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후보 당선의 1등공신인 그가 새 정권에서 자신의 뜻을 이룰지 주목된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입을 열면/ 막대기로 널짝 두들기는 것 같은 그 다급한 말소리/ 호남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난/ 호남 유학 기씨 문중의 처녀 맞아/ 부부가 되어도/ 그는 누구의 아들이기보다/ 누구의 사위이기보다/ 이제 막 도착한 막차인 양/ 마음 술렁여/ 그 순정 투성이의 아이디어 가운데는/ 한 줄기 그어지는 번개와 같은/ 무자비한 직선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뚝 잘라서/덜 다듬은 채 우뚝 서 있는 돌미륵인가/ 뒤통수에 휘파람 소리 달려/ 돌미륵에게 무슨 정은 그다지도 도타운지’
임 위원장은 1941년 전남 나주에서 임광택씨(작고)와 양경자씨(87) 사이에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꼿꼿한 성품은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교육자였던 부친과 YWCA활동을 해온 모친의 영향이 컸다. 엄격한 가풍 속에서 교육을 받은 소년 임채정은 남달리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해 책 살 돈이 없으면 서점 몇 군데를 돌며 책 한 권을 다 읽기도 했고 그 때문에 책 읽는 속도가 남보다 2배 정도 빠르다고 한다.
호남의 명문이었던 광주서중과 광주일고를 졸업한 뒤 1960년 고려대 법대에 입학한 청년 임채정은 4•19혁명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한국사회가 안고 있던 모순에 눈뜨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정치학, 철학 서적 등을 탐닉하게 된다.
하지만 유달리 영화 보는 걸 무척 좋아했던 그는 마음껏 영화를 보기 위해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 졸업 후 당시 ‘세기상사’라는 영화사에 입사했다. 그렇지만 그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부푼 기대와는 달리 그를 기다린 일은 극장 출입문에서 검표를 하는 것이었고 마침내 6개월 만에 그는 직장을 그만둬야했다.
이후 임 위원장은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동아일보> 기자 시험에 응시해 69년에 기자로서 발을 내딛게 된다. 그러나 유신 체제하에서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이 자행되면서 청년 기자 임채정은 동료 기자들과 ‘동아자유언론 수호 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해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다. 그로 인해 그는 1975년 해직당하게 된다.
그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던 임 위원장은 자신이 살고 있던 구파발 근처 삼송리 집에서 광화문까지 걸어다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임 위원장은 곧바로 <교육신보>를 만들어 교육운동을 했고 당시 <교육신보>에서 함께 일했던 후배들 가운데 상당수가 전교조 태동의 핵심 멤버가 됐다.
유신 말기 1979년에 그는 함석헌 선생을 비롯한 재야 인사들과 함께 ‘통일주체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선거 반대 국민회의 공동대표’로 소위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을 주도하다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1년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80년대 들어서도 그는 재야의 중심 세력이었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무처장, 상임위원장을 맡으며 민주화운동을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1987년 4•19 기념 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또다시 구속돼 옥고를 치러야했다. 출옥 후 1988년 문동환 박사, 박영숙 선생 등과 함께 평화민주당에 입당해 ‘평화민주통일연구회(평민련)’을 결성, 제도권 내에서의 운동을 계속했다.
굴곡이 많은 인생 역정 속에서도 그는 늘 자신보다는 후배들을 키우는 데 열성이었다. 이는 그가 교육에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그는 요즘도 후배들이 밤늦게 술마시다 술 값을 요구하면 군말없이 집에서 잠을 자다가도 돈을 들고 나온다고 한다. 그런 그를 후배들이 유독 잘 따르는 것은 ‘잘 챙겨주는’ 점도 있지만 소탈하고 뒤끝이 없는 그의 성격도 한몫한다.
임 위원장과 함께 10년 넘게 생활해 온 강현우 보좌관은 “60이라는 나이에도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손수 라면을 끓여먹을 정도로 소탈한 성격”이라며 “성격이 급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옆에서 지켜볼 땐 오히려 느긋한 편에 가깝다”고 전했다. 하지만 임 위원장이 ‘다혈질’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지난 8월 당 내분 과정에서 정책위의장이었던 임 위원장은 최고위원회의 도중 정균환 최고위원과 막말을 주고 받으며 멱살잡이 일보 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당시 싸움은 추미애-박상천 두 최고위원 간에 시작됐었다.
신당 추진준비위원장 선임 문제를 둘러싸고 비노 그룹의 박 최고위원이 “준비위원 이름과 담당자를 명확히 알려달라”고 했고 추 최고위원이 “이미 다 이야기 한 것”이라고 말을 끊었다. 이에 박 최고위원이 “왜 말하는데 끼어드느냐”고 질책했고 두 사람 사이에 “선배로서 품위를 지키라(추)” “당신이 품위를 지켜(박)”라는 언성이 오갔다.
문제는 회의가 끝날 즈음 반노 그룹의 정균환 최고위원이 “김원길 의원의 위원장 임명을 노 후보가 추천했다는데 세세한 문제까지 후보가 끼어드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했고 이에 임 위원장이 “후보가 추천한 게 아니라 한화갑 대표가 했다는 데 왜 후보 이야기를 하느냐”고 노무현 후보를 옹호한 게 화근이었다.
이어 두 사람 사이엔 “뭐 이새끼야” “이 새끼가 뭐냐”라는 원색적인 단어들이 오가기도 했다. 평소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임 위원장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준 사건이다. 하지만 임 위원장측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지난해 10월11일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토론회 에서 경청하고 있는 노무현 후보와 임채정 의원 (위쪽). 아래쪽은 지난해 12월23일 정대철 선대 위원장과 대화를 나누는 임채정 의원. | ||
그렇지만 또 다른 평가도 있다. 평소 바둑을 즐기는 임 위원장의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은 최근까지도 이해찬 이호웅 설훈 의원 등 국회 ‘바둑파’들로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11월8일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을 탈당한 날도 임 위원장은 자신의 방에서 이해찬 의원 등과 함께 오후 내내 바둑을 두면서 유유자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를 지켜보던 기자는 임 위원장에게 “신당 얘기도 많은데 ‘바둑 신당’을 하나 만들어 대표를 하는 게 어떠냐”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국민회의 정책위의장 시절엔 하도 느긋하게 일 처리를 해서 일부에선 `정치인으로서 다소 게으른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지만 이는 단편적 시각이라는 게 임 위원장측 반박이다.
그가 자신의 이익에 느긋하고 후배들을 키우는 데 열성을 다하면서 인간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임채정 사단’이 생겨나기도 했다. 국회 보좌관, 중앙당 당직자 등 비교적 젊은 정치인 30여 명으로 구성된 ‘임채정 사단’은 임 위원장의 끈끈한 배려에 상당히 유대관계가 깊다.
임 위원장은 흔히 정치권에서 ‘임슬로프’ ‘구원투수’ 등으로 불린다. ‘임슬로프’는 러시아 공산당 이론가 수슬로프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그만큼 임 위원장이 당내 이론가로서의 자리가 확고하다는 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언젠가 임 위원장을 가리켜 “당에서 가장 논리적인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특히 임 위원장은 지난 95년 국민회의 창당 기획단장을 맡아 ‘지역등권론’을 만들어 당시 정계를 은퇴했던 김대중 대통령의 정계복귀에 이론적 명분과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구원투수’라는 별명은 국민회의 정책위의장, 민주당 정책위의장 등을 맡아 늘 김대중 대통령이 어려울 때 발벗고 도왔다는 점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그의 ‘이론중시’ 성격은 골프를 배울 때와 운전면허증을 딴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1년 전 골프를 시작할 때도 임 위원장은 먼저 골프 관련 서적을 사서 이론적인 무장을 한 뒤에 골프채를 잡았다고 한다. 10년 전 운전면허를 딸 때도 역시 책을 사서 철저히 독파를 하고 나서야 운전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 요즘도 그의 의원회관 사무실에는 신간 서적 4~5권이 항상 놓여있다.
임 위원장은 지난 2000년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결과적으로 민주당 대선 전략 생산의 요람이었던 국가전략연구소장에 발탁되면서 그의 논리적이고 전략적인 사고에 대한 김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다시 한번 평가받기도 했다. 이 연구소는 나중에 노무현 당선자의 선거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젊은 인재를 발굴해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토론과 논리를 중시하는 임 위원장은 요즘도 주변 사람들과 식사를 하다가 반찬으로 나온 ‘토하젓’ 하나를 놓고 역사적 기원 등을 얘기하면서 1시간 넘게 토론을 하느라 다른 사람들 식사를 방해하기도 한다고 한다.
보좌진들과 격의 없는 토론을 즐기는 임 위원장의 소탈함은 얼마전 라면을 먹기 위해 분식집에 들렀다가 식당 주인이 “TV에 나오는 사람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는 일화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임 위원장은 정치적으로 민주세력이 정치 사회적으로 튼튼한 뿌리를 내리도록 돕는 게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최근 인수위원장직을 맡게 된 후 임 위원장은 “디딤돌 역할을 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누가 됐건 다른 사람들의 주춧돌 역할을 하는 게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한다는 것. 임 위원장은 “아직껏 나는 내 자리를 달라고 해 본 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가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챙겨준 대표적인 사례는 88년 평민련 대표 몫으로 50% 지분을 갖고 공천심사위에 들어갔으나 정작 본인은 자신이 살던 서울 양천구 목동에 출마하지 못하고 연고도 없던 노원구에 출마해 낙선의 고배를 마셨던 것이다. 남들 다 공천해 주고 자신은 선거 3일 남겨두고 출마 지역을 결정해 선거운동기간이 시작됐음에도 며칠동안은 선거운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
당시 임 위원장은 자신이 살고 있던 양천구는 후배인 시인 양성우씨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평민련에서 활동하다 함께 정계에 입문한 이해찬 의원이 4선이지만 임 위원장은 아직 3선이다.
이로 인해 첫 도전에 실패했고 1992년 14대 총선에서 당선됐지만 그 당시에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민자당 김용채 후보에게 36표 차이로 졌다가 4개월여에 걸친 투쟁 끝에 재검표를 실시해 ‘1백72표’차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등원에 성공했다. 재검표 과정에서 1백장짜리 한 묶음이 김 후보가 득표한 것으로 잘못 집계된 사실이 밝혀진 것.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임 위원장은 16대 들어 계속해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에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홍보사로 뛰고 있다. 현정부 개각 때마다 통일부 장관 입각설이 나돌았고 본인도 강력하게 희망했으나 번번이 물을 먹었다. 노무현 당선자 선대위 정책특별본부장으로 노무현 정권 탄생에 1등 공신이 된 임 위원장이 노무현 정권에서 자신의 뜻을 이룰지도 주목거리다. 조은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