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에서 시속 150㎞에 육박하는 구속이 처음 나온 건 100년도 더 전인 1900년대 초반이라고 한다. ‘빅 트레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월터 존슨이 시속 147㎞로 추정되는 공을 던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정통파가 아닌 사이드암 투수라 더 놀라운 스피드였다. 당대 최고 타자였던 타이 콥이 “처음 맞대결할 때 팔이 천천히 내려오는 것만 보였다. 뭔가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만 들었다”고 감탄했을 정도다.
사실 구속은 야구의 공식 기록이 아니다. 날씨와 측정 위치는 물론, 스피드건 제조사에 따라서도 결과가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는 까닭에서다. 그러나 수많은 야구팬들은 여전히 빛처럼 빠른 ‘광속구’에 열광한다. 상대 타자를 압도적인 힘으로 윽박지르는 투수의 빠른 공은 숫자 그 이상의 마력을 지닌다. 그동안 한국, 일본, 미국에서는 어떤 파이어볼러들이 나타나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코리아 특급’ 박찬호는 LA 다저스 시절 시속 161km의 공을 던졌다.
한기주는 2006년 KIA에 입단하면서 신인 역대 최고인 계약금 10억 원을 받았다. 이유가 있다. 비록 비공인 기록이지만, 국내 리그에서 역대 가장 빠른 공을 던진 한국인 투수로 남아 있다. 한기주는 2008년 5월 8일 광주 삼성전과 같은 달 27일 문학 SK전에서 무려 159㎞(이하 구속은 모두 시속 기준)에 달하는 강속구를 뿌렸다. 한 해 전인 2007년 5월 25일 문학 SK전에서 자신이 기록했던 158㎞를 다시 넘어선 구속이었다.
SK 엄정욱과 롯데 최대성도 성적으로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시속 160㎞에 육박하는 강속구로 확실한 족적을 남겼다. 둘은 나란히 공식 경기에서 전광판에 158㎞를 찍은 주인공들이다.
엄정욱은 2003년 4월 27일 문학 한화전, 이듬해인 2004년 6월 29일 문학 KIA전에서 158㎞를 던졌다. 비공식 경기에서는 더 빠른 공을 던졌다는 증거도 있다. 한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엄정욱이 상무 야구단과의 연습경기에서 스피드건 기준 163㎞를 기록한 장면을 방영했다. 구단 관계자들은 “엄정욱이 2003년 스프링캠프에서도 160㎞를 찍었다”고 증언했다. 한동안 부상으로 고생했던 그는 2010년 4월 다시 2070일 만에 선발승을 따내면서 최고 구속 151㎞를 기록했다. 부상 여파로 스피드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는데도 다른 투수들이 부러워할 만한 구속이 나왔다. 최대성도 2007년 5월 10일 문학 SK전에서 158㎞를 기록해 엄정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날 최대성의 직구는 모두 155∼158㎞ 사이에 형성됐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한기주, 엄정욱, 최대성 이후 한동안 나타나지 않던 강속구 투수의 계보는 2014년 넥센 조상우가 다시 이었다. 그해 3월 29일 SK와의 개막전에서 156㎞짜리 직구를 던져 6년 만에 다시 155㎞의 벽을 넘었다. 조상우는 정통파와 사이드암의 사이인 스리쿼터 투구폼으로도 150㎞를 쉽게 넘긴다. 대전고 시절에도 이미 한 차례 154㎞까지 던진 적이 있다.
사실 가장 빠른 공을 던진 한국인 투수는 KBO리그 밖에서 나왔다. 구속이 하도 빨라 ‘코리안 특급’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던 박찬호다. LA 다저스 시절이던 1996년 구단 스피드건에 시속 161㎞를 찍는 파워를 과시했다. 고교 시절부터 이미 강속구로 유명해 메이저리그의 러브콜을 받았고, 전성기 때는 직구 평균 구속이 150㎞를 훌쩍 넘을 정도로 파워 피처였다.
KIA 임창용도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야쿠르트 시절이던 2009년에 전광판 기준 최고 시속 161㎞를 찍었다. 당시 일본 프로야구 역대 2번째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구단 스피드건(158㎞) 속도와 달라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어느 쪽이든 엄청난 구속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미 사이드암으로도 155㎞까지 던졌던 임창용은 당시 팔각도를 스리쿼터로 바꾼 뒤 구속이 더 올라갔다.
# ‘일본’ 투타겸업 괴물 오타니 쇼헤이
투타를 겸업하고 있는 니혼햄의 오타니 쇼헤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괴물’이다. 현역 최고의 스타이자 일본에서 강속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오타니는 지난 6월 5일 요미우리와의 인터리그 경기에서 무려 163㎞짜리 공을 뿌렸다. 4회 1사 만루서 요미우리 6번 루이스 크루즈에게 던진 초구가 163㎞을 찍었다. 도쿄돔을 찾은 관중 4만 6239명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 이날 그의 포크볼 구속이 149㎞에 달할 정도였다.
오타니는 이미 2014년 올스타전에서 162㎞를 기록해 일본을 발칵 뒤집은 적이 있다. 더 나아가 그해 10월 5일 라쿠텐전에서는 한 경기에서 무려 4번이나 162㎞를 던졌다. 2008년 요미우리 외국인 투수 마크 크룬이 기록했던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고 구속에 연속으로 도달한 것이다. 오타니는 2년 뒤 스스로 163㎞를 던지면서 그 기록마저 깼다.
사실 오타니는 아마추어 시절 이미 160㎞ 고지에 올라섰다. 고교 시절 고시엔 대회 준결승전에서 8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면서 정확히 160㎞를 찍었다. 당연히 역대 일본 고교대회 최고 구속이었다. 당시 그 소식을 들은 선동열 전 KIA 감독이 “고시엔은 구속이 가장 정확하게 나오는 구장이다. 엄청난 구속”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오타니 이전에는 2010년 야쿠르트 사토 요시노리가 진구구장에서 161㎞를 전광판에 찍어 역대 일본인 투수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진구구장은 임창용이 161㎞를 찍어 화제가 됐던 바로 그 장소다. 전광판 구속이 후하기로 유명하다. 임창용 때와 마찬가지로 작은 논란이 일기도 했다. 물론 요시노리가 160㎞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던졌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1993년 이라부 히데키, 2002년 야마구치 가즈오, 2004년 이가라시 료타도 각각 158㎞를 던져 화제를 모았다.
인간의 한계점으로 여겨지는 170km의 구속을 기록한 아롤디스 채프먼. 연합뉴스
# ‘미국’ 채프먼 인간의 한계 스피드 기록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스탯 캐스트(타구와 투구 정보 기록 시스템)’ 최고 구속 순위에는 ‘채프먼 필터’라는 게 있다. 시카고 컵스 마무리 투수인 아롤디스 채프먼의 구속이 상위 50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다. 채프먼을 제외한 다른 투수들의 구속을 찾아보고 싶다면, 이 필터를 사용해 채프먼의 기록을 걸러내야 한다. 그만큼 채프먼은 세계 최고의 리그인 메이저리그에서도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다.
그는 쿠바 대표팀 시절부터 100마일(161㎞)을 던지는 투수로 유명했다. 메이저리그 데뷔전부터 103마일(166㎞)을 꽂아 넣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04마일(167㎞)도 던졌다. 조엘 주마야가 보유하고 있던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 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급기야 신시내티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던 2011년 4월 피츠버그와의 경기에서는 무려 106마일, 그러니까 약 170㎞의 구속을 기록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170㎞는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구속의 한계점으로 여겨지던 숫자다. 그러나 채프먼은 2010년 9월 105마일(169㎞)로 올라선 데 이어 마침내 106마일까지 구속을 끌어 올렸다.
한국과 일본에선 평생 단 한 번 160㎞를 넘겨본 투수도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나 채프먼은 뉴욕 양키스 소속이던 지난 7월에 한 경기 투구수 18개 가운데 15개가 100마일(161㎞)을 넘기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채프먼의 공을 받은 양키스 포수 브라이언 매켄은 “일단 투수의 구속이 세 자릿수 마일이 되면, 공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포수는 일단 미트 안에 공이 들어오기만을 바라게 된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뉴욕 메츠의 노아 신더가드도 100마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투수로 유명하다. 올 시즌 직구 평균 구속이 약 158㎞에 이를 정도다. 신더가드가 등장했을 때 ESPN은 “마치 비디오 게임의 괴물투수가 현실에 등장한 것 같다”는 평가를 내놨다. 이 외에도 애틀랜타의 마우리시오 카브레라, 양키스의 네이선 에오발디, 세인트루이스의 트레버 로젠탈 등이 강속구 투수가 즐비한 메이저리그에서도 공이 빠른 편인 투수들로 꼽힌다.
사실 이들 이전에 원조 ‘100마일의 사나이’가 있었다. 앞서 언급한 주마야였다. 주마야는 2006년 디트로이트 입단 후 100마일(161㎞)의 강속구를 꾸준히 뿌려 주목을 받았다. 채프먼 이전에 최고 구속 기록을 보유했던 바로 그 선수다. 그러나 워낙 몸에 무리가 가는 역동적인 투구폼으로 인해 끊임없이 부상에 시달리다 2012년 은퇴하고 말았다.
앞으로 채프먼의 자리를 위협할 선수가 또 나올 수도 있다. 지난 7월 보스턴 산하 상위 싱글 A팀 소속인 마이클 코페치가 마이너리그 경기에서 105마일(168㎞)을 기록해 화제를 모았다. 팀 내 유망주 4위로 꼽힐 만큼 주목 받는 투수다. 향후 메이저리그에서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느리게 더 느리게’ 모닥볼러들…모어는 ‘미국판 유희관’ 메이저리그 레전드 투수 톰 글래빈은 “야구를 향한 나의 열정은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도 수많은 야구 선수들이 가슴에 새기고 있는 명언이다. 글래빈 자신이 시속 140㎞ 언저리의 직구로 5번의 20승과 14번의 200이닝을 기록했다. 심판의 스트라이크존마저 쥐락펴락하는 제구력을 앞세워 메이저리그를 호령했다. 강속구 괴물 투수 랜디 존슨과 함께 1990년대를 대표하는 왼손 투수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했다. 공이 느린 왼손 투수들에게 최고의 롤 모델이었다. 구속과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려진 얘기다. 오히려 최근에는 그 반대의 사례가 훨씬 더 많다. 투수 출신인 한 해설위원은 “사실 공이 느린데 제구력이 좋은 투수들이야말로 멘탈이 진짜 강한 선수들”이라며 “강속구가 없는데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공을 던질 수 있는 자신감이야말로 보통 배짱으로는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KBO리그에 좋은 본보기가 있다. 두산 왼손 투수 유희관의 직구 구속은 130㎞ 안팎이다. 커브 구속은 100㎞에도 못 미친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18승을 올렸고, 올해 15승을 넘어섰다. 두산 왼손 투수의 역사를 바꿔 나가고 있다. 느린 구속을 오히려 무기로 역이용한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삼성 윤성환도 결코 공이 빠른 투수가 아니다. 직구 평균 구속이 130㎞대다. 그러나 그는 최근 6년간 KBO리그에서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국내 투수들 가운데 유일하게 900이닝을 넘긴 최정상 선발투수로 자리 잡았다. 과거에도 비슷한 사례는 많다. 해태 방수원은 1984년에 평균도 아닌 최고 130㎞ 직구로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OB 장호연 역시 140㎞에도 못 미치는 직구로 통산 100승 투수 반열에 올랐다. 삼성 성준은 공도 느리고 마운드에서의 준비 동작도 느렸지만, 건실한 선발 투수로 활약하면서 통산 97승을 올렸다. 모든 투수가 강속구를 펑펑 꽂아댈 것만 같은 메이저리그에서도 느린 공으로 살아남은 투수가 얼마든지 있다. 2012년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수상자인 R. A. 디키가 대표적이다. 디키는 원래 공이 빠른 투수였지만, 2005년 어깨 부상 이후 직구 평균 구속이 시속 135㎞ 안팎까지 떨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스피드를 잃은 대신 너클볼이라는 신무기를 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독학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찰리 허프, 팀 웨이크필드, 필 니크로 등 내로라하는 너클볼러들에게 비법을 전수 받는 기회도 잡았다. 결국 리그 최고의 투수로 거듭났다. 2002년 사이영상 수상자인 배리 지토와 ‘꾸준함의 대명사’인 명투수 마크 벌리도 130㎞ 중반대의 직구로 최정상급 활약을 펼쳤다. 특히 지토는 샌프란시스코 시절이던 2012년 디트로이트와의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최고 160㎞, 평균 150㎞대 강속구를 뿌리는 상대 에이스 저스틴 벌랜더를 꺾어 박수를 받았다. 벌랜더의 체인지업 구속에도 못 미치는 직구로 가을 최고의 무대를 지배했다. 물론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유명한 ‘느린 공’의 상징은 단연 제이미 모이어다. 그는 직구 평균 구속이 130㎞대 초반에 머물렀다. 너클볼을 던지지 않는 선발 투수들 가운데 최저 구속이었다. 현지 야구 해설자가 “제이미 모이어는 느린 공, 더 느린 공, 그리고 그보다 더 느린 공으로 승부한다”는 우수개소리를 했을 정도다. 그는 50세까지 선수 생활을 하면서 메이저리그 최고령 승리 투수 기록을 남겼다. 시애틀 시절 기록한 2001년 20승, 2003년 21승도 130㎞대 직구로 일궜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