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100만 원을 들여 개인 전봇대를 설치한 전직 변호사 모리타 다케오 씨는 록그룹 퀸이 마치 자신의 집에서 라이브공연을 해주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사진출처=월스트리드저널재팬
전직 변호사 모리타 다케오 씨(82)는 최상의 오디오 음질을 꿈꾸던 중 개인 전봇대를 설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미 6000만 원이 넘는 미국산 앰프를 비롯해 1960년대 극장에서 사용되던 독일제 스피커, 금으로 만든 일본제 케이블 등 다수의 고급 오디오 기기를 소장하고 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오디오광’이다.
하지만 모리타 씨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결국 ‘통상의 전원으로는 완벽한 음질을 구현할 수 없다’고 판단. 약 1100만 원을 들여 12m 높이의 콘크리트제 전봇대를 마당에 설치했다. 오직 자신의 집에만 전기가 공급되는 ‘나만의 전봇대’였다.
모리타 씨는 “오디오 시스템에서 전기는 혈액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러한 혈액이 오염된다면 몸 전체 망가지지 않겠는가. 아무리 비싼 오디오를 사용하더라도 소용없다”며 공사를 진행한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록그룹 퀸(Queen)의 레코드를 턴테이블에 올린 후 만족스럽다는 듯 소파에 걸터앉았다. 전봇대 설치 전과 비교하자면 “확실히 소리가 좋아졌다”는 게 그의 평가다. 요컨대 “마치 록그룹 퀸이 자신을 위해 집에서 라이브공연을 해주는 느낌”이라고 한다.
이처럼 최근 일본에서는 ‘나만의 전봇대’를 세우는 오디오 마니아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귀가 황홀해지는 사운드 구축에는 앰프나 스피커뿐 아니라 순수한 전원도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일반 전봇대는 이웃과 전원을 공유하다보니 전기 신호에 노이즈가 생기고, 미묘하게 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연주의 깊은 맛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이번 모리타 씨의 전봇대를 설치한 ‘이즈미전기’는 오디오 전원 공사로 유명한 곳이다. 지난 10년간 “깨끗하고 순수한 전기를 오롯이 공급받고 싶다”는 열혈 마니아들의 요청을 받아 일본 전역에 40여 건의 개인 전봇대 공사를 담당해왔다. 회사 측은 “나만의 전봇대를 집에 설치한 고객들 대부분이 ‘소리가 방안으로 녹아 들어오는 것 같다’며 매우 흡족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키오 요시하라 씨 집에 설치되는 전봇대. 그는 전원 관련 기기 마련에만 총 4300만 원을 썼다. 사진출처=월스트리트저널재팬
도쿄에 사는 전직 은행원 요시하라 유키오 씨(62)도 개인 전봇대 예찬론자 중 한명이다. 그는 “이전부터 낮에 비해 이웃들이 가전을 쓰지 않는 심야시간대가 오디오 음질이 훨씬 좋게 들렸다”면서 “궁금증이 일어 ‘오실로스코프(oscilloscope·전압 전류를 측정하는 장치)’로 조사했더니 가전에 사용되는 인버터가 노이즈의 원인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요시하라 씨는 개인 전봇대를 설치하고, 변압기 및 차단기를 교환하는 등 전원 관련 기기 마련에만 총 4300만 원을 썼다. 전원 공사가 끝난 뒤 비로소, 벨기에 출신 바이올린 연주자 아르튀르 그뤼미오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었을 때는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소리가 굉장히 선명해 눈앞에서 연주를 듣고 있는 듯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다만 그의 아내 레이코 씨는 “남편의 과도한 오디오 사랑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만두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 ‘남편 삶의 보람을 뺏는 것과 마찬가지’라 아내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세계 어느 곳이나 마니아의 집착은 유별나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오디오 마니아들 역시 최고의 음질을 위해서라면 거금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미국 오디오 기기 판매회사 ‘로터스그룹’의 조 코엔 사장은 “한번 빠지면 모든 걸 희생할 만큼 일본 오디오 마니아들은 사운드 추구에 특히 열심”이라고 전했다.
이러한 ‘집착’은 비단 음향기기뿐 아니라 환경으로도 이어진다. 예를 들어 주변 소음을 차단하는 방음실 설계는 물론, 소음발생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철저히 배제하기도 한다. 형광등을 사용하지 않는다거나 에어컨, 냉장고 같은 가전의 경우 인버터방식이 아닌 제품을 선택하는 사람도 많다.
일본에서는 오디오용 전원에 특화된 잡지도 발간된다.
반면에,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의 나카노 쓰토무 교수는 견해가 조금 다르다. 그는 “와인의 좋고 나쁨을 따질 때 화학적 성분분석에 의해 결정하지 않는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듣는 이의 상상력, 감각으로 채워야 할 부분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일본에서 개인 전봇대를 설치하는 과정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가현에 사는 히라노 가쓰히로 씨(60)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4000만 원짜리 스피커와 5000만 원대의 앰프를 소장하고 있는 히라노 씨는 점점 욕심이 생겼다. 어차피 여기까지 투자했는데 나만의 전봇대를 세우면 완벽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전력회사에서는 “지역에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히라노 씨는 “너무 완강히 거절당했기 때문에 더욱 설치하고 싶었다”고 한다. 두 달의 협상 끝에 겨우 허가를 받았지만, 이번에는 이웃주민들이 수상한 눈길로 바라봤다. 좋은 음질을 위해 전봇대를 설치한다는 게 쉽게 납득되지 않는 눈치였다.
히라노 씨는 “뭔가 불법적인 일을 꾸미는 게 아닌지 의심한 이웃도 많을 것”이라면서 “나조차 처음에는 마당에 콘크리트 기둥이 서 있는 모습에 위화감이 들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금은 전봇대가 집의 일부가 되었고, 오디오 음질에도 매우 만족한다. 그는 “나만의 전봇대에 큰 애착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한편, 일본 IT매체 <기즈모도>는 “일본 오디오 마니아들이 궁극의 음질을 위해 찾아낸 정답이 나만의 전봇대”라고 소개하며 “향후 나만의 발전소, 나만의 전선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라고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