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수들은 해마다 11월이 되면 초긴장 속에서 보낸다. 왜냐하면 11월부터 ‘NHK홍백전’에 출전할 가수들에 대한 본격적인 심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수들은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심사에 대한 정보를 캐기도 하고, 또한 소속사 차원에서는 은밀하면서도 치열한 로비가 벌어진다.
하지만 NHK-TV가 공영방송이다 보니 민영과는 달리 로비가 잘 먹히지가 않는다. 그러니 가수들이 더욱 애를 태울 수밖에.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예기자는 물론 가수가 소속한 프로덕션 관계자들은 만나기만 하면 ‘NHK홍백전’이야기였다.
물론 뚜렷한 히트곡이 있는 인기 가수야 의연하지만 지명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히트곡이 없는 중견 가수들은 그야말로 입술이 바짝바짝 타 들어갈 정도로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명단 발표를 기다린다. 그래서 처음으로 발탁된 신인가수가 너무 감격한 나머지 대성통곡을 하거나 펄쩍펄쩍 뛰면서 우는 패닉 상태가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만큼 일본가수들에게 있어 ‘홍백전’의 위력은 절대적이다. 아무튼 지난주 NHK가 발표한 가수 명단 중에는 놀랍게도 한국의 10대 가수 보아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외국인 최연소 가수 출전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기뻤어요. 물론 부모님들도 좋아하셨구요.” NHK의 발표가 있은 지 며칠 후, 록본기에 있는 녹음 스튜디오에서 만난 보아의 얘기다.
일본가수와 듀엣을 하기 위해 녹음실에 온 보아는, 그동안 독감과 한•중•일을 오가며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해내서인지 전보다는 다소 야위어 보였다. 그래서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어머니가 지어준 한약을 먹고 있다고 했다.
“아침에는 야채 샐러드를 중심으로 먹고, 저녁에는 잡곡을 섞은 선식을 주로 먹지만 점심에는 제 양껏 먹고 있어요. 체력을 보강하기 위해서는 엄마가 지어주신 보약을 먹고 있고요.” 평소 보아는 화장을 하고 다니지 않는다. 잡지 촬영이나 무대에 설 때만 화장을 한다.
하지만 이 날 보아는 일본가수와의 녹음 때문인지 엷게 화장을 하고 나왔다. “NHK 홍백전 출전을 예상했었나요?” “아뇨.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 발표를 보고 저도 깜짝 놀랐어요. 물론 뽑히면 좋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프로가 워낙 권위 있는 방송이라….” 일본에서 보아를 담당하고 있는 스태프들은 보아를 가리켜 `애늙은이라고 칭한다.
워낙 말투가 어른스럽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 대답하는 내용도 누가 미리 가르쳐 준 것처럼 자못 어른스럽다. 그래서 때로는 그녀와 대화하고 있으면 30대하고 앉아 있는지 40대하고 앉아 있는지 헷갈릴 정도다.
“일본 활동에 대한 위화감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혼자 일본을 왔다갔다했어요. 이런 저를 보고 주위에서는 무섭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나리타에서 전철로 혼자 하숙집까지 찾아간 적도 있는 걸요.” 한일간의 문화 차이에서도 대답은 한결같다.
“오히려 그런 의식 안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실제로 크게 차이를 느끼는 것도 없고.” 보아는 연예기획회사 SM에 의해 몇년 간 준비기간을 거쳐 완벽하게 트레이닝한 뒤 데뷔한 가수로 유명하다. 이를테면 `준비된 스타가수에 다름아닌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일본 현지에서 일본어를 익힌 뒤 한국에 이어 일본 데뷔를 했다.
완벽하고도 정확한 일본어 발음을 내기 위해 NHK아나운서 집에 일부러 하숙을 하기도 했다. 덕분에 그녀는 일본 TV에 나와 자유자재로 자신의 의견을 일본어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현지인에 가까운 일본어를 구사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수많은 연예기획사들이 일본 진출을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다. 하지만 성공한 기획사는 SM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공적인 결과만을 생각하고 한국식으로 달려들기 때문이다. 일본 연예계는 경쟁이 치열한 만큼 또한 터부가 심하다. 외국인에게 배타적이고, 특히 한국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웬만큼 실력 있는 가수가 아니면 일본 연예시장에서 살아남기가 힘들다.
▲ 일본 최고의 인기 여자가수 하마사키 아유미(위) 아래 사진의 세계적 보이밴드 웨스트 라이프는 보아에게 ‘일본 대표’ 자격으로 함께 노래 부르 기를 청했다. | ||
그러나 약간 가창력이 부족해도 싹수가 보이면 다른 재능을 개발해서라도 키운다. 때문에 한국의 톱가수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그대로 톱가수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적어도 일본 연예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다만 단발성 공연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특별 대우를 해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일본에 진출하려면 역시 신인 입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에 보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보아는 더 철저하게 일본 정서에 맞는 특별훈련을 했다. 그러다 보면 집 생각도 나고 친구 생각도 날 터. “일본 생활이 전혀 힘들지 않아요. 물론 친구들이 그립기도 하지만 그럴 땐 국제전화로 수다를 떨어요. 요즘에는 같은 가수인 일본 친구들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하기도 하고요.”
내면적으로 성숙하다고는 하나 그래도 아직은 부모의 이슬을 먹어야 할 10대라서 혼자 지내는 외국생활이 힘들 것 같아 이같이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일본서 유학중인 사촌언니와 맨션에서 생활하는데 외국생활에서 오는 외로움은 그리 크지 않은 편이라고 말했다.
그럼 노래 연습은? “다행히 제가 사는 맨션이 코너에 있어서 크게 소리를 질러도 옆집에 안 들려요. 그래서 노래연습은 집에서도 맘놓고 할 수가 있어요.” “올해 많은 활동을 했는데?” “올 8월부터 9월초까지 하마사키 아유미와 함께 일본 전국야외공연 투어를 다녔어요.” 하마사키 아유미라면 일본여성들의 우상으로 뛰어난 패션감각, 강한 카리스마로 그녀의 프로모션을 담당하고 있는 아벡스를 먹여 살린다고 할 만큼 히트곡이 많은 대형가수.
평균 1년 앨범 매출액이 4백억엔을 넘는다. 일본 증시에서는 그녀가 결혼이라도 해서 은퇴하는 날에는 소속사와 음반회사가 줄줄이 부도를 맞을 거라는 소문도 파다하다. 그만큼 영향력이 큰 일본의 톱스타다.
헌데 일본언론에서는 보아를 가리켜 `제2의 하마사키 아유미`로 평한다. 실제로 아벡스에서는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겨냥해 보아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보아에게 선배인 하마사키 아유미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느냐고 물어 보았다.
“비교하고 싶어도 저와 색깔이 너무 달라 비교를 할 수가 없어요. 음악 장르도 다르고. 패션감각, 카리스마, 퍼포먼스도 다르고.” “전국야외공연 투어를 다닐 때의 반응은?” “작년 공연 때는 두 곡을 불렀는데 올해는 다섯 곡을 불렀어요. 그런데 관객들로부터 느끼는 체감온도는 작년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웠어요. 각 지역마다 2~3만 명의 팬들이 어찌나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는지 힘든 줄 모르고 무대에 섰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전에는 라이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일본 전국 투어를 다니면서 이 같은 공포심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에 대해 팬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꽤나 의식했는데 이제는 그런 조바심들이 없어졌다고. 그렇지만 가수로서 좀 더 풍부한 성량을 기르기 위해서 폐활량을 높이는 운동을 스포츠센터에 가서 하고 있다고 한다.
“제가 전국공연을 다니면서 느낀 것인데 일본은 라이브 문화가 너무도 잘 발달돼 있다는 거예요. 라이브 무대에 대한 일본 가수들의 열정과 체력, 그리고 그 폐활량이 너무도 부러워요. 그래서인지 일본 가수들에게는 립싱크 같은 문제가 대두되지 않아요. 라이브는 말 그대로 라이브니까 가창력과 체력이 받쳐 주지 못하면 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저도 내년 3월 중 전국 공연 투어를 가질 예정이기 때문에 그동안 폐활량을 더 늘려 멋진 무대를 만들려고 해요.”
이번에는 일본 음악 관계자들이 그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그들의 평가를 정확히 본인이 알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보아는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갑자기 떠올랐는지 한참을 웃고 나서 대답했다.
▲ 국내서 발매된 보아의 앨범 재킷들. 위쪽서부터 1집 앨범, 2집 앨범 스페셜 앨범. | ||
의외로 보아는 자신에 대한 음악 전문가들의 평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같은 평가 덕분에 그녀는 아시아 대표로, 데뷔 이래 7곡이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영국의 신화적인 그룹 `웨스트 라이프`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웨스트 라이프는 매년 세계 각국의 가수 한 명을 선정하여 함께 음반을 취입해 오는 것으로 유명한 그룹. 보아가 이 그룹과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은 `웨스트 라이프` 측으로부터 요청을 받고 일본에서 대표적인 가수들의 앨범을 보냈는데 그 중 보아의 노래가 그들의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 그 노래는 다름아닌 올 3월 인기가요 순위를 책정하는 오리콘 차트 1위에 올랐던
이 노래가 실린 앨범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며 무려 1백27만 장이 팔렸다. 1백27만 장이라는 숫자는 일본 음반계에서도 경이적인 기록. 장기간의 불황으로 일본에서 20만 장만 나가도 베스트 셀러에 속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아는 10대에다 일본 가수가 아닌 한국 가수가 아닌가?
올 한해 동안 보아가 일본에서 활동한 결과물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이미 국내에서도 보도됐듯 그녀는 일본에서만 5백억원 대의 음반 판매 실적을 거두었다. 여기서 그녀가 받는 인세는 약 1백억원. 불과 열일곱 살의 소녀가수가 말이다.
<리슨 투 마이 하트>에 이어 발표한
그리고 휴대폰 벨다운 순위에서도 명실공히 1위를 차지해 음반이 발매가 되기도 전에 일본 매스컴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보아의 진가를 가늠해주는 것은 역시 그녀가 기록한 판매 실적과 일본 매스컴들의 반응.
물론 여기에는 한일공동 월드컵 개최라는 큰 이벤트가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프로 가수로서의 재능을 더 높이 샀기 때문에 모든 매스컴으로부터 격찬을 받을 수가 있었다. 우선 뛰어난 가창력과 미모, 어느 노래든지 맞추어 출 수 있는 댄스, 어느 질문에도 막힘 없이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한•일•영어의 언어 구사력으로 보아는 3개월 동안 무려 50여 개의 잡지에 등장하기도 했다.
표지모델은 셀 수 없을 만큼 부지기수. 요즘도 잡지 코너 어딘가에 보아의 얼굴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한편 보아 한 사람이 올 한해 벌어들인 외화는 자그마치 1백50억 원이 넘는다. 음반 인세 외에도 각종 TV프로그램 출연과 잡지 모델, 휴대폰, 초콜렛 CF모델로도 등장했기 때문이다.
헌데 17세의 나이로 거부가 된 보아는 사실 유명한 ‘짠순이’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스태프들로부터 듣는 소리지만 절대로 허튼 돈을 쓰지 않는다는 것. 하다 못해 캔 음료를 사 마시더라도 매니저 오빠나 코디네이터 언니에게 살살 애교를 부려서 공짜로 얻어먹기가 일쑤라는 것. 놀랍게도 보아의 한달 용돈은 5만원이다. 엔으로 환산하면 고작 5천 엔이다.
이에 대해 보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말한다. “별로 쓸데가 없어요. 그런데 옛날에는 한국에 가서 만엔을 바꾸면 13~14만원으로 한참을 썼는데 요즘은 8~9만원밖에 안해 속상해요. 용돈요? 일본에서는 바쁘다 보니까 별로 쓸데가 없잖아요.” 그동안 얼마나 번 것 같으냐고 물으니 유학할 정도의 돈은 번 것 같다고 천연덕스럽게 보아는 대답했다.
얼마만큼 벌어야 부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보아는 “마음이 부자라야 진짜 부자”라고 받았다. 어른인 기자가 깨끗하게 한방 먹었다. 다시 그녀에게 연예인 중 누굴 닮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일본가수가 아닌 미국의 휘트니 휴스턴과 제니퍼 로페즈처럼 노래와 춤, 연기를 고루 할 수 있는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듯 10대 소녀가수로서 부와 명예, 인기를 한꺼번에 거머쥐게 된 보아. 그러나 정작 보아 자신은 아주 담담해 보였다. 인터뷰 이튿날 국내 신문에는 그녀가 뮤직 비디오상과 댄스상 등 2관왕을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어렸을 적 두 오빠들과 골목길에 털썩 주저앉아 로봇을 조립하고 병정놀이를 하는 등 동네 골목 개구쟁이었던 보아. 담대한 자신보다는 엄마가 더 소녀스럽다는 보아는 내숭 떠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고 말했다.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는다는 것.
“전 원래 겁이 없는 성격이에요. 한국과 일본을 오갈 때도 혼자 왔다갔다할 때가 많아요. 또 몸이 피곤하긴 해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전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고 있고 또 그것을 위해 양국을 오가는 것이니까 지겨움도 없구요. 언젠가 미국에 가서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할 거예요. 그래서 저금도 하고 대입검정 시험도 봐놓은 거예요.”
물 흐르듯 막힘 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보아. 내년에는 중국을 포함, 미국에도 진출할 예정이란다. 아무튼 한국 대중문화 수출의 선구자가 된 보아,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시간 중에도 스케줄 때문에 몇 차례 한일 양국을 오가지 않으면 안된다.
지난주에는 일본작곡가 협회가 주최하고 TBS-TV가 후원하는 제44회 ‘일본레코드대상’ 12명 후보에 보아가 선정됐다. 그런가 하면 국내에서는 장나라, 신화, 성시경, 이수영 등이 경합한 제13회 ‘서울 가요대상’에서 영예의 대상을 차지했다.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에도 몇 개의 가요 시상식이 남아 있어, 이래저래 보아는 가요상 퍼레이드 속에 올 한해를 마감하게 됐다. 유재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