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독 인생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기 쁨을 누린 김성근 감독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올해로 환갑의 나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손주들 재롱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노년을 즐기고 있을 나이에 그는 매일같이 ‘진검’ 싸움을 벌이며 치열한 삶의 한 가운데 자리를 틀고 있다. 35년간의 감독 생활 중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기쁨을 뒤로 하고 하루 뒤에 맞붙을 삼성에 대한 기록들을 잔뜩 쌓아놓고 숙소에서 기자를 맞이한 김성근 감독(60)은 ‘인동초‘ ‘외인구단’ ‘오뚝이’라는 타이틀이 말해 주듯 삶 자체가 대하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지난해 늦가을 오키나와 전지훈련 때부터 선수들에게 올시즌의 목표를 4강 진입과 70승 달성이라고 자신 있게 말해왔다는 김 감독은 한국시리즈 진출에 대한 감회보다 선수들과 합작해서 목표를 이뤄낸 데 대한 소감이 더 풍부하고 다양한 듯하다. 그동안 자신을 둘러싼 숱한 소문과 억측 속에서도 일일이 대꾸하기보단 더 많은 공부와 노력을 통해 지도자의 길을 가고자 했던 김 감독의 진면목이 인터뷰를 통해 고스란히 나타났다.
플레이오프 5차전을 승리로 이끈 뒤 호텔 식당에서 늦은 저녁과 술 한잔을 걸쳤다는 김 감독의 얼굴에선 피곤한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뭐랄까. 언제나 회의할 수 있는 구조로 탁자를 배치한 책상 위의 두툼한 기록지들이 김 감독을 새로운 긴장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듯하다. “오늘도 밤새 이거 봐야돼. 보통 새벽 2~3시경에 잠을 자는데 오늘은 더 늦게 자야 되겠네. 예전 쌍방울 때는 기록들을 분석하다 보면 해가 뜰 때가 많았어요. 그만큼 힘이 들었다는 거지.”
김 감독이 수십 년 간 변치 않고 하는 일이 있다. 바로 기상 후의 산책이다. 언뜻 건강을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머리를 맑게 하려는 목적이 훨씬 크다. “머리를 비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 감독으로서의 의무라고도 생각할 만큼 머리를 맑게 하는 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일이야. 경기 때마다 뭔가에 몰려 가다보면 순간적인 판단력이 부족해지거든.”요즘은 껌을 많이 씹는다고 한다. 시합이 끝나면 좋지 않은 치아가 욱신거리고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껌을 씹는데 그 이유는 뇌의 활동을 돕기 위함이란다. 일반적인 생활조차도 감독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철저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감독으로서 처음 맞는 한국시리즈 진출에 대한 감회를 물었다. 김 감독다운 대답이 흘러 나온다.“선수들이 환갑 선물을 준 것 같아. 난 그동안 야구계에서 들국화 같은 존재였어. 사람들한테 짓밟히더라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들국화 말이야. 장미같이 화려한 꽃은 다른 사람의 몫이야. 그런데 이번에 나 답지 않게 큰 무대에 서는 거야. 선수들 힘으로 말이지.”
김 감독은 포스트 시즌 내내 선수들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평소 감정 표현 안하기로 유명한 사람답지 않게 기자들에게 여유 있는 웃음을 흘리고 담소를 아끼지 않는 모습은 야구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될 만큼 작은 변화였다. 김 감독은 포스트시즌이야말로 선수들의 축제라고 표현했다. 자신은 그 축제에 끌려 다닐 뿐이었다고. “작년 가을만 해도 LG가 이런 성장을 하게 되리라곤 생각 못했을 거야. 선수들과 코치들마저도. 하지만 난 자신 있었어. 4강까지는 김성근의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믿었거든. 그 단계를 넘어서려면 선수와 코치의 힘이 필요했고 그 부분을 여러 차례 강조했지. 한국시리즈 진출도 기분 좋은 일이지만 선수들이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 날 믿고 따라오면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데에 아주 만족해.”
▲ 기아와의 플레이오프서 명승부 끝에 최종전을 승리로 장식 한 LG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모여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 ||
“뭐랄까. 힘이 있든 없든 자기 주제를 모르고, 팀워크를 모르고, 야구의 고마움을 모르는 팀이었어. 힘나면 야구하고 힘빠지면 주저앉고. 야구는 신바람만 가지곤 할 수 없는 일이거든. 어떻게 일년 내내 신바람 갖고 싸울 수 있겠어. 확실한 퍼센티지가 있어야지. 나 아닌 우리라는 개념이 없었거든. 그래서 선수들한테 이렇게 얘기했어.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지 마라. 최소한 자기가 못했을 때 미안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그런 잔소리 좀 했지.”
김 감독의 표현대로라면 철부지였던 선수들을 상대로 철나게 만드는 일이 쉽기만 했을까. 김 감독은 선수들과 숱하게 ‘싸웠다’고 말한다. 밀리면 끝장이라는 오기로 머리 큰 선수들과 아버지뻘 되는 감독이 일진일퇴를 불살랐다. 이병규, 조인성 등 스타플레이어들을 2군으로 보내고 빼오길 여러 차례 반복했다. 장문석이 두산 선수들에게 두들겨 맞고도 정신차리는 기미를 보이지 않자 선수단 미팅에서 호된 꾸지람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른 팀도 아닌 서울 라이벌팀에게 진 뒤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만들어 놓은 테두리 안으로 집어넣기가 힘들었지 일단 그 안으로 들어오면 감독과 선수 사이에 신뢰가 쌓여 순조롭게 팀을 이끌 수 있었어. 우리 애들이 보기보단 무척 순진하고 순수하거든. 아주 착해. 까지질 않았어. 그래서 김재현, 서용빈 같은 파이팅 넘치는 선수들이 생겨난 거야. 4강에 오르던 날 내가 직접 재현이와 용빈이에게 전활 했어. 정말 고마워서.그동안 내가 얼마나 미웠겠어. 욕도 많이 했겠지. 그럼에도 날 따라와 줬거든. 특히 재현이와 용빈이는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해줬는데 오늘 같이 경사스런 날 함께 자리할 수 없어 마음이 아퍼.”
그 순간 김 감독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통화 내용을 들어보니 김재현이었다. ‘축하한다’는 인사 전화였는데 전화 통화를 하는 김 감독의 모습에 형언할 수 없는 감상들이 자리하는 듯했다. 고관절 손상으로 수술이 예정돼 있는 김재현을 한국시리즈 예비 엔트리에 등록시킨 이유를 묻자 “내가 그 친구라면 간절히 원했을 일인 것 같아서”라는 대답이 전해졌다.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단 몇 분이라도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게 해주고 싶은 순수한 부정(父情)이었다.김 감독은 인터뷰 중간중간에 감독을 ‘아버지’로 비유했다. 물론 선수는 ‘자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뇨로 고생하는 심성보를 버릴 수 없었고 방황하고 헤매는 선수들을 끝까지 품어 안았다고 한다.
“힘들지. 선수를 버리지 않는다고 위에서 뭐라고 말할 때도 있거든. 하지만 잘해도 못해도 선수들 모두가 내 자식인데, 내가 아버지인데 어떻게 버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서 희생할 줄 알아야 해. 아버지는 자식 안 버려. 어떻게 해서든 살리려고 노력하지. 그 대신 배반을 많이 당했어. 그래도 상관없어. 자식이 아버지를 버리고 가는 것은 가슴 아프지만 말이야.”
김 감독은 베풀고 은혜를 받으려고 하다보면 원수가 된다는 말로 위안을 삼았다. 살면서 뒤통수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등 따뜻하고 배부르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뒷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볼 때마다 자신의 팔자 소관으로 돌린다고 한다.
생과 사. 사람이 죽을 각오를 하면 무서울 게 없다는 건 맞는 말인 것 같다. 김 감독은 지금까지의 야구 인생이 모 아니면 도였다고 말한다. 적당한 타협과 아부도 모르고 오로지 정도만을 걸어왔던 것. 그래서인지 주위에 적이 많다. 김 감독에 대한 칭찬보다 비난을 일삼는 무리들도 자주 눈에 띈다. 하지만 그런 반대 세력들 속에서도 굽힘 없이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김 감독을 쉽게 대하지 못한다.
▲ 김 감독은 자정이 지난 늦은 시각까지 자신의 야구철학과 인생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 ||
나의 강점은 어떤 역경에 들어가도 절대로 지는 걸 몰라. 사실 정규시즌이 시작될 때만 해도 LG는 꼴찌 후보였어. 오기가 생겼지. 그들의 예상이 틀리다는 걸 내가 보여주고 싶었어. 일본에서 한국에 들어오며 혈연, 학연 아무 것도 없이 맨손으로 들어왔는데 믿을 건 오로지 나밖에 없더라구. 그게 지금의 김성근을 만든 것 같아. 그래서 삶 자체가 좀 빡빡하지.”
어린시절 기억나는 건 찢어진 가난뿐이라고 한다. 운동할 여건이 안됐지만 학비와 야구장비 등을 아르바이트를 통해 충당해 나갔다. 6남매의 대가족이었는데도 식구들 얼굴 보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서로 일하느라 바쁘다보니 귀가 시간이 늦었던 것이다. 어떤 때는 10원이 없어서 7~8Km를 걸어다니기도 했는데 신기한 것은 단 한 번도 부모를 원망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밑바닥 생활을 해봤기에 어려운 처지의 선수들한테 더 많은 신경이 쓰인다고 한다.
일본에서 18년간 교포 생활한 뒤 귀국한 ‘대한민국’은 김 감독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일본에서는 단 한 번도 남한테 인정받고 환영받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었는데 한국에선 그 모든 것들이 현실로 나타났다. 그래서 완전 귀국을 결심했다고 한다.
김 감독은 선수 생활을 했던 일화를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한 마디로 술과 여흥을 즐겼던 ‘끼’ 많은 문제아였고 시합을 앞두고 양주 한두 병씩 마신 일이 다반사였다는 것. 대신 선수 생활이 일찍 파장을 맞았다. 체력과 정신력에 문제가 있다보니 공 던지는 일(김 감독은 투수 출신이다) 자체가 버거웠던 것. 26세에 은퇴한 뒤 27세에 기업은행 감독으로 첫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선수들에게 자기관리를 입에 달고 사는 이유도 이러한 자신의 경험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는 실감하지 못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김 감독이다.
“당시 한 선배가 여러 차례 폭음을 즐기는 내 행동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충고를 아끼지 않았지만 그땐 그런 소리가 귀에 들리지가 않았어. 당한 뒤에 느끼는 거지. 나도 그랬는데 요즘 애들은 더할 거야. 그래도 될성 부른 떡잎들은 아무리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게 돼 있어.”
김 감독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선수의 사생활에 대해선 자유방임주의자다. 즉 젊은 나이에 술 먹고 여자와 시간을 보내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단 그런 가운데서도 절제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술을 마셔도 머리 속에 야구가 자리해 있으면 술을 많이 마실 수 없다는 것.
LG의 한 특급 신인이 시즌 초반에 방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조용히 알아보니 여자랑 보내는 시간이 많다는 보고였다. 그래서 그 선수를 불러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고 한다. “네가 돈이 없고 야구 못했을 때도 널 기다려줄 수 있는 여자라면 만나고 그렇지 않다면 야구에만 전념해라”하고.
갑자기 짓궂은 질문이 생각났다. “여자 때문에 상처받고 가슴앓이 해본 적 있으세요?”“지금도 상처받고 있는 중인데(웃음). 남자니까 여자 문제는 있었겠지.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운동 선수라고 해서 술과 여자를 끊고 지내라고 할 수 없는 거야. 어떻게 야구만 하고 살 수 있겠어. 이것도 생활인데. 하지만 정해진 룰을 넘어서면서까지 술과 여자에 빠져들면 곤란한 거지.”
인터뷰 도중 감독 호출을 받은 선수들이 계속해서 방문을 노크했다. 호출 대상들을 보니 야단보다는 격려와 칭찬을 해줄 듯 싶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지도자로서의 은퇴 계획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난 은퇴가 아니라 반드시 ‘밀퇴’가 될 거야. 지금까지 숱하게 잘리고 다시 복귀하고 그랬거든. 이번에 LG가 4강에 오르지 못하면 먼저 옷 벗으려고 했지.”“떠밀려서 떠나기 전에 먼저 그만둘 생각은 없으세요?”“돈에 대해선 욕심이 없는데 야구는 할수록 깊어지고 무궁무진해. 그래서 떠날 때를 모르고 미련하게 버티고 앉아 있다가 보따리 싸라는 지시를 받곤 했어.”
김 감독은 한국시리즈에 대해 마음을 비웠다고 한다. 흐름대로 따라갈 뿐 굳이 이기려고 하지말고 선수들이 이끄는 대로 자신을 맡길 것이라고 한다. 데이터는 분석해 주되 그 다음부터는 선수들의 몫이라는 게 김 감독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기자를 배웅하는 김 감독의 얼굴에 얼핏 고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른 백전노장이라고 해도 어찌 한국시리즈를 마음 편하게 맞이할 수 있을까. 마음 비웠다는 김 감독의 외로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