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승메달을 목에 건 ‘영웅’ 마해영이 단상에 올라 관중들 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jhlee@ilyo.co.kr | ||
상황이 이러하자 관중석을 꽉 메우고 있던 대구 팬들은 삼성의 패배를 지레 짐작하고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삼성은 8회 공격에서 1점을 따라붙었지만, 여전히 3점이 뒤져 있었다. 게다가 남은 공격 횟수는 9회말 한번 뿐이었다.
더욱 삼성 팬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한 것은 8회부터 LG가 자랑하는 마무리 이상훈이 올라온 부분이었다. 그의 구위를 감안할 때 9회말 공격에서 삼성이 역전하긴 어려울 것으로 팬들은 보았다.
그러나 ‘야구는 9회말부터’라고 했던가. 삼성의 기적은 9회말에 일어났다. 선두타자로 나선 김재걸은 이상훈을 상대로 2루타를 뽑아냈다. 이어 1사후 등장한 브리또가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맞은 주자 1•2루의 마지막 기회.
다음 타자는 2002 시즌 페넌트레이스에서 47개의 홈런을 쳐 ‘홈런왕’에 오른 이승엽. 그러나 이승엽은 한국시리즈 시작 이후 이날 9회 타석에 들어서기 전까지 20타수 2안타의 빈타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날 역시 4타수 무안타 상황.
그러나 그는 찬스에 강했다. 이상훈의 두번째 공이 홈플레이트를 향해 빠르게 날아왔고, 이승엽은 오른발을 약간 들어올리더니 경쾌하게 배트를 휘둘렀다. 이상훈의 볼은 슬라이더였다.
볼은 ‘깡’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배트 끝을 떠나 오른쪽 외야를 향해 날아갔다. 이승엽이 친 볼이 담장을 넘은 것과 동시에 비명에 가까운 삼성팬들의 환호가 터져나왔다. 스리런 홈런. 전광판의 스코어보드는 9대9 동점으로 바뀌었다. 대구팬 “마해영뿐이다 ” 이승엽의 홈런으로 광란의 도가니에 휩싸인 삼성 선수들과 팬들은 흥분 속에서 다시 마른침을 삼켰다.
이승엽의 뒤를 이어 가볍게 배트를 휘두르며 타석에 들어서는 또다른 선수, 그는 삼성의 4번타자 마해영이었다. 마해영은 역시 거포였다. 이승엽에 이어 타석에 들어선 마해영은 열광하는 대구팬들에게 보답이라도 하듯이 LG의 바뀐 투수 최원호의 3구째 직구를 이승엽과 같은 코스인 오른쪽 외야석으로 날려 보냈다.
10대9 역전승. 이승엽의 홈런이 삼성의 기사회생을 가져왔다면, 마해영의 한방은 한국시리즈 20년 만에 처음으로 삼성이 우승컵을 차지하는 역사적 순간을 만들어냈다. 대구 구장은 이 순간 환희와 기쁨으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패색이 짙던 8회말 푸념을 남기며 자리를 일어났던 50대 삼성팬은 어느새 돌아왔는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렇게 외쳤다. “내가 뭐라고 했노. 역시 마해영뿐이 없다 아이가.”
삼성라이온즈의 4번타자 마해영. 경기가 시작하기 전 덕아웃에서 만난 마해영에게 기자가 ‘경기 끝나면 MVP 타고 바로 인터뷰 좀 하자’고 말을 건네자 마해영은 “뭐 그러죠. 크게 나갈 거면 우리 와이프 먼저 해요”라고 우승과 MVP를 기정사실화한 듯 대답했다.
▲ 마해영 사인볼 | ||
마해영은 이날 6차전이 끝난 뒤 기자들에게 전날 밤 꿈 이야기를 공개했다. “나이 들고는 꿈을 거의 안 꿨는데, 어제 밤에 수혁(롯데 자이언츠 선수였으나 몇해전 심장병으로 그라운드에서 쓰러진 뒤 현재 의식불명 상태)이 형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꿈을 꿨어요. 아내랑 서울에 수혁이 형 만나러 올라가 봐야겠네요.”
그러자 옆에 있던 그의 부인(방시라씨)이 “저는 별로 걱정이 안 되더라구요. 점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가 점괘처럼 돼버렸으니까요”라며 남편 마해영 선수의 말을 거들었다.
사실 너무나 극적인 승리여서 이들 부부의 말에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법도 하다. 이번 승리는 21년 만에 한풀이한 삼성뿐만 아니라 마해영에게도 너무나 값진 것이었다. 삼성은 지난 85년 전후기 통합 우승을 하긴 했지만, 한국시리즈에 일곱번이나 도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마해영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95년 당시 롯데 소속이던 그는 OB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지만, 3승4패로 우승의 꿈을 접어야 했다. 또 지난 99년에는 롯데 선수로 한화와 다시 한국시리즈에서 만났지만, 1승4패의 저조한 성적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는 2001년 삼성으로 이적한 뒤 정규리그 1위 자격으로 한국시리즈에 올라 두산과 자웅을 겨뤘지만 2승4패로 패해 한국시리즈 패배의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3전4기. 마해영은 “이번에도 졌으면 아마 야구가 지겨워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한국시리즈 우승컵에 대한 그의 소망은 ‘한’에 가까웠다는 얘기이다. 그의 올해 나이는 서른세살. 야구선수가 서른살이 넘으면 본인은 그러고 싶지 않지만, 주변에서 중고참으로 대한다. 이쯤이면 그도 더 늦기 전에 꿈에 그리던 한국시리즈 우승멤버가 되어야 했다.
그는 삼성 구단내에서 고참이다. 정규시즌에서는 우승하면서도 한국시리즈만 가면 패하는 ‘삼성의 시리즈 징크스’도 그에게는 부담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제 더이상 한국시리즈에서 지는 게 너무 지겨웠다. 그의 가슴 한켠엔 또다른 부담도 자리잡고 있었다.
20대의 한창 때이던 그는 롯데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홈런포였다. 그러나 지난해 삼성으로 옮기면서 이승엽이라는 걸출한 타자에 가려 2인자로 여겨졌다. 승엽이는 라이벌 아니다 하지만 이번 끝내기 홈런은 그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었다.
대구 팬들이 소리높여 외치듯이 마해영의 ‘한방’은 뭔가 다르다는 것을 팬들의 뇌리에 깊이 심어 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마해영은 이승엽에 대해 라이벌 의식은 전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는 “승엽이는 라이벌이라기보다는 나보다 공을 잘치는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한 수 위인 셈이죠. 어제도 승엽이가 없었으면 팀이 졌을지도 모릅니다”라고 이승엽의 공을 치켜세웠다.
마해영은 스스로 다른 선수보다 잘 하기 위해, 자신을 무리하게 채찍질 하는 것은 본인의 스타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노력하는 모티브는 다른 데 있다. 그는 “나도 조급할 때가 있고, 야구가 안된다고 생각할 때도 많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포기’는 내 사전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내가 야구하는 이유이자 원동력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 9회 끝내기 홈런을 터뜨린 마해영 | ||
같은 팀의 이승엽은 벌써 미국 ML(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한 문을 열어 놓고 있다. 그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무턱대고 미국으로 진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ML이 나를 테스트한 뒤 내가 필요해 손짓을 하면 갈 거예요.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에서 내가 일본 야구에 통한다고 생각될 때 콜이 오겠죠. 그때 생각해 볼 겁니다” FA가 되면 그에겐 또다른 길도 있다. 마해영의 전 소속구단인 롯데로의 귀환이다.
롯데는 마해영의 고향이자 한때 애증의 대상이었다. 선수협 파동으로 새 둥지 그는 지난 95년 군스포츠단인 상무에서 병역을 마친 뒤 롯데에 입단했다. 2001년 트레이드되기까지 6년 동안 마해영은 롯데를 대표하는 스타였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롯데에서 트레이드됐다. 당시 프로야구 구단과 극심한 마찰을 빚었던 선수협 파동이 터졌을 때 그는 선수협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이로 인해 구단에 미운털이 박힌 그는 삼성으로 트레이드되고 만 것이었다. 그는 지금도 롯데에서 이루지 못한 뭔가가 있다. “롯데는 원래 제 고향이지요. 언제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있지만 사실 FA선수가 되면 거액의 베팅을 구단이 할지 모르는 거죠.” 이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허전함과 아쉬움이 담겨 있다.
선수협에 대해 마해영만큼 할 말 많은 사람도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 지나간 일이다. 그는 선수협 문제를 거론하자 “그 때는 옳은 것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었어요. 그리고 선배들이 그렇게 투쟁한 결과 소득도 있었잖아요”라고 반문하는 그는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과 그때를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라며 말문을 닫았다.
인터뷰 중간에 그는 갑자기 “우리 와이프에 대해서는 안 물어봅니까”라고 멋쩍게 웃었다. 사실 기자가 새삼 그의 부인에 대해 별도의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은 이미 이날 오전 6차전이 열리던 대구구장에서 그의 부인과 장시간 인터뷰를 한 터였기 때문.
그러나 마해영은 자신보다 ‘와이프’에 대해 물어주길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승리의 영광을 부인에게 돌리고 싶은 까닭인 듯했다. 너무나 가정적인 거포 그는 질문하기가 무섭게 “모두 와이프 덕이죠. 항상 잘 해주지도 못해서 이번 겨울에는 꼭 멋진 겨울 여행을 떠날 겁니다”라며 여행계획까지 털어 놓았다.
“부산에서 야구할 때는 어려운 일이 무척 많았죠. 한번은 재산보증을 잘못 서서 그나마 모아둔 재산을 거의 날린 적이 있었죠. 그 때문에 생활이 어려울 정도가 됐어요. 그 때도 제가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집사람은 아무말 없이 다 이해해줬어요. 애들도 구김살 없도록 잘 키워줬어요.” 마해영의 부인에 대한 사랑은 구장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우승이 확정된 뒤 바로 구단 직원의 휴대폰을 낚아채 관중석에 있던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운동장으로 달려온 아내를 부둥켜 안고 소리없이 울었다.
이날 환희에 휩싸인 대구구장에서 마해영과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면서 기자는 ‘지금 이 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마해영 선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해영은 초겨울의 문턱에서 기자가 만난 ‘가장 부러운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