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이주일씨의 영정 사진=이종현 기자jhlee@ilyo.co.kr | ||
지난 8월27일 오후 3시5분, 한국 연예계의 ‘큰기둥’이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지난 달 28일 일산 국립암센터 이주일씨의 빈소에는 각계각층의 수많은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평소 이주일씨의 사람됨을 한눈으로 알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씨의 절친한 벗인 박종환 감독은 고인의 영정 앞에 끝내 슬픔을 억누르지 못했다. 박 감독은 고 이주일씨와는 춘천고 시절부터 평생을 함께 해 온 막역한 사이. 부친 하종오씨와 함께 빈소를 찾은 하춘화씨 역시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하춘화씨 또한 이주일씨가 연예계 데뷔 시절 만난 평생지기다. “함께 공연하자고 약속해 놓고 이렇게 가시면 어떡하느냐”며 연신 눈물을 훔치던 하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지난 달 30일, 두 사람은 채 가라앉지 않은 마음으로 고 이주일씨에 대한 못다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주일씨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가 죽으면…”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또한 자신에게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을 것. 그러나 평생을 코미디언으로 살아온 이씨는 자신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괴롭거나 우울해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죽음 자체도 ‘코미디’로 받아들이셨을 진정한 희극인이었다”는 한 후배 개그맨의 말은 어쩌면 그에 대한 가장 적당한 평가일지도 모른다. 그가 죽음을 곧 닥치게 될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할 일이 아직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곧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무대에 오르는 꿈을 그는 꾸고 있었던 것. 그는 말기 폐암 선고를 받고도 다시 수천 명 관객 앞에 선 환상을 보기도 했다.
▲ 지난해 3월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의 빈소를 찾은 고 이주일씨 | ||
어느 한 순간 놓칠 수 없는 예순셋 인생을 돌아보기엔 1분1초가 아쉽기만 했을 것. 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의 페이지마다엔 어느 한 귀퉁이 소홀히 넘길 수 없는 그의 열정이 녹아 있다.
코미디언 이주일 이전의 그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은 축구감독 박종환. 나이는 박 감독이 세 살이나 많지만 이후 40여 년 동안을 동고동락을 함께 하는 친구로 지냈다. 박 감독은 투병중인 이씨에게 매일같이 전화를 하고 일주일에 서너 번씩 방문해 그를 위로했다.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박 감독은 30분이고, 1시간이고 혼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생전의 이씨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박 감독은 또다시 목이 메었다.
1960년 춘천고 축구부 시절 박 감독이 풀백을, 이주일씨가 라이트 윙을 맡아 뛰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학비와 생활비 벌기도 힘들었지만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서도 시간만 나면 둘은 운동장으로 나갔다고 한다.
이주일씨는 “내가 만약 코미디언이 되지 않았다면 박 감독과 라이벌 사이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축구를 사랑했다. 지난 월드컵 때는 주치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축구장을 직접 찾아 ‘대∼한민국’을 외치기도 했다.
박 감독을 통해 들은 이주일씨의 고등학교 시절은 이미 미래를 예견하는 모습. 가난해도 마음만은 부자였던 이씨는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웃기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고등학교 졸업 이후 서로 다른 길로 들어선 두 사람은 10년 만에 재회를 하게 된다. 1966년 겨울, 고등학교 동문 모임에서였다. 박 감독은 당시를 ‘이주일씨와 나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 꼽았다. 두 사람은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그간의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는 다짐했다. “우리는 꼭 성공해야 한다”고. 박 감독은 이주일씨에게 “너는 코미디로 성공할 수 있다”고 수없이 말했고, 그렇게 확신했다고 한다. 두 사내의 굳은 다짐은 결국 헛되지 않은 것이었다.
차츰 명성을 쌓고 돈도 모아가게 되자 이주일씨는 축구에 대한 미련을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지난 83년 6월 청소년축구 4강 신화를 이루고 돌아온 박 감독의 “우리나라에도 잔디 구장이 필요하다”는 말 한마디에 1천만원을 선뜻 내놓은 것. 또한 자신이 축구의 꿈을 키우던 춘천고등학교 축구부를 부활시키기도 했다. 박 감독은 애초 지난 월드컵을 이주일씨와 함께 관람하려고 했었다.
▲ 박종환 - 고교 축구부 시절부터 동고동락 | ||
이주일씨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은 가수 하춘화씨다. 두 사람의 첫만남은 지난 72년 월남 공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하씨는 한창 인기를 누리던 톱가수였고 이주일씨는 무명이던 시절.
하씨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웬 낯선 사람이 다가와 아는 척을 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이주일씨였다”며 당시 이씨의 별명이 ‘털보아저씨’였다고 말했다. 하씨가 이주일씨를 특별히 여기게 된 것은 이씨가 먼저 귀국해 자신의 집에 안부전화를 해준 일 때문. 전시라 마음대로 전화를 할 수 없던 상황에서 전쟁터로 공연을 하러간 하씨에 대해 궁금해하던 가족들에게 이주일씨는 “잘 있으니 걱정 마시라”며 대신해서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하씨는 ‘참 친절한 사람’으로 이주일씨를 기억하게 된다.
두 사람이 ‘MC와 가수’로서 명콤비를 이루게 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 74년 대구 공연 때 보조MC로 이주일씨를 소개받게 된다. 그러나 스태프들은 이씨의 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공연 이미지를 버린다”며 모두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 강력히 오디션을 보자고 제안한 사람이 하춘화씨였다.
하씨는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면서도 너무나 열심히 하는 모습에 모두들 감동을 받았다”며 “당시 이종건 단장이 그 모습을 보고 양복을 해 입으라며 보너스를 건넸을 정도”라고 그날을 회상했다.
이후 10년 동안 5천 회 이상의 공연을 함께 한 두 사람은 가족 이상의 끈끈한 인연으로 평생을 함께 해 왔다. 매스컴을 타고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된 77년 11월11일 이리역 삼남극장의 폭발사고는 하씨에게 ‘죽어서도 잊지 못할 일’이기도 하다. 상황은 이러했다. 오후 9시께 공연장 근처로 지나가던 화약차에 담뱃불이 옮겨 붙어 폭발하며 공연장 지붕이 함께 날아갔다. 이주일씨가 막 오프닝멘트를 마치고 돌아서던 순간이었다.
모두가 쓰러졌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이주일씨는 하춘화씨부터 찾았다고 한다. 그가 난로 옆에 쓰러져 있는 하춘화씨를 업고 불길 속에서 극장을 탈출했을 땐, 그 역시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은 상태. 이주일씨 덕분에 어깨타박상 정도의 부상만을 입은 하춘화씨는 무사히 이재민돕기 콘서트를 이어갈 수 있었다.
무명시절부터 이주일씨를 쭉 지켜봐 온 하춘화씨는 그에 대해 “준비된 코미디언이었다”고 말했다. 자신과 함께 했던 5천 회가 넘는 공연이 모두 리허설이었던 셈이라며. 당시 이주일씨가 발굴한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뭔가 보여주겠습니다’ 등은 이후 모두 유행어로 히트하게 된다.
‘무대 밖의 이주일’에 대해 하춘화씨는 “굉장히 성격이 급하고 남자다운 보스 기질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워낙 구속받는 것을 싫어하고 자유분방한 분이었다”며 가장으로서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고 했다.
하춘화씨는 끝으로 “부디 저세상에서 아들을 만나 행복했으면 좋겠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