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빈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리고 있다. | ||
개혁 개방의 전초기지가 될 신의주를 특별행정구로 지정하면서 그를 행정장관으로 전격 발탁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한국이 히딩크를 데려와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한 것처럼 북한도 같은 네덜란드 국적의 양빈을 앞세워 개방을 성공시키려는 것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과연 그는 ‘북한의 히딩크’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양빈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해 9억달러(약 1조원) 재산을 모아 중국의 두 번째 갑부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반면 홍콩 언론을 중심으로 한 일각에서는 그의 이력과 초고속 성장배경에 물음표를 던지기도 한다. 이 물음표 항목에는 탈세와 주가조작, 부동산 불법개발, 그리고 중국 고위층에 대한 로비설 등 여러 가지 의혹이 담겨 있다.
양빈을 둘러싼 의혹이 하나둘씩 흘러나오고 있는 가운데 그를 잘 알고 있는 중국경제 전문가 A씨가 최근 양빈의 과거사에 대한 한 편의 글을 <일요신문>에 보내왔다. A씨는 국내 재계와 관계에서 중국통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 그는 이 글을 통해 ‘성공한 기업인’ 양빈에게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는 의혹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짚어냈다.
<일요신문>은 양빈이 이미 성공한 사업가로 매스컴에 널리 소개됐고 투자 유치를 위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니 만큼 그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판단, 양빈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A씨의 기고문을 전재한다. 편집자 주
지난 9월23일 북한 정부가 신의주 특별행정구 행정장관에 임명한 양빈 어우야그룹 회장(39)은 성공한 기업인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중국에서 희대의 사기 행각을 통해 부를 일으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우선 그의 국적이 불분명하다. 그가 비록 네덜란드 국적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는 그가 네덜란드 여권을 소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 그의 신분은 네덜란드가 인정한 국제망명자 신분에 불과하다는 것이 중국에서 알려진 그의 정체다. 그의 여권이 망명자에게 주는 일종의 면책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저장(浙江)성 출신인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읜 고아였기 때문에 젊은 시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군에 입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80년대 초 군 생활을 통해 사회를 보는 눈을 차츰 쌓아나갔다. 그가 출세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 랴오닝(遼寧)성 제 2포병학교를 마친 뒤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소속 정보원이 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중국은 개혁 개방정책이 막 시작돼 사회 치안에 매우 진통을 겪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군 정보기관이 치안에 깊이 관계하고 있었다. 그뒤 양빈이 네덜란드로 망명한 시점은 대략 1988년쯤으로 보인다. 1988~1989년의 중국 사회는 개혁 개방의 진통을 겪고 있던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급기야 1989년 6월4일 천안문 사태로 번지면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양빈은 이러한 중국의 혼란상을 감시하던 정보원 신분이었다. 그런데 그는 군과 정부의 동태에 관한 정보를 외국 특파원들에게 팔아 넘기는 행각을 벌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이런 행동은 금세 중국 정보기관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조국을 등지는 망명자 신분이 되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몇 년 간 생활하자 그는 출국이 자유로워졌다. 그 기회에 그는 당시 동구권에 불던 개방의 바람을 타고 폴란드와 헝가리 소련 등지를 떠돌며 보따리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려운 영어와 타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그의 바람은 항상 조국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조국을 떠난 지 7년여가 지난 1995년에 다시 중국 입국을 엿보게 된다. 역시 보따리 장사를 통한 생계유지가 밑천이었지만 그는 귀국한 뒤 철저하게 네덜란드 국적의 화교행세를 하며 마치 큰 자본가인 것처럼 자신을 미화시키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오게 된 것은 1996년이었다. 때마침 네덜란드와 중국의 수교 20주년을 맞이해 네덜란드 여왕이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왕의 방문을 앞두고 행사를 준비하던 중국 정부 당국은 네덜란드측의 엉뚱한 제의에 매우 당황하게 되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측에서 20년 전에 양국간의 수교 기념으로 기증한 화훼목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현장을 방문하는 일정을 제의한 것이었다. 확인한 결과 당시 기증된 화훼목들은 관리 소홀로 인해 제대로 자라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소식을 듣게 된 양빈은 당시 베이징시 원림국 공원관리처 사람들과 협의하여 급히 네덜란드로부터 화훼목을 가져와 자금성 인근에 있는 중산공원에 심게 되었다. 양빈의 이런 호의에 고마움을 느낀 베이징시 당국은 무사히 행사를 마치자 양빈의 제의대로 이 공원의 입장료를 대폭 인상하는 조치를 취하고 ‘네덜란드 화훼전’을 중산공원에 개최하게 됐다.
그 결과 당시 30전 정도 하던 입장료가 무려 5위안까지 인상되었다. 베이징시 중산공원에서 개최된 화훼전람회로 한화 수천만원의 수익을 잡게 된 양빈은 이와 유사한 전람회를 중국 곳곳에 개최함으로써 목돈을 마련하게 되었다.
양빈은 당시 중국정부가 4대 현대화 사업의 하나로 농업현대화에 목을 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농업현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온실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뛰어난 ‘사업’ 수완은 이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우선 그는 자신이 세계화훼왕국인 네덜란드에서 왔다는 것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농업전문가이기는커녕 변변한 화훼 이름도 모르던 그는 중국 정부당국자들을 네덜란드로 초청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일단 외국만 나갔다오면 만사가 순조롭게 풀려나갈 수 있었다.
각 지역의 농업담당 정부관리들에게 유럽관광을 거창하게 시킨 뒤 정부에서 투자하여 네덜란드형 고급 유리온실을 짓게 만들었던 것. 물론 그는 자신도 투자하는 형태를 취하며 외자유치에 열을 올리던 정부의 입장을 거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의 투자방식은 그야말로 ‘봉이 김선달’ 식이었다. 즉 1ha(10,000㎡)의 유리온실을 짓는 데 총 투자금이 1백만달러라면 그는 정부로 하여금 60~70%에 해당하는 현금과 토지를 투자하게 했고 그 자신은 나머지 지분만큼 현물설비를 투자하는 형태로 합작을 했다.
하지만 그가 투자하는 설비는 사실 네덜란드에서 중고품에 해당하는 싸구려 설비였으며, 이도 중국 정부당국에서 투자한 현금을 이용해 사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부터 그는 그야말로 돈 한푼 안들이고 중국 각지에 수십 개의 온실을 지으며 곳곳에 합작회사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온실을 짓게 하기 위해 지방 농업 당국자를 설득시키면서 일단 온실을 지으면 온실 내 작물은 모두 자신이 수출을 해주겠다는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종묘를 판 뒤 실제 수출할 만큼 작물이 자란 후에는 ‘품질이 좋지 않다’, ‘현재 시장 상황이 좋지 않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사업’ 방식 때문에 지난 2000년 산둥성에서는 농민들이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이자 양빈의 ‘로비’를 받은 정부 당국자들이 벙어리 냉가슴을 앓으며 할 수 없이 정부 돈으로 농민들의 작물을 구매해주는 촌극도 벌어졌다.
▲ 북한이 획기적인 신의주 경제특구 건설을 통해 개방에 성공할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양빈을 선택한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 ||
하지만 양빈의 자금은 끝내 출자되지 못했다. 이는 조양구 당국에서 양빈의 행세를 의심하여 양빈이 투자하지 않으면 정부에서도 출자하지 않는다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먼저 출자를 하면 그 자금으로 자신의 투자금을 대행해 왔던 양빈은 조양구 당국에게 사기 혐의를 받게 되었다. 결국 양빈은 2001년 초에 자신이 5년 간이나 활동하던 베이징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베이징시 당국은 양빈의 죄를 묻기는 해야겠지만 만약 양빈의 ‘행각’이 밝혀지면 그동안 그와 관계를 맺어왔던 많은 정부관계자들까지 줄줄이 연루될 것을 염려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양빈과 합의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즉 양빈이 입을 닫고 베이징시에서 모든 지분을 양보하고 떠나는 대신 그의 죄를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베이징에서 도망치다시피 떠난 양빈이 선택한 곳은 바로 랴오닝성 선양(瀋陽)이었다. 그가 선양에서 구상한 것은 더 이상 화훼나 온실만으로 ‘사업’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1999년 일본 방문에서 힌트를 얻은 네덜란드 빌리지(허란춘 荷蘭村)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자금이 없던 그는 전형적인 수법대로 랴오닝성의 정부 관리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정부 농업관계자들을 네덜란드로 초청하여 더불어 유럽관광을 시켜주고 정부관계자들의 추천을 받아 은행의 융자를 얻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도박을 통한 뇌물공세가 은행관계자들에 대한 그의 전형적인 로비 수법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가 은행대출담당자와 한국의 워커힐 카지노를 수차례 드나들고 카지노에서 돈이 부족하자 당시 종묘 수출입관계를 맺고 있던 한국의 한 업체에게 급히 돈을 빌리기까지 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가 선양에서 엄청나게 큰 네덜란드 빌리지를 짓는 동안의 일화도 매우 유명하다. 우선 모든 것이 중국 정부의 대출로 시작된 것인데, 명색은 현대화 농업단지를 만든다는 것이었지만 사실 다른 목적은 부동산 개발이었다. 선양시 북쪽에 대단지 토지를 확보한 그는 그곳에 5ha에 해당하는 온실을 짓고, 더불어 호텔과 빌라까지 지었다. 하지만 기초공사 단계부터 자금부족을 겪으며 직원들 월급까지 주지 못해 항의소동까지 겪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그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은 운좋게도 그 토지현장에서 온천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현재 중국 정부당국은 양빈이 신의주 특별행정구 행정장관에 임명된 사실에 매우 주목하고 있으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의 ‘사업’ 행각을 밝히자니 수많은 정부당국자들이 관련돼 있고, 또 이를 묵인하자니 향후의 대북관계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양빈이 언론을 ‘이용’하거나 중국 고위층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치부’하였다는 것은 한때나마 그와 일했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광둥성에서 큰 사업을 하고 있는 B씨(45)는 양빈이 행정장관에 임명된 뒤 국제적인 인물로 떠오른 사실에 대해 의아함을 감출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역시 쓰촨성 광한현에 온실을 지을 때 양빈으로부터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다.
B씨는 “어떻게 그런 인물이 아직까지 행세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양빈은 이제 북한 정부와 결탁하여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며 더 이상 양빈에 대해 언급할 것이 없다고 했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또 양빈에게 피해를 당한 C회장도 “양빈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인물이다. 특히 그와 금전관계를 갖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과연 이러한 양빈의 또 다른 얼굴을 북한 당국은 알고 있을까. ‘사기’ 의혹을 받고 있는 양빈과 결탁한 북한의 개혁 개방정책이 과연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정리=사회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