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번째 장편영화 <오아시스>로 베니스영화제 신인여우상을 거머쥔 문소리. | ||
그저 우연히 최민식 주연의 연극 <에쿠우스>를 보고 충격을 받음. 대학 때 잠시 극단에서 연기를 한 경험은 있으나 자신 역시 ‘내세울 정도는 아니다’고 할 만큼 미미할 뿐. 단편 영화 몇 편에 출연했으나 그다지 주목받진 못했다.
그리고 지난 2000년, 2천 명이 넘는 경쟁자를 물리치고 오디션에 당선된 영화 <박하사탕>으로 연기의 맛을 본다. 2년 뒤, 그녀는 ‘한공주’로 다시 태어난다. 영화 <오아시스>의 ‘공주’는 아직 ‘문소리’라는 이름이 낯선 이들에게 그녀의 또다른 이름으로 각인된다.
<박하사탕>에 이어 불과 두 번째 영화로 베니스영화제의 신인여우상(Marcello Mastroianni Award for Best Young Actor or Actress)을 거머쥐는 행운아가 되면서 그녀는 신데렐라로 떠오른다.
제59회 베니스영화제 폐막식이 있던 지난 8일 이탈리아 베니스 리도섬의 살사그란데. <오아시스>로 신인배우상을 탄 문소리가 무대로 올랐다.
“상이 너무 무겁네요”라며 소감의 첫마디를 꺼낸 그녀의 뒤로 영화 속 ‘한공주’의 모습이 담긴 대형 스크린이 보여졌다. 그녀는 “앞으로 어떤 역도 오아시스처럼 하겠다”는 말로 수상의 감동과 포부를 함께 전했다.
자신에게 이런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그녀는 언제부터 꿈꾸고 있었을까. 배우로서 생애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지는 신인상을 그녀는 ‘베니스영화제’에서 탄 것이다! 문소리는 스물일곱 되던 해, 배우로선 다소 늦은 나이에 영화 <박하사탕>으로 데뷔했다.
그러나 당시 설경구의 인기에 묻혀 그녀가 맡았던 ‘순임’역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예쁘지 않은’ 신인배우를 관객들은 주목해주지 않기 마련이니까. 두 해가 지나고 문소리는 당시 이창동 감독과 맺은 인연으로 두 번째 작품인 <오아시스>를 찍게 된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녀 생애에 ‘오아시스’와 같은 기억으로 남을 큰 상을 안긴다. ‘전혀 예쁘지 않은’ 외모의 ‘공주’역을 그녀는 ‘문소리만이 가능한 연기’로 해낸다. 2002년 9월 전세계가 주목한 스타의 반열에 오른 문소리.
그러나 숱한 배우들이 겪는 오랜 무명생활도, 연기에 대한 어린 시절부터의 욕심도 그녀에겐 없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평범하기 그지없는 학창시절을 보냈던 문소리가 막연하게나마 연기의 밑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대학 진학 이후. 어릴 적 꿈이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교육학을 전공했고 집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졸업장을 받긴 했지만, 그녀는 졸업과 동시에 본격적인 연기공부를 할 결심을 한다. 그리고 서울예대 연극과에 진학하게 된다.
대학 시절 문소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다고 한다. 호기심이 많은 성격 탓에, 다방면의 경험을 사서했던 그 시절이 지금의 ‘문소리식 연기’에 밑거름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문소리는 휴학을 하고 1년 정도 극단에 들어가 있던 적이 있다. ‘판소리를 배우겠다’며 뜬금 없이 서울을 뜨기도 했다. ‘보다 많은 경험을 위해서’라는 이유가 그녀의 지론이었기 때문. 친구들이 모두 그녀를 특이한 친구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결국 막연했던 연기에의 동경을 이루기 위해 문소리는 교사의 꿈을 버리고 연극과에 다시 입학한다.
▲ 이 영화에서 문소리는 이창동 감독, 설경구와<박하사탕> 에 이어 또 한번 호흡을 맞췄다 | ||
그러나 한편, 문소리는 인복이 많은 배우다. 이창동 감독과의 인연은 그녀에겐 배우로서 ‘운명’과 다름없다. “이젠 다른 감독님들도 캐스팅 제의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라는 문소리의 ‘역설적’ 표현은 그녀가 이창동 감독을 만나 연기에 눈을 뜨게 됐음을 달리 말하기도 한다.
이창동 감독은 <박하사탕> 촬영 당시 오디션에서 보았을 때부터 “네가 순임이라서 뽑았다”는 말을 늘 했다고 한다. 이는 문소리의 끼를 알아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주문이었다. 연기가 아닌 평소에 살아가는 그대로를 보여주라는 감독의 주문은 자연스럽게 문소리를 순임이가 되게 했고, 또 공주가 되게 했다.
<박하사탕> 촬영 때는 이런 해프닝도 있었다. 촬영장을 지나는 사람들이 “영화 찍어요? 누구 나와요?”라고 묻다가, “에로영화 찍나?”라며 지나가더라고. 당시 설경구나 문소리 모두 이름 없는 배우였으므로 이들을 사람들이 몰라본 것이 당연. 스타 한 명 보이지 않는 촬영장은 졸지에 문소리를 에로배우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그녀를 오래 기억하지 못했지만 <박하사탕> 속의 착하고 여린 여자 ‘순임’을 문소리는 한동안 떨쳐버릴 수 없었다. 솔직히 그런 성격이 못되는데, 관객들이 자신을 순임으로만 기억할까봐 그것이 싫었다.
그러다, ‘공주’를 만났다. 문소리가 영화 <오아시스> 얘기를 들은 건 지난해 가을 무렵. <박하사탕>에서 만나 친해진 이창동 감독, 설경구, 문소리가 함께 모인 자리였다.
평소 뜬금 없는 얘기를 잘하는 이창동 감독이 이날 이런 얘기를 꺼냈다. ‘뇌성마비 장애여성과 전과자 남자의 사랑이야기’를 영화화하겠다는. 교육학과를 졸업해 2급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문소리는 당시에 이미 장애인 관련 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한 경험이 있었다. 장애인에 대해 나름대로 알고 있었다고 자부했지만 그들의 삶은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겨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소리에게 이창동 감독의 한마디는 그녀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때부터 영화를 위해 뇌성마비 장애여성을 취재하게 된 문소리는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며 따라 해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려웠다. ‘진짜’ 장애인이 되기란, 그들 편에 서서 진정으로 이해하기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오아시스>의 촬영을 한달 여 앞두고서도 ‘공주’역이 캐스팅 되지 않은 상황. 그만큼 ‘공주’역은 중요한 역이었고, 이창동 감독도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고 한다. 문소리의 ‘이력’을 알고 있었지만 철저한 이창동 감독은 그녀를 미리 ‘공주’역으로 점찍어 두진 않았다.
문소리가 나름대로 ‘공주’역을 분석해 준비한 테이프를 보고서야 감독은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엔 모든 것들이 힘들기만 했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있는 대로 몸을 비트는 것은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문소리는 “감정이 잡히면 몸이 말을 안듣고, 몸동작을 제대로 했는가 싶으면 감정이 달아났어요”라고 털어놨다. 또한 단지 장애 여성의 모습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점이었다.
▲ <박하사탕>에서 첫사랑 ‘순임’역(위)을 연기했던 문소리 는 <오아시스>에서 중증 장애인역으로 열연했다(아래). | ||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와 교도소 출소 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종두’는 이렇게 사랑을 시작한다. 그러나 문소리는 한공주로서, 장애인이 아닌 사랑에 빠진 여인이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완벽하게 ‘장애인’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방문을 잠그고 장애연기 연습을 했다. 가족들도 모르게 시작한 일이었다. 실제 뇌성마비 장애인들을 녹화한 테이프를 보고 따라해 봤지만 사람마다 신체구조가 달라 똑같이 따라 해도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잠깐은 되는 것 같았지만 과연 연기를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연기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혼란에 빠진 그녀에게 한 선배가 이런 말을 건넸다고 한다.
“장애인 흉내내기 대회 나가는 것이 아니다. 너는 종두와 사랑에 빠지는 공주야. 그게 제일 중요한 거다.” 그러나 침대에서 화장대까지 기어가는 것, 침대 머리맡의 물건을 집는 것처럼 사소한 장면도 모두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얼굴은 있는 대로 일그러뜨리고 뼈마디가 아플 만큼 온몸을 꼬아야 했다. 촬영기간 6개월 내내 의치를 끼고 양쪽 눈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야 했다. 촬영하다가 실신해 병원에까지 실려 갈 정도였다고 한다.
문소리는 그중에서도 공주가 종두에게 당하는 강간 미수 장면을 가장 힘들었던 촬영으로 꼽는다. “제 정신으로는 찍을 수 없었던 장면”이라고 말할 정도니까. ‘과연 자신을 강간하려 했던 종두와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 납득하기 힘들었던 문소리는 이에 대해 이창동 감독과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스태프들 모두 ‘강간’이라는 말 대신 그냥 ‘사건’이라고 표현한 이 장면을 찍으며, 문소리는 ‘컷’ 소리만 나면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다고 한다.
‘한공주’를 연기하며 문소리는 자신의 연기가 혹여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담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비록 외모를 예쁘게 ‘꾸밀 수’는 없지만, ‘사랑에 빠진’ 공주라면 예쁘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공주의 곱창머리끈도 문소리 자신이 주장해 연출했다.
실제 자신의 외모에 대해선 문소리는 “어정쩡하다”고 표현한다. 누가 그러더라고. 춘향이를 시키자니 좀 아니고, 향단이를 시키자니 너무 예쁘고, 그렇다고 월매를 시키자니 너무 젊다고. 어머니도 그녀에게 “너처럼 평범하게 생긴 애가 배우를 하느냐”며 웃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문소리는 이에 대한 자신의 ‘답’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자신의 장점을 “외모”라고 내세운다. 주변에서 누구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는 ‘평범한’ 외모를 가진 것을 그만큼 할 수 있는 배역이 많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니 앞으로 문소리가 도전할 새로운 캐릭터는 너무나 많을 것이다. 그녀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배우가 되는 빠른 길을 원하지 않는다. 돌아가는 길이라도 옳은 길을 택하겠다”고. 그러나 문소리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이미 지름길에 올라선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10일 귀국 기자회견에서 “우리 모두 문소리의 수상사실을 잊자”고 외친 것도 혹여 생겨날지 모를 자신의 자만과 주변의 기대에 대한 단속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어느 새 그녀도 여느 스타연예인들과 같이 인터뷰하기 어려운 상대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