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르투갈 축구의 중흥을 이끈 황금세대인 피구이지만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었다. 지난 대회 미국전의 한 장면. 훈련을 마치고 평상 복으로 갈아입은 피구(오른쪽)는 뭇여인들의 마음을 뺏어갈 만큼 근사한 모습이었다. | ||
지난 3월 말 <일요신문>은 스페인 현지에서 세계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평가받는 루이스 피구와 지난해 말 친선 경기차 방한했다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 응했던 호나우두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곳의 해외 언론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는 두 스타는 2002월드컵 당시의 기억을 생생히 되살리며 한국에서 온 취재진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었다.
스페인 마드리드 시내에 위치한 레알 마드리드 훈련장에서 만난 피구와 호나우두. 서로 다른 생김새만큼이나 인터뷰에 응하는 이들의 태도도 각자의 개성을 엿볼 수 있을 만큼 신선하고 색달랐다.
피구와의 인터뷰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다. 인터뷰 요청 공문은 필수였고 레알 마드리드의 언론 담당관과 피구의 매니저를 거쳐 최종적으로 선수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야 되는 시스템이었다.
유니폼을 벗고 협찬사 ‘휴고보스’ 옷으로 한껏 멋을 낸 피구는 더 이상 축구선수가 아닌 ‘걸어다니는 모델’이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무려 5천6백10만달러(약 6백73억원)의 천문학적인 이적료를 받고 레알 마드리드로 옮길 만큼 대단한 실력과 명성을 자랑하는 스타이지만 건방지거나 우쭐대는 모습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는 한없이 겸손한 태도를 보여 감동을 안겨 주었다.
“난 선수이기 때문에 감독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입장이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굉장히 훌륭한 감독이라는 사실이다. 감독으로서의 실력은 물론 인간적인 부분도 배울 점이 많다. 오랫동안 같이 생활하지는 못했어도 내 기억 속에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감독이다.”
피구는 쿠엘류 감독에 대해 자세한 부분은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이미 한국의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을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공식 발표는 없었지만 지난 2002월드컵을 끝으로 피구는 더 이상 월드컵 출전에 대한 기대를 갖지 않겠다고 밝혔었다. 따라서 2006년 월드컵에서 포르투갈 대표팀의 피구를 볼 수 있을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만약’이라는 전제로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쿠엘류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과 포르투갈 대표팀이 다시 맞붙을 경우 어떤 그림들이 그려질 수 있는지를 물었다. 질문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번쩍거리며 속사포같이 대답을 쏟아냈다.
“상상만으로도 흥분되는 게임이 될 것이다. 옛 스승을 상대로 경기를 펼치게 되는 건 무척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쿠엘류 감독도 당연히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모든 걸 다 쏟아 부을 것이다.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누가 더 운이 좋고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나.”
▲ 레알의 최전방을 책임지는 라울(왼쪽)과 호나우 두가 골을 넣은 뒤 환호하고 있다(위) 팀 훈련 에서 중원의 마술사들인 피구, 지단의 뒤를 따 라 호나우두가 러닝을 하고 있다. | ||
분위기를 바꿔야만 했다. 미소를 가득 띠고 ‘손님 접대’를 하려는 상대를 자꾸 자극하는 게 영 껄끄럽기만 했다. ‘어떤 선수보다도 세계적으로 많은 여성팬을 몰고 다니는 비결’에 대해 물어보자 비로소 화사한 웃음이 얼굴을 가득 채웠다.
“난 내성적인 성격이다. 여자들한테 말을 잘 걸고 아무나 쉽게 만나고 사귀는 스타일이 아니다. 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날 좋아하는 것이다. 내가 만약 실력이 형편없는 선수였다면 인기가 있었을까. 축구선수인 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피구는 축구선수로 생활하는 데 대해 자신을 ‘행운아’라고 표현했다.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좋아하는 운동인 축구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것만큼 행복한 게 어디 있느냐는 생각이었다. 축구에 대한 매력을 열거하는 대목에선 그가 ‘패션모델’이 아닌 ‘축구선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 만큼 말재주가 뛰어났다.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아내 헬레나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어떤 여자인지 소개해 달라고 ‘주문’하자 “반했고 사랑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결혼까지 생각했다”면서 스웨덴 태생의 모델 출신 헬레나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같은 팀의 호나우두가 명성만큼이나 유명한 바람기를 발휘한다면 피구는 그 방면에서 마치 ‘뿌리 깊은 나무’와도 같다. 숱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헬레나와 두 아이들을 보호하는 든든한 가장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축구선수이기 전에 한 여자의 남편이요, 아이들의 아빠다. 직업 자체가 항상 부상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에 가족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공인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실, 항상 돌아다녀야 한다는 점 등은 대단히 불편한 일이지만 날 기다리는 가정이 있기 때문에 ‘외유’를 즐길 수 있다.”
말 한마디 한마디 속에 깊은 철학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라운드에서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도 보기 좋지만 밖에서 들여다본 그의 진솔한 모습도 매력으로 다가왔다. 인터뷰 자리에서 약간은 긴장이 풀린 듯한 제스처로 자신의 ‘역사’와 ‘경험’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내는 그의 모습 속엔 축구스타가 아닌, 사람 냄새 나는 피구가 어느 새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