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영구 국가정보원장 내정자 | ||
그의 임명 배경에는 묘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그는 재야출신 인권변호사로서 지난 90년 보안사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민간인 사찰 대상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포함된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 또한 지난 20여년 동안 국정원으로부터 감시와 견제를 받아왔던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고 변호사가 바로 국정원 개혁의 칼을 쥐고 나서게 된 것이다.
고 변호사는 뚜렷한 개혁성향을 가진 우리나라 1세대 인권·노동 변호사 출신이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국립체신고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고시에 합격한 ‘의지의 한국인’이다.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를 마지막으로 81년 정계에 입문해 11대 민한당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89년에는 ‘3김정치 청산’을 기치로 내세운 재야 시민 사회단체의 대표로 영등포 보선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신 바 있다.
국정원을 변화시킬 고 변호사의 ‘코드’를 읽기 위해서는 먼저 어려웠던 집안 형편을 극복하고 법관이 되었던 과정과 정계에 입문한 뒤 그가 보였던 ‘외길’ 행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연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불굴의 의지로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국정원의 ‘두꺼운 얼음’을 깰 것인가. 인간 고영구가 걸어왔던 길을 통해 그 해답을 미리 들여다봤다.
고영구 변호사의 별명은 ‘고 대법관’이다. 대법관을 지낸 적도 없는 그가 대법관으로 불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90년대 이후 줄곧 재야 추천 케이스로 대법관 후보에 올랐다. 그만큼 재야 법조계의 신망이 두터운 편이다. ‘고 대법관’이란 별명은 그의 사회적 위상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국정원장으로서 일단 손색 없는 배경임에 틀림없을 듯하다.
원로 법조인 이돈명 변호사는 “그 사람, 대단한 사람이다. 그리고 심성이 아주 착한 사람이다. 지금이 50대 세상이긴 하지만 (그가) 국정원 개혁의 큰 방향은 잡아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고 변호사와 통화를 했는데 ‘나이도 있어서 편히 쉬어야 하는데 잘할 수 있겠느냐’며 걱정해줬다. 그리고 ‘어려운 자리지만 마지막으로 일 좀 하라’고 격려도 해줬다”고 말했다.
그가 ‘재야의 대법관’이라는 영광의 닉네임을 얻기까지는 남다른 노력이 있었던 것은 당연할 터. 먼저 그의 인생 드라마 3막을 따라가 보자.
제1막은 1937년 10월18일 강원도 정선의 한 산골집에서 시작된다. 고영구가 태어난 날이다. 산골소년 고영구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인문계 고교에 갈 돈이 없어 진학을 포기, 혈혈단신 상경한다. 그는 서울에서 수소문 끝에 학비가 안드는 국립체신고에 들어갔다. 56년 고교를 마친 그에게 대학 생각은 사치에 불과했다. 그는 곧 서울 노량진우체국에서 말단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 고영구 국가정보원장 내정자의 10여년 전 모습. 가난한 산골소년이었던 그는 말단공무원에서 사 시에 합격, ‘인생역전’했지만 쉽지 않은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 ||
고영구 변호사는 1964년 서울민사지법에서 첫 판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도 식구들과 한 방을 써야 할 정도로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69년부터 약 2년 동안 변호사를 개업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71년 다시 법관으로 임용돼 대전지법 공주지원장, 서울고법 판사, 청주지원 수석부장판사 등을 거친 뒤 지난 80년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판사의 길을 접었다.
그의 인생 제1막은 가난과 굴곡의 역사였다. 이런 힘겨운 과거가 그로 하여금 사회모순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갖게 했고, 또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로 다가왔다고 할 수 있다.
청년시절 그의 입지전적인 ‘인생 역전’은 또 다른 길을 여는 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제2막은 80년 변호사 개업과 함께 시작되었다. 1년 후에는 당시 민한당의 공천을 받아 강원도 영월·평창·정선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민한당의 비주류였던 그는 유치송 총재의 노선에 대한 반감과 당권파들의 독주에 회의를 느끼고 84년 12월 민한당 비밀 탈당 계획에 참여한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기자회견장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12대 총선에 고향에서 다시 출마했지만 낙선하고 말았다.
국회 입성에 실패한 그는 85년부터 본격적으로 인권변호사로 나서기 시작한다. 그가 맡았던 굵직한 사건은 ‘보도지침 사건’ ‘이부영 의장 사건’ ‘이영희 교수 사건’ 등 부지기수. 특히 86년 일어났던 ‘권인숙씨 성고문 사건’은 당시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시절의 일화 한토막.
그는 권인숙씨가 조사받을 당시 유치장에 함께 있던 다방마담이 출소한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 마담을 수소문 끝에 찾아가 마치 기관에서 나온 것처럼 ‘위장’하여 진실을 캐물어 사건 해결에 결정적 단서를 잡기도 했다. 또한 그는 아버지 같은 온화함으로 피해자 권씨를 감싸주었다. 그래서 권씨도 수치스러울 수도 있었던 성고문 때의 악몽을 비교적 순순히 털어놓았다고 한다.
87년 8월26일은 한국 변호사들에게는 기념비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고영구 변호사를 비롯한 ‘정법회’(민변의 전신) 회원 30여 명이 군사독재 타도와 조속한 직선제 개헌 등을 주장하며 집회를 벌였던 것. 그런데 전경들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경찰측이 수십 발의 최루탄을 시위대의 발 아래 터뜨려 대오가 흩어지게 된다.
이때 고 변호사는 정강이에 사과탄 파편이 박혀 피가 흐르는 등 부상을 당했다. 이날 변호사들은 변호사회관에 들어가 밤샘농성을 했다. 이러한 집회 시위 농성은 한국 변호사 역사에서 최초의 일로 기록되고 있다(<민변백서> 55쪽).
이런 활발한 재야활동에도 고 변호사는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존재였다. 그런 그를 ‘전국구’로 만든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89년의 영등포을구 보궐선거였다.
고 변호사는 12대 총선 때 고향에서 낙선한 뒤 정계에 대한 미련을 털어버렸다. 그가 인권변호사로 시국사건 변론에 주력하며 민변 창설에 적극 참여했던 것도 정치 대신 시민운동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가 우여곡절 끝에 영등포 보선에 출마한 것은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 박찬종(왼쪽) 이철 전 의원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고영구 변호사. | ||
90년 4월에는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민연추)에 백기완, 이우재씨와 함께 공동대표로 선임돼 야권통합 논의에 참여하는 등 재야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 뒤 고 변호사는 지난 91년 2월3일 민주당과 재야 정치세력인 민주연합의 통합전당대회에서 민주연합측 대표 몫으로 당시 출범한 민주당 부총재로 선출된다. 하지만 이 직책을 끝으로 그는 정치활동에서 손을 떼게 된다. 그 후 94년 5월 초대 회장을 맡은 뒤 민변 활동에만 전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는 민변을 지금의 체제로 전환시킨 주역이었다. 민주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시국사건에 대한 수임도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래서 고 변호사는 시국사건 이외의 환경, 성폭력, 소비자문제 등 시민들의 실생활과 밀접한 분야에 눈을 돌리게 된다.
또한 조직체계도 종전의 대표간사제를 없애고 회장제를 도입, 자신이 초대 회장에 오르게 된다. 이런 ‘기획변론과 조직화’는 지금의 민변 정책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지난 96년 민변 회장을 끝으로 공직을 거의 맡지 않았던 고 변호사. 그의 인생 2막을 이끈 동력은 최초의 변호사 시위를 이끌었던 끊임없는 사회 참여와 열정이었다.
그는 지금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인생의 제3막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다. 그 시험대는 자신이 한때 사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국정원. 그는 지난 3월26일부터 외부 모처에서 국정원의 업무보고와 인사청문회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시민법률사무소 직원들과는 ‘이별주’도 나누지 못하고 부랴부랴 사무실을 떠나야 했다. 다음은 사무실 동료들이 전하는 고 변호사의 모습.
“법인 소유 소나타Ⅱ를 손수 몰고 다닐 정도로 소탈한 편이다. 어렸을 때 어렵게 살았기 때문인지 무척 검소하다. 주로 직원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다. 법률적 의문 같은 게 있으면 아주 상세하게 잘 가르쳐준다. 연세가 많아도 권위의식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러나 공적인 일엔 엄격하고 대충 넘기는 것을 아주 싫어하신다. 그래서 직원들은 그분을 무서워하면서도 존경하고 있다.”
고 변호사는 최근에는 사건 수임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법정에도 잘 나가지 않고 주로 사무실에서만 지냈다는 것. 그래서 일각에서는 고 변호사가 국정원의 격무에 잘 적응할것인가에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시민법률사무소의 한 변호사는 “수임을 하지 않는 게 건강 때문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최근에는 민변 외에는 사회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연세가 있기 때문에…. 하지만 건강은 아주 좋은 편이다. 일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분”이라고 밝혔다.
고영구 변호사를 처음 보면 꼭 샌님처럼 가냘퍼 보인다. 약간 큰 키(174cm)에 조금 마른 몸집. 상체가 앞으로 쏠려 평소에도 구부정하게 걷는다. 헐렁한 옷차림과 연약해 보이는 얼굴, 가끔씩 퍼지는 순진한 미소는 그를 ‘고뇌하지만 나약한 인텔리’로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외모만 보고 그를 판단한다면 오산. 호소력 짙은 바리톤 목소리에 상대방은 금방 압도돼 버린다. 더욱이 그가 토해내는 대중 연설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를 절대로 나약한 사람으로 여기지 못한다. 그의 연설에는 폭발하는 듯한 힘과 대중을 설득하는 논리가 있다.
외유내강은 바로 그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수장을 기다리며 ‘좌불안석’인 국정원 직원들이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