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 오후 문화관광부 업무보고 전 노무현 대통령과 이창동 문광부 장관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 기자단 | ||
얼마전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이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밝힌 장관이 된 이후의 소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지금 그의 심정이 어떤지를 잘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교사에서 소설가, 영화감독에 이어 장관으로 변신을 거듭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영화감독 이창동으로 기억해주길 그는 바라고 있는 듯하다. 그 자신도 어색하기만 한 넥타이를 목에 두르고, 그는 요즘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그는 요즘 자기 스스로에게 가혹하리만치 ‘완벽주의’를 강요하고 있다. 혹자는 이 장관이 연출했던 영화 <박하사탕>에서 남자주인공이 철길 위 마주보고 돌진하는 기차를 향해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장면을 애써 오버랩시키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는 자신의 장관 발탁이 결코 ‘미스 캐스팅’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이창동’이란 이름 석자가 대중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97년 그가 감독을 맡았던 영화 <초록물고기>를 통해서였다. 당시 남산 감독시사실에서 있었던 기자시사회장에서 처음 만난 이창동 장관은 독특한 캐릭터로 지금도 기자의 기억에 진하게 남아 있다.
기자의 질문이 1~2분이면, 그의 대답은 10~20초에 불과했다. 그것도 굉장히 느릿느릿한 말투여서 글로 옮기면 달랑 한 줄에 불과했다. 오죽했으면 당시 그의 곁에 있던 영화배우 명계남씨가 대신 대답을 해줬을까.
왠지 영화판에는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던 그는, 그러나 첫 데뷔작에서부터 ‘대박’을 터뜨렸다. 그는 평단의 호평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것. 물론 여기에는 이 장관 특유의 완벽주의적 성실함이 있었지만 영화계의 줄을 제대로 잡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그에게 적용되는 영화계의 줄이란 명계남 문성근 여균동씨 등을 말한다. 당시 문성근씨는 일정한 인맥을 쌓을 정도의 중견 흥행 배우였고, 명계남씨는 영화계의 마당발이었다. 여균동씨 또한 94년 데뷔작 <세상밖으로>를 통해 주목받는 감독으로 각인되고 있었다.
신인 감독이 자신의 데뷔작에 당대 최고의 흥행배우였던 한석규 심혜진씨를 남녀 주연으로 캐스팅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든든한 인맥의 배경 때문이었다는 게 영화계 인사들의 전언이다.
이 장관을 몇 번 만난 사람들은 “대단히 무뚝뚝하고 투박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기자도 사실 그랬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주변에서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 “얘기하기를 좋아하고 다정다감하고 잘 웃고 사교성도 뛰어나다”는 것.
그의 고향 친구인 시인 홍영철씨는 “살벌한 영화판에서 5년 만에 최고의 감독으로 우뚝 선 것만 봐도 그의 친화력과 사귐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 영화감독 이창동의 작품들. 그는 <초록물고기>로 데뷔와 동시에 대박을 터뜨렸고 <박하사탕> <오아시스>로 명성을 이어갔다. | ||
이 장관은 1954년생으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가난했다. 대구고 재학 시절부터 문학에 남다른 소질과 관심을 보였던 그는 대구 시내 다른 학교의 문예반 친구들과 어울렸다. 어릴적 친구인 시인 홍씨도 이때 만났다. 친구들에게 고교시절 이 장관은 그리 두드러지거나 튀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경북대 사범대 국문과를 70년대 유신 말기에 다닌 이 장관의 대학 시절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의식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홍씨는 “당시엔 운동권이니 뭐니 하는 말이 따로 필요 없던 암울한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87년 민주화 항쟁 당시 이한열군 사망 추모제가 열렸던 연세대 주변을 이 장관은 끊임없이 서성거렸다고 홍씨는 전했다.
그래서일까. 소설가 이창동의 작품 속에는 권위와 수구에 대한 항거의식이 저변에 자리잡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85년 당시 KBS
비교적 안정적 생활을 보장해주던 교사직을 끝낸 것은 영화를 위한 준비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전리>가 당선되면서 등단한 그는 당시 교사직과 소설가의 길을 병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훨씬 전부터 이미 그의 창작적 열정은 소설보다는 영화에 맞춰져 있었다. 교사를 하던 83년 당시 KBS-TV를 통해 방영된 ‘이산가족찾기 상봉’ 프로그램이 전국을 눈물바다로 빠트릴 무렵이었다.
이 장관은 당시 가까운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영화감독들 다 뭐하는 거지? 저 극적인 상봉 장면들을 카메라로 찍지 않고 왜 그냥 놔두는 거야. 저걸 다 찍어두면 이 다음 영화 제작에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텐데.”
80년대 중반 고향인 대구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대학로의 연극인들과 어울리게 된다. 명계남씨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연극인 영화인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길이 교사가 아님을 확신했다. 가난했지만 그들의 열정이 부러웠다.
감독으로 성공한 이후 한 인터뷰에서는 그는 “영화판에 뛰어든 것은 내 안의 열정이 식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느낀 탓”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지난 92년 그는 자신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인 지난 93년에는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싶다>의 시나리오 작가 겸 조감독으로 영화판에 본격 뛰어들었다.
불혹이라는 뒤늦은 나이였지만 그는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박 감독은 “당시의 열악한 영화계 재정 상태는 조감독 등 연출부의 고생이 불가피했다”면서 “이 감독 역시 촬영장 청소는 물론 잔심부름에 홍보 업무까지 다 했다”고 기억했다.
박 감독 밑에서 지난 95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까지 함께 만들었던 이 장관은 96년 또 한 번 외도의 길을 걸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한 재벌기업 창업주의 일대기를 집필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외도는 지난 97년 그 자신이 직접 메가폰을 잡기 위한 재정 마련 차원이었음을 곧 알게 된다.
▲ 영화배우 설경구는 감독 시절의 이창동 장관의 완벽주의에 치를 떨 정도였다고 한다. | ||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문씨를 통해 스크린쿼터 사수투쟁에 동참하면서 이 장관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장관 역시 노 대통령에 대해 “처음 만났을 때 ‘아 이 사람은 말이 통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랑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도 대통령을 하겠다고 하니, 그럼 믿어주자, 밀어주자, 생각했다”고 소감을 피력한 바 있다.
이 장관은 지독한 ‘완벽주의자’로 소문나 있다. 영화배우 설경구씨가 이 장관을 가리켜 ‘변태’라고 말하는 것도 그 무시무시한 NG 외침의 공포 때문이었다. 설씨는 요즘도 술에 취하면 이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변함없는 ‘존경과 애정(?)’을 과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학계 친구로 알려진 소설가 신경숙씨 역시 “이 감독의 작품은 그의 성실성과 치밀한 완벽주의적 정신으로 신뢰감이 간다”고 밝히고 있다.
결벽증에 가까울 만치 그의 완벽주의적 성격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 한 가지.
눌변으로 알려진 그는 대선 경쟁이 한창 치열하던 지난해 11월 전격적으로 한 TV 토론회 출연을 감행했다. 노 후보를 지지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그는 정연한 논리로 노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있게 얘기했고,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당시 상대 후보측인 이회창, 정몽준 캠프에서 비상이 걸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이 장관은 방송 후 “할 말을 제대로 다 못했다”며 몹시 억울해 했다는 것. 이후 그는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당시의 토론회에 대해 곱씹고 또 곱씹으며 “평생 못잊을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한다.
그는 자신이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한창 하마평에 오르내리자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바꿨다. 기자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그의 전화번호를 알아내기 위해 ‘난리’가 났다. 평소 그와 가깝게 지낸 영화계 인사들이 “이 감독 휴대폰 번호 알려달라”는 요청 쇄도로 애꿎은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강금실 법무, 김두관 행자부 장관과 함께 이 장관의 발탁은 ‘노무현식 파격 행보’의 대표적 케이스로 꼽혔다. 강 장관이 검찰 개혁으로, 김 장관이 고위공직 개혁으로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면, 그 다음 바통은 현재 이 장관이 이어받고 있다. 이 장관은 그 스스로도 “언론사와 지나치게 대립구도화 되어 있어 나 자신도 솔직히 당혹스럽다”고 할 만큼 그는 언론개혁의 중심 선상에 서 있다.
여균동 감독은 “신문을 보니 이 감독이 요즘 많이 힘들 것 같더라”고 운을 떼면서 “솔직히 언론에서 말도 안되는 것을 가지고 물고 늘어질 때, 그래도 공직에 몸담고 있는 입장에서 일일이 성의있게 답변하는 이 감독의 모습을 보고 감탄스러웠다. 난 그렇게 못할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장관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는 목소리도 많다. 문단 내 오랜 친구로 알려진 한 인사는 “모처럼 문화계 인사가 장관에 임명돼 기뻤는데, 솔직히 최근 그의 행보는 너무 언론개혁에만 치우쳐 있는 것 같다”고 불만스러워했다.
전직 언론인인 한 인사도 “얼마전 TV 토론에 나선 이 장관이 ‘언론은 99가지 잘 한 것은 외면하고 한 가지 실수한 것만 마치 전체인 것처럼 확대해서 부각시킨다’고 지적한 것을 들었는데, 이는 언론의 기본 속성을 모르고 한 소리”라며 “언론이란 원래 단 한 가지라도 잘못된 점이 있으면 그것을 지적해주는 것이 고유의 기능”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장관 취임 직후 “관료사회가 마치 조폭문화를 보는 것 같다”라거나 “노 대통령의 분신과 같기 때문에 공감하는 바가 같다고 생각한다”는 등의 예민한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기도 했다.
시인 홍씨는 “이 장관의 최근 행보를 보면 좀 서투르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쓸데없는 대립을 불러일으켜 힘을 낭비하기보다는 보다 폭넓은 문화계 전반의 개혁 대상들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최근 들어 이 장관도 한결 유연해진 느낌이다. 그는 얼마전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석상에서 “내 언행에 대해 오해를 받았다면 전적으로 내 서투름의 결과”라고 인정하기도 했다. 확실히 그의 최근 행보를 보면 한결 더 신중하면서도 조심스러움이 뚜렷이 감지된다. 주변의 충고도 한몫한 것으로 보이다.
이 장관은 우직함과 함께 치밀함을 무기로 삼고 있다. 그의 우직함이 한 고비를 넘기고 있는 가운데, 또 한켠에서는 예의 그 치밀함이 준비되고 있을 것이다. 슬며시 미소짓는 사람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순박함 속에 감춰진 카리스마가 또 다른 태풍을 예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