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28일 강금실 법무장관이 고건 국무총리 가 주재한 대구지하철참사 관계 장관 대책회의 에 참석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강 장관은 친구들 사이에 ‘일할 때는 논리가 너무 짱짱 명료하고, 놀 때는 율동이 너무 화끈한 친구’로 통한다.
서울대 3년 선배인 시인 김정환씨가 소개하는 그에 대한 에피소드 한 토막.
“지난 겨울이었어요. 갑자기 강 변호사가 전화를 하더니 대뜸 ‘형, 크리스마스날 약속 있어? 전인권 콘서트 안갈래?’하는 거예요. 워낙 목소리가 짱짱했고, 율동적이어서 덜컥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죠. 나를 비롯한 일행은 세실극장 콘서트장 뒤쪽에 서서 수시로 들락날락하며 안의 열기를 식혀보자는 심산이었는데 어느새 강 변호사는 과감하게 보조의자를 마다않고 맨 앞 좌석을 차지한 채 ‘젊은 세대’와 같이 폭발적인 율동에 빠져들고 있었어요.”
법조계 지인들은 강 장관을 가리켜 “열 남자도 못당할 강단있는 여장부”라고 입을 모은다. 일에 대한 열정과 추진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
당차고 화통한 성격으로 좌중의 분위기를 이끄는 것은 물론 술자리도 웬만해선 마다하는 법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항간에는 그의 주량도 상당한 것으로 소문나 있다. 그러나 시인 김씨는 “술자리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주량이 센 편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주변에서는 강 장관에 대해 삼국지의 주인공에 비견해 이렇게 평한다. “놀 때는 장비와 같이 화끈하며, 일할 때는 관우처럼 냉철하고, 여기에 유비의 인화력까지 갖췄다.”
강 장관의 성향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또 다른 에피소드.
지난 1997년 소설가 장정일씨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음란시비에 휘말리자 이에 대한 변론에 강 장관이 나섰다.
평소 장씨는 그 독특한 성향만큼이나 사람 사귀기에도 여간 까다롭지 않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농담이라곤 일체 없고 술은 소주만 좋아했던 그는 ‘접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
그런 장씨가 친구에게 “내 변론을 도와준 강 변호사님께 꼭 식사를 대접해야겠으니 약속을 정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곤 장씨는 대구에서 일찌감치 상경, 서울 신촌 근처 여관에 숙소까지 잡아놓고 약속을 기다리는 등 한껏 ‘공’을 들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울 강남의 한 고급음식점(평소 장씨의 성향으로 봐선 이 장소 또한 파격적이었다)에 약속을 정한 장씨는 강 장관이 나타나자 신문지에 싼 돈 뭉치를 펴 들었다. 거기엔 1만원짜리 50장이 들어 있었다. 장씨는 “오늘 이 돈을 반드시 강 변호사님과 다 써야 합니데이”라고 말했다는 것.
강 변호사의 극구 만류로 결국 장씨는 마련한 돈을 다 써보지도 못하고 돌아갔지만, 당시 자리를 함께한 장씨의 친구는 “나는 그때만큼 장정일이 거액의 돈을 소지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강 장관에 대한 장씨의 정성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강 장관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만약 법조인이 안됐다면 뛰어난 예술가로 성공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는 대학시절 서클활동으로 탈춤반에 들어 열성적이었다. 판사 시절인 85년부터는 한국 전통 무용에 푹 빠져 지금도 승무, 살풀이 등이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는 후문이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아마 이번 장관 임명이 아니었다면 조만간 개인 공연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웃었다.
강 장관은 각종 모임에서 노래를 통해 좌중을 휘어잡는 능력도 갖췄다고 전해진다. 그에겐 시와 영화를 좋아하는 문학소녀 같은 측면도 있다고 한다. 그는 2000년 로펌 ‘지평’을 창립하면서 그 목표를 ‘꿈꾸는 로펌’으로 정하기도 했다.
이번 장관 인선으로 각 언론에서 강 장관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첫’이었다. 서울지역의 첫 여성 단독판사, 첫 여성 로펌 대표, 첫 여성 민변 부회장, 그리고 이번의 첫 여성 법무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이에 대해 강 장관은 “여성이라는 특수성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결코 탄탄대로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살면서 갈등도 많았고 그만큼 굴곡도 많았다”는 것.
강 장관은 1957년생으로 제주에서 태어났으나 서울로 상경, 경기여고 문과 수석 졸업에 이어 79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유신 말기를 캠퍼스에서 보냈지만 강 장관은 딱히 운동권에 투신했다거나 구속된 경력은 없다. 다만 탈춤반 활동으로 학생운동을 이해하게 되었고, 사실상 이때부터 내면적으로 꿈틀대던 자유분방한 기질에 개혁적 성향이 어우러졌다.
26세가 되던 1983년, 서울지법 남부지원 판사로 임명된 그는 서슬 퍼런 5공 정권에서 불법 시위 혐의로 검거된 학생들의 구속영장을 줄줄이 기각시키는 대담성을 보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이런 파격은 결코 순탄치 않은 법조인의 길을 예고했다.
1993년에는 당시 김덕주 대법원장의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불거진 ‘사법파동’ 때 평판사 회의를 주도, 대법원장의 사퇴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의 개혁적인 행보는 변호사 시절까지 이어진다. 양심수 석방 캠페인을 위해 수의를 입고 모형 감방에 갇히는 ‘투옥 체험’도 보였다. 이때부터 강 장관은 주변에 의해 여성 법조계를 대표하는 인권변호사로 자리를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 지난 2월27일 강금실 법무장관 등 신임 각료들 이 고건 국무총리 취임식에 참석했다. | ||
강 장관은 지난 2월27일 취임식 후 기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앞으로 법무부가 할 일은 인권 여성 아동 등 사회적 약자 보호와 출입국관리, 이주노동자, 호주제 폐지, 난민 문제 등 너무 많다”고 언급한 것 또한 이와 무관치 않다.
‘강금실 카드’라는 파격적 인사를 두고 일각에서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나타난 바로는 노 대통령과 강 장관은 사시 선후배라는 점 말고는 딱히 연관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은 이미 진작부터 법무부 장관에 ‘강금실 변호사’를 심중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강금실이라는 인물을 미리 정해두고 자리를 찾은 것이 아니라, 법무부 장관의 여러 자격 조건을 먼저 설정한 뒤에 여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강 장관을 일찍이 점찍어 두었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노 대통령이 정한 새 법무부 수장의 확고한 방침은 ‘비 검찰 출신의 젊은 인물’이었다. 이것은 검찰 서열 관행의 타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이 취임 전 인수위에서 “여성스럽지 않은 부처에서도 이제 여성 장관이 나와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도 사실상 강 장관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이다.
인선 과정에서 강 장관의 내정설이 보도된 후 검찰의 강력 반발이 불거졌고, 이에 대해 한때 민주당 법조계 의원들이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이들이 내민 대안은 강원일 전 특별검사(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였다. 강 전 특검은 검찰 내에서 신망이 두텁고 개혁성향이 강하다는 점이 강점으로 꼽혔다. 한때 언론에서 강 전 특검이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도 이 때였다.
하지만 이미 노 대통령의 결심은 굳어진 후였다. 노 대통령은 “새로 임명된 장관이 싫어서 검찰이 옷을 벗겠다면 그 자리에 변호사들을 앉히면 될 것”이라는 말로 쐐기를 박은 것으로 전해졌다.
강 장관이 문학과 영화 등 문화 예술계 인사들과 폭넓은 인맥을 가져온 것도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강 장관은 영화감독 여균동씨와 학창 시절부터 단짝친구. 여씨는 서울대 철학과 재학 시절 교내시위로 두 번이나 제적돼 아직 졸업장을 받지 못한 이력이 있다.
강 장관의 전 남편 김태경씨(49·이론과실천 대표) 역시 서울대 철학과 출신이다. 여씨는 지난 대선에서 이창동 신임 문화관광부 장관과 함께 ‘노무현을 사랑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을 주도하기도 했다.
청와대에서는 강 장관의 내정을 일찌감치 확정해 둔 채, 그 검증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검찰 등의 반발로 강금실 흠집내기가 본격화될 것이 예상됐던 터였다.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역시 이혼 경위였다. 항간에 떠도는 위장 이혼 등에 대해서도 이미 청와대에서 심층적인 검증작업에 들어갔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문제없음’이라는 결론이 나왔다는 것. 강 장관은 남편인 김태경씨를 대학 졸업 후인 80년 지인의 소개로 만났고, 4년간의 열애 끝에 84년 결혼했다.
김씨는 서울대 재학 시절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전력이 있는 운동권 출신. 김씨는 결혼 후인 88년에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발간한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이때 아내인 강 장관이 구속수사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김씨는 출판사에 이어 여행사까지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결국 1995년 부도를 내고 말았다. 이후 자신의 빚을 아내가 떠맡게 되는 현실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2000년 합의이혼을 택했다.
그런데 당시 이혼은 강 장관이 먼저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쯤 되면 주위의 시선은 남편의 사업실패로 인한 불화설로 바라볼 소지가 다분했다.
하지만 이들 부부를 잘 아는 주변 지인들은 이를 일축한다. 강-김 부부의 성향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것. 이혼 제의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으로 괴로워하는 김씨에 대한 강 장관의 배려라는 설명.
김씨 역시 얼마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잦은 사업 실패로 전처의 도움을 받는 일이 많자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 내가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하겠구나라는 위기의식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혼은) 전처가 나에게 새로, 제대로 살아갈 기회를 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결혼 전 합의에 의해서 아이는 갖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고, 최근에도 가끔씩 만나서 우정을 나누는 것으로 전해졌다.
강 장관의 발탁을 놓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지난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당시의 권영해 국방부 장관 임명과 비교하는 시각도 있다. 권 전 장관은 당시 30년이나 굳건하게 형성되어온 군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고, ‘군의 문민화’를 이뤄야 한다는 대통령의 기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비 하나회’였던 권 전 장관은 하나회 척결에만 칼날을 휘둘렀을 뿐, 또 다른 문민 군 인맥의 양산이라는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이번 법무부 장관 인선을 놓고 노 대통령과 강 장관은 똑같이 ‘검찰의 문민화’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 주목된다.
강 장관의 개혁 방향은 분명해 보인다. “검찰의 수사권을 보장하겠다. 법무부는 검찰청의 상급기관으로서 인사권을 견제하고, 검찰이 소신껏 수사할 수 있도록 신분보장 및 복지 등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것. 아울러 그는 “지금껏 검찰 내의 관행이었던 서열을 과감히 파괴하겠다”고 덧붙였다.
장관 임명장을 받고 곧바로 취임식을 위해 법무부에 들어간 강 장관의 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주려 애썼다.
그는 미리 작성된 취임사를 무시하고 현장에서 즉석 연설을 한 부분도 그중 하나. 특히 강 장관은 다음과 같은 부분을 말할 때 유독 힘을 실었다.
“법조계의 관행상 서열을 파괴한 여성장관에 대해 여러분들도 당황하셨고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으로 압니다. 저도 여기를 떠나면 한 가족입니다. 또 그래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대로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검찰의 명예를 지금 이 시기가 아니면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떨리는 음성에 취임식장에 모인 법무부 직원들은 숨소리를 죽였다. 그리곤 강 장관이 다음 행보를 어디에 둘 것인지 조심스레 점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