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의원회관 전경,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8월 30일 오전 10시경 취재진은 국회의원회관 1층 택배 보관소를 찾았다. 명절마다 전국 각지에서 보낸 선물들이 수북이 쌓이는 곳이다. 의원들이 속한 상임위원회의 피감기관, 지역구 등에서 보낸 선물들이 대부분이다. 지역 특산물부터 고급 전통주까지 다양한 선물이 도착하는 곳이기 때문에 매년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만난 한 택배기사는 “추석 기간이 좀 남아있지만 아무래도 김영란법 때문에 추석 선물이 조금은 줄어들 것 같다”고 내다봤다. 산더미같이 추석 선물이 쌓였던 지난해와 달리 수십 개의 택배 상자들 중 선물세트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광천 조양맛김, 성주참외 등 추석 선물 상자는 약 7개에 불과했다.
20여 분 뒤 ‘건과궁합오색세트’ 13개가 택배보관소에 도착했다. 한 세트 가격은 약 16만 원. A 단체가 전현희 의원 등 13명 앞으로 보낸 추석선물이었다. 상자를 내려놓는 택배기사는 “본관에도 몇 개 갖다 줘야 한다. 본관에 더 높으신 양반들이 있는데 얼른 서둘러야 한다”고 전했다.
A 단체가 약 200만 원 어치의 추석 선물을 국회 의원회관으로 보낸 것이다. A 단체 관계자는 “선물세트가 국회 쪽으로 배달된 것은 우리도 모른다. 우리 부서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전현희 의원실 관계자는 “깜짝 놀랐다. 바로 반송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너무 비싸다. 김영란법 때문에 의원실 차원에서 추석 선물을 받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 의원도 예전부터 받지 말라고 했다. 그 정도는 기본 상식”이라고 덧붙였다. 전 의원 역시 “선물이 온 줄 몰랐다. 법 시행 전이라도 고가의 선물은 삼가는 것이 맞다. 도착하면 바로 돌려보낼 것이다”고 전했다.
이처럼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법)이 국회 의원회관의 명절 풍속도를 바꾸고 있다. 김영란법 시행령에 따르면 공직자와 언론인, 사립학교 교원, 공직유관단체 종사자를 포함하는 공직자 등이 직무와 관련해 받을 수 있는 식사 대접 기준은 3만 원이다. 공무원 등은 5만 원을 초과하는 선물을 받거나 10만 원이 넘는 경조사비도 받을 수 없다. 이른바 ‘3․5․10 법칙’이다.
국회의원은 김영란법 적용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국회 의원회관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300개 의원실은 ‘김영란법으로 행여 구설수에 오를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일부 의원들은 최근 ‘손수레 부대’의 해체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비서는 “명절마다 1층 택배보관소에 칸막이가 들어섰다. 손수레 부대들이 칸막이 별로 줄을 쭉 섰다. 트럭들이 와서 택배 상자들을 쌓아놓으면 직원들이 손수레를 가져가서 의원실로 실어 날랐다. 특히 인턴 비서들이 죽어난다. 선물을 옮기느라 하루종일 일을 못 했다. 손수레가 모자라 방끼리 빌려주기도 했다. 온종일 선물을 돌리고 나면 하루 다 날리고…그런데 김영란법 때문에 손수레 부대들이 해체 선언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국회 보좌진들 사이에서 의원들 집 주소는 ‘1급 보안 사항’으로 통한다. 추석 선물을 받지 않겠다는 내부의 원칙을 정해 놓아도 의원 집으로 직접 선물을 보내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한 보좌관은 “9월 28일부터 시행한다고 해도 일단 심리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의원의 집 주소는 당연히 모른다고 하고 안 가르쳐줘 버린다”라고 귀띔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집주소를 알아내기 위한 ‘꼼수’도 나타나고 있다. 또 다른 새누리당 보좌관은 “다른 의원실의 보좌관을 끼고 민원을 넣기도 한다. 일주일 전에 더민주 쪽에 잘 아는 보좌관이 제게 은근슬쩍 의원 집주소를 물어봤다. 자꾸 부탁을 해와서 입장이 곤란했다”고 토로했다. 더민주의 한 비서관도 “기업이 일방적으로 보낸 것들을 막을 방법이 없다. 분명 집 주소를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일괄적으로 의원실 명단을 쭉 뽑아서 보내곤 한다. 사전에 알기가 쉽지 않다”고 보탰다.
국회 의원회관엔 ‘김영란법 감별사’도 등장했다. 이들은 추석 선물이 도착하면, 즉시 선물의 반송여부를 판단한다. 국회 관계자는 “의원실마다 따로 감별사를 두는 경우가 꽤 있다고 들었다. 인턴이나 비서가 선물을 일일이 뜯어 가격을 검색한 뒤 5만 원이 넘으면 반송을 하는 식이다”고 전했다.
의원들은 저녁 식사나 골프 약속도 자제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비서관은 “전체적으로 예민한 분위기다. 요즘 의원들이 골프 약속을 취소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 돈으로 치면 상관없지만 운이 나빠 김영란법 위반의 선례로 남으면 평생 주홍글씨가 된다”고 전했다. 다른 비서관도 “우리 의원이 김영란법 위반 ‘1호 국회의원’으로 낙인찍히면 이보다 불명예스러운 일이 있을까. 의원들도 예민한 상태다”고 밝혔다.
기업들도 김영란법의 위력을 체감하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명절마다 사회상규에 맞게 선물을 보내왔는데 김영란법이 선물을 일정 금액으로 정해 놓아서 우리도 고민이다. 김영란법과 전혀 무관한 ‘비즈니스 파트너’에게 추석 선물을 하려고 해도, 그 사람의 배우자가 교수나 언론인일 수 있다. 선물하기 전에 미리 전화해서 ‘혹시 배우자가 김영란법 적용대상 아니냐’고 물어볼 수는 없지 않나”라고 토로했다. 김영란법 적용대상에는 사립학교 교직원, 언론인, 공직유관단체 종사자 등 공직자 본인뿐 아니라 배우자도 포함된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