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9년 국내대회에 앞서 연습라운딩을 하고 있는 김미현. | ||
통화한 주인공은 위암3기로 ‘사형선고’를 받은 큰아버지 김수길씨(59). 지난 6월 큰아버지의 투병 소식을 처음 알고 한동안 골프채를 잡지 못할 만큼 충격을 받았던 김미현은 이후 큰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만이라도 기쁨을 전해드리고 싶어 남다른 노력과 열정을 쏟았다.
2000년 세이프웨이챔피언십에서 연장 접전 끝에 3승을 올린 후 1년 10개월 동안 준우승만 다섯 차례나 기록하며 자신과의 싸움을 벌인 그로선 이번 우승을 통해 자신감 회복은 물론 친아버지나 다름없는 큰아버지에게 작은 행복을 안겨드린 것 같아 더할 나위 없이 기쁘기만 하다.
대회가 끝나자마자 올랜도 집으로 돌아간 김미현과 전화 인터뷰를 통해 우승 소감과 지난 3년간의 미국 투어 생활, 그리고 결혼에 대한 솔직한 생각들을 들어봤다.
20대 중반을 넘어선 숙녀에게 20대 전부터 써왔던 ‘땅콩’이란 표현을 하기가 여간 쑥스러운 일이 아니다. 김미현도 그 별명이 탐탁지 않으면서도 워낙 오랫동안 고정된 이미지로 설정돼 왔던 터라 내놓고 싫다고만 할 수 없다.
키만 크지 않았지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치른 인생의 다양한 경험들이 나이 이상의 원숙미와 차분함을 나타내 보일 때도 있지만 외모에서 주는 작고 귀여운 이미지는 마냥 소녀 같고 철부지로만 비친다.
화제는 큰아버지의 암 투병에 대한 얘기로 옮겨졌다. 목소리가 금세 우울해진다. 아버지 김정길씨의 사업 실패로 인해 가정 형편이 극도로 어려워졌을 때 큰아버지의 도움 덕분에 골프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암 말기라고 하세요. 아빠는 1년 반 전에 아셨다고 하시는데 최근에 급격히 악화되셨나봐요. 큰아버지의 부탁으로 저에게 알리지 않으셨다가 건강이 나빠지시자 지난 5월 말경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미국 오기 전에는 시합 때마다 같이 다니시면서 응원을 해주셨어요. 미국 진출 후에도 1년에 두 차례 이상은 들어오셔서 절 보고 가셨죠. 큰아버지시지만 아빠나 다름 없는 분입니다.”
슬픔이 뚝뚝 묻어났다. 그동안 줄곧 병원에 계시다가 자신의 시합을 보려고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아버지(김미현의 아버지 김정길씨는 김수길씨의 병이 악화되면서 지난주에 급거 귀국, 현재 국내에 있다)의 전화를 받고 더욱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기를 정말 간절히 기원했어요. 또다시 우승을 눈앞에서 놓치는 일이 벌어지면 자신감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큰아버지에게 거듭 실망만 안겨드리는 것 같아 미안했지요. 대회가 끝나고 바로 전화를 드렸는데 정말 좋아하시더라고요. 마치 제가 계속 우승하면 그 나쁜 병이 다 낳을 것만 같았어요. 우승에 대한 조바심이 무척 심했는데 그걸 이루게 돼 정말 기뻐요.”
김미현은 지난달 로체스터인터내셔널에선 5타차 리드 속에 마지막 라운드를 맞아 캐리 웹에게 역전 우승을 허용했고 지난해에도 오피스디포대회에서 애니카 소렌스탐에게 연장 첫 홀에서 패했으며 캐시아일랜드챔피언십선 로지 존스에게 역시 연장 첫 홀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는 메이저대회 브리티시오픈대회선 영원한 라이벌 박세리와 막판까지 시소 게임을 벌이다 역전패하는 아픔을 겪은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자이언트이글클래식에서의 역전 우승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지막 조로 출전해 우승한 것이 처음이고 리드하다가 추월당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마지막 라운드까지 포기하지 않고 켈리 로빈스를 추격한 끝에 1타차 승부를 이뤘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고무적인 것이다.
▲ 지난 22일 미국 LPGA투어 자이언트이글클래식 에서 역전 우승한 김미현이 트로피를 들고 기쁨 을 만끽하고 있다. | ||
김미현의 말로는 이전엔 웨이트 트레이닝을 충실히 하지 못해 ‘물살’이 대부분이었다면 지금은 살이 아닌 근육으로 똘똘 뭉쳤다며 자랑을 아끼지 않는다. 몸이 가벼워져서인지 스윙도 간결해지고 그동안 좋지 않았던 허리, 무릎 등도 많이 편안해졌다는 것.
“아빠가 한국에 돌아가신 뒤 일절 전화를 하지 않으셨어요. 대회 앞두고선 항상 이런 저런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 이상하게 절 찾지 않으시더라고요. 제가 워낙 우승에 대한 부담을 갖고 있으니까 부담 주지 않으시려나보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첫 라운드 하는 걸 보고 확신이 드셨대요. 어떤 믿음이 있으셨나봐요. 절 건드리지 않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신 거죠.”
실과 바늘처럼 김미현이 가는 곳이면 아내 왕선행씨와 함께 그림자 수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김정길씨는 자꾸 전화기에 손이 가는 걸 꾹꾹 참느라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딸의 심리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터라 스윙하는 폼만 봐도 우승에 대한 감을 잡을 정도인 그는 지난해부터 우승컵을 향한 열망으로 몸살이 날 정도였던 딸을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TV로 지켜보며 대견함과 만족스러움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할 정도였다고.
김미현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일반적인 부녀지간과는 좀 다르다. 외국에서 활동하는 국내 골퍼들 대부분이 부모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때문에 보다 편하게 투어 생활을 하는 것처럼 김미현도 마찬가지지만 투어중에는 아버지라는 존재보다 매니저란 느낌이 더 강할 만큼 김미현의 해결사로 바쁜 일정을 보낸다.
“부모님께는 평생 갚아도 못갚을 신세를 지고 있어요. 특히 아빠는 더하죠. 아빠의 모든 인생이 내 스케줄에 따라 좌우되는 현실의 반복이 십년을 한참 넘어섰다면 정말 대단한 거 아닌가요. 이젠 나도 머리가 커졌다고 아빠의 말씀에 무조건 따르지 않아요.
때론 신경질도 내고 거역하면서 내 맘대로 생활할 때도 있어요. 그러나 지금까지 아빠 뜻대로 해서 잘못된 게 없었어요. 항상 결과는 아빠의 판정승이었죠. 다른 선수들이 하나둘씩 홀로서기를 하는 걸 지켜보며 고민할 때도 있었지만 아직도 전 아빠의 힘이 필요해요.”
지난해 귀국했을 때 김정길씨는 자신의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것 같아 가끔은 서운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언젠가는 잡고 있는 끈을 놓아야 할 때가 찾아오겠지만 아직은 조금 더 딸 옆에 머무르고 싶은 순수한 부정을 엿볼 수 있었다.
김미현 하면 생각나는 특징, 오버스윙에 대한 얘기를 물었다. 지난 동계훈련기간 중 스윙코치 필 릿츤의 도움으로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었던 오버스윙을 버리고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 스퀘어스윙으로 개조 작업을 벌인 바 있었다.
지나친 오버스윙은 체격이 작은 김미현에게 신체적인 이상을 가져오게 했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오버스윙 만큼 골퍼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지름길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 그러나 습관처럼 굳어져 버린 스윙 폼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중요한 고비 때마다 오버스윙이 나오는 바람에 낭패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난달 맥도날드챔피언십 때 아빠에게 말씀을 드렸어요. 다시 옛날 스윙으로 돌아가고 싶다고요. 그런 뒤 스윙을 바꿔 출전했던 에비앙 마스터스에서 준우승에 오를 수 있었어요. 그때 깨달았죠. 난 ‘오버’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김미현 인터뷰 때마다 단골 손님으로 등장하는 골퍼가 있다. 바로 박세리다. 국내에서건 미국 LPGA에서건 지겹도록 따라다니는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는 그때나 지금이나 묘한 호기심을 자극시키며 매스컴의 ‘주메뉴’로 등장하곤 했다.
묻기도 미안할 정도로 그동안 김미현은 박세리와 관련된 질문을 숱하게 들어야 했다. 그래서 “이젠 초월했어요”란 대답이 쉽게 나오는지도 모른다.
▲ 김미현은 “가끔 여자답게 살고 싶다”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98년 국내대회 라운딩 모습. | ||
LPGA에 한국 선수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한 사람에 의해 자극받고 연연해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곤 오랫동안 자신을 짓눌렀던 마음의 짐을 훌훌 털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김미현은 겉으로는 무척 털털해 보인다. 골프장에서 숱한 사람들을 만나고 사인을 해주면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볼 땐 더없이 친근하고 격이 없는 친구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진짜 성격은 굉장히 소심한 편이다. 그래서 남자를 사귀는 데도 요즘 젊은이들 같지 않게 보수적이고 ‘감이 떨어지기만을 바라는’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다보니 아직까지 내세울 만한 남자 친구가 없다. 지난 겨울 귀국 후 모 스포츠신문에서 김미현에게 애인이 생겼다고 보도했으나 집안끼리 아는 사이일 뿐 애인도 남자친구도 아니라며 안타까워했다.
“주위엔 친구들이 많지만 대부분 골퍼들이라 어떤 한계를 느끼게 돼요. 그 테두리를 못벗어나니까. 자연스럽게 만나서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을 갖고 싶은데 정말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요. 내 또래의 여자들처럼 데이트하면서 영화 보러가고 여행 다닐 수 있는 여건이 전혀 허락되지 않잖아요. 가끔은 여자다운 생활을 해보고 싶기도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생각으로만 끝나고 말아요. 요즘 같으면 친구 같은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주위에 좋은 분 계시면 소개 좀 시켜주세요.”
장난삼아 남자를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하면서 웃음을 터트리는 김미현과 결혼 얘기를 나누면서 왠지 암담한 느낌이 들고 말았다. 2~3년 사이에 정말 좋은 사람이 있으면 결혼하고 싶다고는 말하지만 ‘조건’이 너무 까다롭기 때문이다.
일단 아내의 직업을 위해 적극적인 외조와 희생을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아버지 김씨가 했던 것처럼 남편이기 전에 매니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자신이 있어야 한다.
즉 그동안 갖고 있던 일을 버리고 아내를 위해 전업할 각오가 있는 사람만이 김미현의 신랑감으로 안성맞춤인 셈이다. 이쯤 되다보니 아버지 입에서 “신랑감을 눈씻고 찾아보고 있는 중”이란 하소연과 함께 역시 좋은 사람 소개시켜달라는 부탁이 절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사랑 때문에 골프를 포기하는 일은 상상조차 안해 봤다고 한다. 골프 없인 김미현의 존재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일과 사랑을 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쉬는 날 뭐하냐고 물었다. 정말 재미없는 대답이 이어진다. “한국에서 방송된 비디오를 보통 15개 정도 빌려다 보는 게 낙이에요. 골프채 없이 연습장 가서 동료 선수들과 잡담하는 것도 즐기고요. 그런데 외국인들과는 아무리 친하게 지내도 정이 느껴지지 않아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외로움이 커지는 것 같아요. 그 외로움은 엄마, 아빠가 있어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죠. 아마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을 거예요.”
대답은 재미없지만 담긴 속뜻을 생각해보면 김미현의 현재 심경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어깨 근육에 무리가 올까봐 인터넷은 가급적 자제하고 취미 생활도 골프에 지장을 주지 않는 걸 찾다가 결국 포기하는 일이 잦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한국의 친구들과 전화통화를 하지만 미국 생활 3년째에 접어든 지금은 그마저 시들해졌다.
우승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서 모든 것이 하찮고 무시할 수 있는 대상이며 소홀히 취급해도 큰 문제가 없는 생활의 연속선상에서는 ‘에너자이저’ 김미현도 조금씩 지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잡념도 잠시 잠깐, 결국엔 이런 멘트로 인터뷰를 마무리한다.
“작년에 박세리 프로에게 우승컵을 넘겨줬던 브리티시오픈대회가 2주 후에 열려요. 그 대회를 기점으로 7주 연속 투어 생활이 시작됩니다. 산을 넘었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산이 기다려요. 그래서 절망과 감동과 긴장과 흥분이 함께 하는 것 같아요. 이게 바로 골프의 매력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