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0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의 발인식이 엄수되고 있다. 박정훈 기자 onepark@ilyo.co.kr.
장례기간 신동빈 롯데 회장은 빈소를 찾아 오열했다. 2007년 당시 롯데 정책본부장에 오른 신동빈 회장은 이인원 부회장(당시 부본부장)의 보좌를 받았다. 롯데가(家) ‘형제의 난’ 과정에서도 이인원 전 부회장은 신동빈 회장의 편에 섰다. 지난 30여 년간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의 ‘복심’으로 불렸던 그는 옛 ‘주군’을 뒤로하고 ‘신동빈의 후견인’이 됐다.
당초 롯데 수사 대응과 관련해 이인원 부회장은 신동빈 회장의 또 다른 최측근인 황각규 정책본부 사장, 소진세 정책본부 대외협력단장(사장)과 이견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사정기관 관계자는 “오너는 물론 후배(황각규, 소진세)들에게도 책임을 넘길 수는 없어 안타까운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인원 부회장은 유서에 “롯데그룹 비자금은 없다”면서도 “2015년 초까지 모든 결정은 총괄회장이 했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인원 부회장의 유서가 사실이라면 현 오너보다는 신격호 총괄회장에게 수사의 화살이 쏠리게 된다. 또 그룹 차원의 비자금 조성 의혹이 추가 제기되더라도 그 원인은 신격호 총괄회장에게 돌아간다.
앞서 검찰은 신격호 일가의 비자금 조성 의혹 규명에 자신감을 내비쳤다. 비자금 조성은 기정사실이며, 이 돈의 용처 가운데 하나로 친박 핵심 실세를 언급하는 보도까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검찰 안팎에선 수사가 예정대로 진척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복수의 사정기관 관계자는 간접적으로 롯데 수사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당초 롯데 수사는 대우조선해양 수사와 더불어 ‘캐비닛 수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전부터 수집해 온 ‘묵은 첩보’를 활용한 정권 차원의 ‘기획 수사’라는 것이다. 이 기획의 꼭대기에는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이 있다는 얘기가 있다. 재계 관계자는 “우 수석이 수사 개시 전 VIP(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 호텔롯데 상장 얘기를 꺼내면서 ‘롯데를 이대로 놔두면 호텔롯데 지분을 소유한 일본 주주들에게 1조 원대 이득이 돌아간다’는 등 국부유출 프레임을 짰다. VIP가 그걸 믿은 것이다”고 말했다. 사정기관 관계자 역시 “그게 정설”이라고 답했다.
롯데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이동열 서울중앙지검 3차장 검사는 ‘우병우 사단’의 핵심 인물로 꼽힌다. 우 수석과는 대검 중수부, 범죄정보기획관실 등에서 함께 일했다. 또 다른 사정기관 관계자는 “지난 1월 이 검사가 중앙 3차장으로 부임한 후 중요 수사 현황은 (검찰 수뇌부가 아닌) 어딘가로 직보된다는 뒷말이 많았다”고 전했다.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지난 10여년 동안 주요 계열사에 등기이사로 이름만 올려놓고 수백억원대 급여를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고성준 기자 joonko1@ilyo.co.kr
결과적으로 검찰은 이인원 부회장이 숨을 거두면서 비자금 의혹 등에는 접근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신동빈 회장이 스스로 자백하지 않는 한 복잡한 롯데의 자금 흐름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법조계 관계자는 “조세회피처 등 해외까지 얽혀 있는 기업의 은밀한 자금을 들여다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롯데 관계자들은 한목소리로 “비자금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 검찰은 비자금 의혹 대신 오너 일가의 횡령·배임 혐의 규명에 집중하는 분위기다. 신격호 총괄회장과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 씨, 이들의 딸인 신유미 롯데호텔 고문에 대해선 6000억 원대 탈세 혐의를 두고 있다. 특히 검찰은 수사의 최종 타깃인 신동빈 회장이 정책본부를 통해 횡령·배임·탈세에 관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들 사건의 시점(2000~2012년)은 신격호 총괄회장이 직접 경영 전면에 나섰던 때로 신동빈 회장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반론이 나온다. 신동빈 회장의 개입을 입증할 수 있는 참모진의 진술 또한 없는 상황이다. 때문에 법조계 안팎에선 신동빈 회장을 추석 전후 소환하고, 불구속 기소하는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 지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 경우 남은 책임은 치매를 앓고 있는 신격호 총괄회장이 지게 된다. 롯데는 공공연히 “구태”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신격호 체제’와 ‘신동빈 체제’를 구분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특혜 의혹이 불거진 롯데 월드타워 건설도 ‘신동빈은 반대했지만 신격호가 밀어붙였다’는 것이 롯데 측 입장이다. 이를 종합하면 검찰과 롯데가 수사 막바지에 이르러 신격호 총괄회장에게 책임을 묻는 일종의 ‘출구 전략’에 합의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검찰은 수사 진행 상황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장례기간 신동빈 롯데 회장은 빈소를 찾아 오열했다. 2007년 당시 롯데 정책본부장에 오른 신동빈 회장은 이인원 전 부회장(당시 부본부장)의 보좌를 받았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9월 1일 검찰은 롯데 수사를 재개하면서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했다. 당초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이 검토된 신동주 전 부회장은 이인원 부회장이 숨진 후 피의자로 전환됐다. 주된 혐의는 국내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으면서 400억 원의 급여를 챙긴 것이다. 신동주 전 부회장 측은 고의성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검찰은 추가 소환 조사를 예고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같은 날 법원은 신격호 총괄회장에 대해 한정후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정상적인 판단 능력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아버지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해 온 신동주 전 부회장은 ‘역풍’에 휩싸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동주 전 부회장의 경영권 분쟁 컨트롤타워로 활용돼 온 SDJ코퍼레이션은 최근 핵심 임원들이 줄사임하며 위기를 겪고 있다. ‘신동주의 책사’로 불린 민유성 전 산업은행장도 대우조선해양 수사와 관련해 수사 선상에 올랐다. 신동빈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로 경영권 탈환을 노렸던 신동주 전 부회장 측이 되레 ‘사면초가’에 몰린 것이다.
검찰이 혐의 입증을 자신한 만큼 신동주 전 부회장에 대한 기소는 추석 전후 검토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 검찰 안팎에선 ‘신동주 전 부회장은 처벌하지 않고 신동빈 회장만 처벌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힘을 받고 있다. 일각에선 구속영장 청구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신동주 전 부회장의 홍보 업무를 맡고 있는 홍순언 에그피알 대표는 “현재로서 구속 여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신동빈 회장에 대한 소환은 신동주 전 부회장에 대한 기소 여부가 검토되고 난 이후에야 결정될 것으로 전해진다. 이인원 부회장의 죽음이 향후 롯데 수사와 경영권 분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모아진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