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일 국회 재경위의 산업은행 국감장에 모습 을 드러낸 엄낙용 전 총재 | ||
반대로 대북지원설이 전혀 근거 없는 낭설로 판명될 경우 의혹을 제기한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는 반통일세력 등으로 몰리면서 대선에서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된다.
이처럼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대북지원설’의 뇌관은 국감 증인으로 출석한 경제관료 출신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에 의해 터졌다. 엄 전 총재의 발언을 유도해 낸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측도 “(그의 발언이) 이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지는 몰랐다”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엄 전 총재는 지난달 25일 국회 정무위의 금융감독위원회에 대한 국감에서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2000년 8월 당시 현대상선 김충식 사장이 나를 찾아와 ‘채권단이 지원한 4천9백억원은 실제로는 현대상선이 쓴 돈이 아니기 때문에 갚을 수 없고, 대신 정부가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2000년 6월 당시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으로부터 빌린 4천9백억원은 정부가 갚을 돈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2000년 6월 현대상선의 대출 문제 때문에 2000년 8월 청와대 별관에서 청와대와 정부 경제 고위관료·국정원 인사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당시 현대상선 대출 건과 관련해 임동원 국정원장을 면담하려 했으나 김보현 국정원 3차장을 서울의 한 호텔에서 대신 만나게 됐다고 밝혔다.김 차장에게 일련의 상황을 설명한 후 그로부터 ‘알았으니 걱정말라’는 답변을 들었다고도 했다. 이기호 당시 경제수석비서관으로부터도 똑같은 답변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현대상선 김충식 사장은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상환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고 한다. 그의 발언은 현대상선의 대출부터 상환까지 정부측의 특정인사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엄 전 총재의 폭탄발언은 지난 4일 국회 재경위 국감장에서도 계속됐다. 그는 지난 달 25일 첫 폭로 이후 지방에 머물며 외부와 연락을 끊고 있었다. 따라서 당일 국감장 현장에서는 그의 출석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관측은 빗나갔다. 그는 국감 현장에 정시에 나타나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대북지원설의 진원지였던 ‘증인 엄낙용’의 이날 출석은 또다른 폭탄발언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엄 전 총재는 예상대로였다. 이번에는 청와대 고위인사의 개입설을 주장했다. 그의 발언요지는 다음과 같다.
“2000년 8월 산업은행 총재 취임 후 인사차 전임 총재였던 이근영 금감위원장을 찾아갔다. 그를 만나 2000년 6월 현대상선에 대출한 건에 대해 물었다. 나는 ‘현대상선의 4천억원 대출이 걱정된다.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쩔 수 없었다. 상부의 강력한 지시가 있어서 그렇게 처리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광옥 대통령비서실장이 전화를 걸어왔다’고 말했다.”
엄 전 총재는 이날 청와대 등 권력핵심부를 향해 칼날을 겨눴다. 이 같은 주장이 터져 나오자 청와대와 한광옥 전 실장측은 즉각 부인했다. 한 전 실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단 한 번도 대출문제로 은행에 전화한 적 없다”면서 “엄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근영 금감위원장도 “엄씨한테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당사자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엄 전 총재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그는 “사실만을 말했다”면서 법적 책임도 지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현 정부에서 재경부 차관과 산업은행 총재를 지낸 엄씨의 이 같은 발언은 평생 몸담았던 행정부와 정권의 핵심부에 비수를 꽂는 행위였다.
이 때문에 민주당측에서는 한나라당과의 유착설을 제기했다.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과 사전에 모든 것을 모의했다” “한나라당에 줄을 대려는 행위로 정권말기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사례다”는 등의 성토성 발언이 민주당 의원들로부터 이어졌다.
엄 전 총재는 왜 폭탄선언을 했을까. 양심선언이었을까, 아니면 현 정권에 대한 보복성 발언이었을까. 서울 출신인 엄 전 총재는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나온 엘리트 경제관료다. 재무부 사무관으로 출발해 이재국, 경제협력국, 국제금융국, 외환정책과장, 세제심의관 등 세제분야를 두루 섭렵한 재무관료다.
YS정권 시절 96년부터 97년 11월까지 그는 대외협상을 전담했던 재정경제원(재경부 전신) 제2차관보로 근무하면서 국제금융통으로 변신,OECD 가입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IMF구제금융 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그의 역할은 컸다. 그는 당시 강경식 경제부총리의 밀명을 받아 선진국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러 다니는 밀사역할을 했다.
▲ 엄낙용 전 총재 | ||
엄 전 총재는 이른바 ‘KS(경기고-서울대)’ 출신이다. 때문에 정·재계에 동문 선후배가 많이 포진해 있다. 그러나 친하게 지내는 정계인사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동문인 한 정치권 인사는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했던 친구”라며 “정치에 관심이 적어 이쪽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지는 않을 걸로 안다”고 전했다.
엄 전 총재는 온화한 용모에 걸맞게 조용하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업무 면에서는 비교적 일 처리가 깔끔하고 추진력도 매우 강해 주위로부터 뚝심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직원간 상하관계에 다툼이 없었으며 보스기질도 있어 따르는 부하직원들이 많았다고 한다. 업무에 대한 나름대로의 소신은 지난 98년 4월 IMF환란위기에 대한 검찰의 진술조서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당시 경제정책 결정자의 책임도 있지만 한국에 대해 금융지원 불가 입장을 정한 미국과 일본정부의 입장도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밝혔다. 국제통으로서의 그의 입장이 나타나는 대목이다.
“외환위기가 고조되던 지난 97년 11월11일, 강경식 당시 부총리의 지시를 받고 일본정부에 긴급자금 지원요청을 하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 이유는 금융난 해소를 위한 정부간 협조는 IMF를 통해서만 하기로 미국과 일본이 합의를 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정부는 일본 시중은행으로 하여금 한국을 지원토록 영향력을 행사해달라는 (우리측의) 요청을 거부했다. 일본의 자금지원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강경식, 김인호 경제팀은 이로써 IMF구제금융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물론 이런 그의 입장 때문에 환란위기의
책임을 회피하려했다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97년 11월 환란위기로 인해 그는 관세청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다 99년 5월부터 2000년 8월까지 제2대 재경부 차관으로 재직한다. 하지만 재무부 출신인 그는 DJ정권의 경제팀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과거 ‘경제기획원’ 출신인 진념, 강봉균 전 장관과 이기호 경제수석 등 이른바 ‘기획3인방’이 실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2000년 8월7일 그는 임기 3년의 산업은행 총재로 취임한다. 그런데 8개월 만에 돌연 경질됐다. 당시 엄 전 총재는 현대상선, 현대건설, 하이닉스반도체 등 현대계열사의 지원방식이었던 회사채 신속인수제도의 집행 과정을 둘러싸고 진념 장관의 경제팀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이게 경질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신속인수제도란 유동성이 부족한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의 만기가 도래할 때 회사가 20%만 부담하면 나머지 80%를 산업은행 등 채권단이 떠안는 제도다.
엄 전 총재는 자신의 경질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2001년 4월1일 일요일에 전격 경질됐다. 휴일이었던 그날 그는 외부 일을 보기 위해 승용차를 타고 나가던 중 라디오 뉴스를 통해 자신이 ‘잘렸다’는 사실을 처음 안 것으로 알려졌다. 엄 전 총재는 4월9일 이임식장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정부의 결정에 따라 중차대한 시기에 산업은행을 떠나게 돼 아쉽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현대에 대한 산업은행의 지원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그는 현대 계열사 지원 건에 대해 산은 실무자들에게 근거서류를 철저히 남길 것을 지시했다. 사후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대비책이었다. 그런데 이런 조치로 인해 그는 정권 실세들로부터 눈밖에 나기 시작했다.
그의 ‘찬밥’ 신세는 경질 이후 본격화됐다. 차관급 경제관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자문위원, 한국금융연구원 초빙연구위원, 법무법인 우방 비상임고문을 전전하는 등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최근 그의 폭탄발언은 이러한 사정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한마디로 잘나갈 수 있던 그가 현 권력 핵심부의 심사를 건드리면서 ‘팽’당한 데 대한 ‘보복심리’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더군다나 민주당 쪽에서는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과는 종친으로 친분이 있고, 또 다른 의원으로부터는 장래 보장까지 약속받았다는 소문 등 한나라당과의 유착 의혹까지 일고 있다.
엄 전 총재는 한나라당 의원들과의 사전 밀담 의혹을 제기하는 민주당 의원들의 질문에 대해 “사전에 상의한 사람은 있다”면서 이를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다. 첫 발언 이후 잠적상태에 있다 두 번째 국감장에 불쑥 나타난 것도 한나라당 의원과 물밑 접촉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하지만 그의 행동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품에서 비롯됐다는 시각도 만만찮다.
금융권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그가 산은 총재로 부임할 당시 산은은 엄청난 부실덩어리였는데 국책은행이 아닌 시중은행이었다면 퇴출대상 1호였다”면서 “이를 해결하려다 보니 4천9백억원을 대출해 준 현대상선 문제가 그로 하여금 골머리를 아프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돈을 빌려간 현대상선 사장이 “우리가 쓴 돈이 아니다”고 하니 그로서도 도무지 이해 안되는 부분이었던 것. 그래서 전임 총재였던 이근영 위원장을 만났고, 이기호 경제수석과 국정원 김보현 차장도 만났다고 한다. 결국 그는 문제를 파악하는 단계에서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됐고 폭로까지 가게 됐다는 얘기다.
그가 국감 증언과정에서 “남측에서 제공한 자금으로 우리 장병이 공격당하는 사례가 있었다면…”이라며 지난 서해교전을 암시한 것도 자신의 최근 행동이 ‘소신’에서 비롯됐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제 대북지원설의 푸는 열쇠는 현대상선에 대한 계좌추적에 달렸다. 그에 따라 엄 전 총재에 대한 책임 여부도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엄 전 총재는 지난 5일 발언 이후 다시 잠적했다. 이번에는 부인 홍영신씨와 함께 떠났다. 홍씨는 남편의 발언에 대해 “바깥일은 잘 모르지만 평소 성품으로 봐서 말씀하신 것들이 진실일 것으로 믿는다”고 밝힌 바 있다.정치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엄 전 총재. 그가 떳떳하다면 잠적기간은 그리 오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