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4일 역사적인 월드컵 첫승을 올린 폴란드전 에서의 홍명보 선수. | ||
주장이자 고참으로서 내색할 수 없는 고민과 어려움들이 쌓이고 넘쳐났어도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강하게 자신을 채찍질하기도 했다. 긴장과 떨림, 두려움과 환희 속에서 보낸 월드컵을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러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감동이라는 사실에 그는 잠시 전율한다.
홍명보(33·포항)의 인터뷰 기사를 정리하면서 잠시 혼란스럽다. 어떻게 그를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가 토해낸 절절한 ‘느낌표’들을 ‘마침표’로 전환할 수 있을까.
현대 한국 축구가 낳은 듬직한 스타 중의 스타 홍명보. 대표팀 선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히딩크 감독과 인간적인 대화를 나눴던 그는 월드컵이 끝난 지 이틀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집이 숙소같고 가족들이 후배들 같은 착각 속에 지낸다고 말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정이 주는 편안함에 흠뻑 젖어 있는 홍명보의 월드컵, 못다한 이야기들을 정리해본다.
아무래도 터키전에서 경기 시작 11초만에 골을 먹은 순간의 심정을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픈 질문일 텐데도 그는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기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크게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변명같아서 자세한 설명을 하기가 좀 그렇다. 하지만 그 순간, 그 상황에서 나에게 볼이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다. 당연히 골키퍼에게 갈 줄 알았다가 갑자기 내 앞으로 오는 바람에 볼트래핑이 제대로 안됐다. 너무나 황당하고 당황스럽고 정말 복잡한 심경이었다. 선수들한테 너무 미안했고 관중들에게 정말 창피했다.”
다음부터는 일문일답.
―3·4위전이라 그런지 선수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이 많다. 집중력도 떨어진 것 같고.
▲부정하지는 않겠다. 열심히 하자고 격려한 뒤 그라운드에 나갔는데 짧은 휴식을 취하면서 긴장감이 많이 풀어진 것 같았다. 여유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선수들에게 잘못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어떻게 해서라도 한 골을 뽑아내려고 최선을 다했다. 물론 전반 초반에 실점만 하지 않았어도 힘들게 경기를 풀어가지는 않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이번 대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2-0 첫승을 올린 폴란드전이다. 그리고 지는 상황에서 동점골과 골든골을 성공시킨 이탈리아전도 아주 짜릿했다. 폴란드전에서 첫승을 거둔 뒤로는 힘들다고 예상했던 미국, 포르투갈전에도 자신감이 생겼다. 평가전에서 보여준 좋은 성적이 결코 과장된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고 무엇보다 선수들의 의욕이 어느 때보다 대단했다. 월드컵 개막 전만 해도 ‘혹시나’하는 생각 때문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폴란드전 이후로는 두려움 대신 자신감이 가득했다.
▲ 6월22일 스페인전에서 ‘4강 확정 골’을 넣고 기뻐하는 홍명보 선수. | ||
▲물론 그 순간도 아찔한 흥분감이 온몸을 타고 흐를 만큼 감동적이었다. (항상 굳은 표정으로 있다가 골 넣고 손을 휘저으며 좋아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말하자) 뭔가 해냈구나 싶은 생각에 펄쩍펄쩍 뛰고 싶었다. 제일 먼저 뛰어온 선수가 황선홍이었다. 그동안 대표팀 생활하며 서로 비슷한 처지라 위로를 주고받으며 의지했던 친구였다. 선홍이가 첫골을 넣고 내가 마무리를 장식한 데서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가장 고마운 선수를 꼽으라면 누굴 지목할 것인가.
▲경기에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한 선수들이 특히 고맙다. 월드컵 같은 국제대회에선 팀 분위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출전 선수들이야 경기에만 집중하면 되지만 게임에 뛰지 못하는 선수들은 출전 선수들을 배려하면서 훈련 시간에도 티내지 않고 보조 맞춰가며 열심히 뛰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 그중에서도 (김)병지에게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끝까지 주전에 대한 욕심을 내비치다가 일시에 좌절된 후 누구보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을 텐데도 잘 참아줬다. 정신적으로 병지 만큼 힘든 선수가 없었을 것이다.
―황선홍 선수는 홈에서 벌어지는 월드컵 경기가 마치 평가전을 치르는 듯 편안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른 월드컵보다 부담이 덜했나.
▲솔직히 얘기해서 이번 월드컵은 순전히 내 자신을 위해 뛰고 싶었다. 그런데 월드컵이 다가올수록 다른 때보다 더 긴장되고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국민들의 성원이 대단했고 특히 한국에서 하는 경기라 더 조심스러웠다. 나이가 있어서인지 어떤 경우엔 내 자신을 컨트롤 하기에도 벅찼다. 그만큼 홈게임이 힘들고 어려웠다.
홍명보는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을 마친 뒤 가진 인터뷰에서도 ‘월드컵이 다가올수록 긴장선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올 만큼 떨린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98프랑스월드컵 때는 두려움이 앞섰지만 지금은 기다림이 있을 뿐’이라는 멋진 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대표팀 내부의 생활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서 나이 어린 후배들이 선배에게 ‘형’이란 호칭 대신 이름만 부른다고 해서 관심을 모았는데 실제로 그렇게 생활했나.
▲감독이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끔 선후배간의 틀을 없애려고 노력했지만 난 반대 입장을 분명히 취했다. 한국 특유의 전통과 같은 문화가 외국 감독에 의해 바꿔지게 된다면 팀 전체가 무너진다고 믿었다. 물론 그라운드 안에서는 절대적으로 감독의 의사를 존중한다. 그리고 히딩크 감독 이전부터 경기장에서는 ‘형’이란 호칭을 떼고 이름만 불렀다. 하지만 밖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히딩크 감독이 한국을 떠날 것으로 점쳐지면서 차기 감독에 대한 의견들이 아주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차기 감독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이 있다면(사실 이 질문에 대해선 터키전이 끝난 뒤 믹스트 존에서도 한 번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홍명보는 무척 조심스런 문제라며 말을 아꼈다. 그러나 이번엔 자신의 의견을 과감히 토해냈다).
▲또 다른 감독으로부터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히딩크 감독이 계속 한국에 남는다면 본인도 그렇고 한국 축구도 플러스보다 마이너스 요인이 더 클 것이다. 새로운 감독으로부터 다른 스타일의 축구를 배우고 그것이 차곡차곡 쌓여서 우리 것으로 만들어질 때 비로소 한국 축구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 좋은 성적을 냈다고 해서 그 사람만 고집하기보다는 히딩크 감독을 처음 만나 지금의 성과를 이뤘듯이 또 다른 외국 감독을 만나 그의 철학을 배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 아주 오랜만에 아내 조수미씨와 아들 성민, 정민과 함께 했다. | ||
▲한마디로 어색해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축구를 시작하고 아주 오랫동안 경기에서 지거나 경기 내용이 좋지 않을 경우 고개 숙이는 게 버릇처럼 돼 왔다.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없는 습관 같은 것이다. 아무리 해외 언론에 자기 PR을 하는 것이 엄청난 홍보 효과를 가져온다고 말하면 무엇하나. 그 자체가 쑥스럽기만 한데.
―유독 한국과의 경기를 치른 팀마다 심판 판정에 불만을 강도 높게 제기했다. 선수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였나.
▲심판은 잘 볼 수도 있고 못볼 수도 있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팀의 성적이 심판의 편파 판정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안해봤다. 물론 상대팀 입장에선 판정 하나하나에 진한 아쉬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경기 결과를 뒤집을 만한 편파 판정은 없었다. 오히려 독일전에서의 심판들은 충분히 문제가 될 만했다. 유독 신경을 많이 쓰고 나온 듯했다. 상대팀 반칙에 대해선 거의 휘슬을 불지 않고 우리팀 선수들의 동작에는 하나하나 민감하게 반응했다.
―최근 자서전 <영원한 리베로>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처음으로 웃음소리를 내며) 요즘 우리나라에 읽을 책이 없는 게 아닌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기쁘다. 지금까지 운동선수는 그저 운동만 하다 그만두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고정관념을 바꿔주고 싶었다. 운동 선수도 전혀 다른 분야에 관심을 두고 참여할 수 있다는 걸 직접 보여주고자 했는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니 정말 기분 좋다. 월드컵을 통해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긴 것 같다. 그 분위기와 발행 시기가 잘 맞아떨어진 것도 배제할 수 없다.
기자가 “2탄도 나올 수 있는 거냐”고 묻자 “자서전에 2탄이 어디 있느냐”며 자신의 인생에 대해 다시 책 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는다.
―터키전을 앞두고 은퇴설이 나돌았다. 직접 입으로 은퇴를 거론한 적이 있었나.
▲절대 그런 적이 없다. 어느 스포츠 신문에 내가 은퇴한다는 기사가 나갔는데 내 입으론 단 한 번도 은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은퇴는 혼자서 결정할 부분이 아니다. 주위 분들과 상의를 먼저 해야 한다. 그런 다음 은퇴 시기를 결정할 것이다.
홍명보에게 자꾸 언제 은퇴할 거냐고 묻는 게 참으로 민망스러웠다. 마치 은퇴하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사람처럼 홍명보와의 인터뷰에는 꼭 은퇴에 대한 질문이 들어갔다. 더욱이 황선홍이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한다고 발표한 터라 홍명보의 거취 문제는 기자들에게 큰 관심 사항이었다.
홍명보의 얘기를 정리해보면 조만간 대표팀 공식 은퇴와 관련해서 기자회견을 가질 것 같다. 홍명보와 인터뷰를 하는 중에도 어느 신문에선 황선홍과 공동 은퇴식을 가질 거라고 앞질러나갔지만 홍명보 본인은 금시초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조용히 그의 결단을 기다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일 것 같다.
―히딩크 감독에 대한 솔직한 느낌을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감독을 항상 축구를 통해서만 만났기 때문에 그분의 사생활에 대해선 잘 모른다. 분명한 것은 우리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줬다는 사실이다. 대표팀에 재복귀하면서 언론에선 나와 감독이 불편한 관계를 이룰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 들어간 내 입장과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배려해 줬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내가 은퇴 후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큰 배움이 있었고 축구에 대한 높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홍명보는 월드컵이 끝나면 가족들과 멀리 휴가를 떠날 계획이었지만 쏟아지는 스케줄 때문에 당분간은 ‘단꿈’을 접어두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2일 서울에서 펼쳐지는 국민대축제를 앞두고 오랜만에 포항 집에서 성민, 정민이와 함께 아빠의 모습으로 돌아온 홍명보는 참 편안해 보였다. 그 옆의 아내 조수미씨의 얼굴에서도 행복이 물씬 풍겨난다. 집에서의 홍명보는 카리스마로 똘똘 뭉친 축구선수 홍명보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