞힌 건 아니라고 봤다. 카미네로가 앤드루스를 상대로 계속 몸쪽 승부를 펼쳤고, 선수들 사이에서도 그런 움직임은 없었다.” 시애틀의 스캇 서비스 감독도 “그 상황에서 누군가를 맞히려고 하지 않았다”며 팀 차원의 대응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더그아웃에서 이 상황을 자세히 지켜본 추신수의 생각이 궁금했다. 추신수는 앤드루스가 벤치로 돌아와 자신에게 한 얘기를 대신 설명했다. “앤드루스 말로는 타구만 보고 뛰다가 라인 안쪽으로 뛰었고, 베이스를 밟으려는 순간 스피드를 냈던 몸이 제어가 안됐다고 말하더라. 무조건 자신이 잘못한 거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앤드루스가 공에 맞는 상황은 보복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애틀 투수가 계속 몸쪽 승부를 펼쳤기 때문이다. 공교롭게 몸에 맞는 볼이 나오면서 오해할 만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야구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해프닝이기 때문에 이 일을 확대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추신수는 자신과 이대호가 절친한 친구 사이라는 걸 텍사스 선수들이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전날(8월 31일) 경기 중 루그네드 오도어가 2회 말 중전 안타를 때려낸 후 1루로 진루했다가 수비를 보던 이대호의 벨트를 잡아당기는 장면도 장난치려는 의도였다는 것. “동료 선수들이 나랑 대호가 친하다는 걸 알았고, 평소 장난기 많은 오도어가 1루에서 대호를 만난 이후 벨트를 잡아당기는 걸로 친근함을 표시한 것이다. 나중에 오도어에게 직접 들은 얘기였다.” 당시 이대호는 오도어의 행동에 깜짝 놀라 뒤를 쳐다봤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수비에 집중했다. 개막전부터 8월의 마지막 경기까지 텍사스 레인저스는 이대호에게 다양한 경험과 추억을 안겨준 게 분명하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