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박정훈 기자 onepark@ilyo.co.kr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 일부 유족들의 소송이 제기됐던 것은 지난 2013년 말의 일이다. 전남 완도군에 사는 박 아무개 씨(74)는 이날 변호사 류 아무개 씨(58)로부터 어린 나이에 숨진 큰 형님에 대한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박 씨의 형님(당시 17·고등학생)은 1948년 여순사건에 휘말려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다.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은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제주 4·3 사건 진압 출동을 거부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같은 해 10월 21일 여수와 순천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토벌 작전을 시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반란군’과 ‘빨갱이’로 몰려 희생됐다. 무고하게 사건에 휘말려 수감돼야 했던 박 씨의 형님은 그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좌익사범으로 몰려 군인들과 경찰에 의해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집단 살해됐다.
당시 박 씨와 통화한 변호사 류 씨는 “광주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의 희생자에 대해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며 이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여순사건 유족들은 크게 여수유족회와 순천유족회로 나눠져 소송을 진행했고, 이런 소송 진행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던 다른 지역 유족들의 경우 별도의 소송을 진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박 씨는 다른 유족 112명과 함께 류 씨의 도움을 받아 2013년 12월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가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희생자들을 살해했으므로 유족들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를 보상하라”는 취지의 소송을 제기했다. 약 2년에 걸친 지루한 소송 끝에 결국 지난해 12월 대법원은 유족들의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승소했는데도 박 씨의 손에 들어와야 할 배상금이 차일피일 기일을 미루며 지급되지 않았다. 박 씨가 당시 류 변호사 사무실의 전 아무개 사무장에게 배상금 지급 여부를 묻자, 전 씨는 “아직 돈이 나오지 않았다. 배상금과 관련한 정부 예산 집행에도 순서가 있기 때문에 기다려야 한다”고 답했다. 지난달까지 반년이 넘도록 똑같은 질문과 답변이 하루에도 수차례씩 오갔지만 류 씨와 전 씨는 입을 모아 “아직 돈이 입금되지 않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배상금 지급 절차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박 씨는 이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지난 7월 29일까지 이어지는 앵무새 같은 답변에 분개한 박 씨는 “변호사인 당신들은 정부에 항의하지 못하지만 유족들은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배상금을 지급하는 정부 부처가 어디인지 말해준다면 내가 직접 전화해서 왜 지급이 늦어지는지 알아보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전 씨가 “8월 3일까지는 틀림없이 입금되니까 믿고 기다려 달라”며 그를 만류했다. 박 씨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5일을 더 기다렸다.
그런데 입금된다는 돈은 약속날인 3일에도, 4일에도 입금되지 않았다. 5일 변호사 사무실에 다시 연락하자 직원은 “사무장은 현재 휴가 중이고 8일에 출근한다”고 말했다. 거액의 배상금 지급이라는 큰일을 해결하지 않고 휴가를 갔다는 말에 의아했으나 박 씨는 다시 8일까지 기다린 뒤에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통화 연결음만 울릴 뿐 류 씨의 변호사 사무실은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류 씨의 소식은 대한변호사협회를 통해서야 알 수 있었다. 협회 측은 “류 씨가 8월 6일 사망했고, 8일 협회에 사망신고를 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류 씨는 6일 자신의 사무실 계단에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류 씨의 곁에는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내용의 유서도 함께 발견됐다.
사건 수사를 맡은 서울 서초경찰서는 “류 씨가 승소금으로 받은 18억 9500만 원을 주식 투자로 날린 뒤 심한 압박에 시달렸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류 씨가 지난 2월 19일 서울고등검찰청으로부터 배상금을 모두 지급받았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류 씨는 이를 유족들에게 6개월 동안 숨겨왔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대법원 판결이 나면서부터 이들 변호사 사무실의 태도가 수상했다는 것이 박 씨의 이야기다. 지난해 12월 10일 대법원 판결 직후, 사무장 전 씨는 유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배상금은 가족 관계에 따라 차등 지급되기 때문에 변호사 수임료를 제하고 지급하는 것도 모두 변호사에게 맡기는 것이 편하다”라며 유족들로부터 위임장과 주민등록등본, 계좌번호, 인감증명을 모두 받아 챙겼다. 총 18억 9500여 만 원이라는 거액을 유족들이 직접 분배하는 것이 번거로우므로 변호사 사무실에서 계산을 마친 뒤에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박 씨는 “애초에 십수억 원을 한 번에 받아 챙긴 뒤 주식 투자를 하려고 계획했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박 씨가 받아야 할 돈은 삼남매가 각각 2000만~4000만 원 상당으로 총 1억여 원에 달한다. 이미 숨진 류 씨로부터 배상금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박 씨는 사무장인 전 씨를 지난달 12일 횡령 혐의로 고소했다. 전 씨가 이 사실을 모두 알면서도 유족들에게 숨김으로써 류 씨의 범행을 도왔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전 씨는 류 씨가 자살한 직후인 지난달 8일부터 행방이 묘연했으나 현재 서초경찰서가 주거지를 알아내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전 씨가 숨진 류 씨의 배상금 횡령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는지 여부를 집중적으로 수사할 계획이다.
박 씨는 “정부와 법원에서 과거사에 희생된 이들의 억울함을 풀고, 사회적인 화합 차원에서 배상을 결정했는데 이런 식으로 유가족이 두 번 피눈물 흘리게 하고 있다”라며 “사무장 전 씨가 류 씨의 범행을 알고 도왔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번 수사를 통해 낱낱이 밝히고 배상금을 청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