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근영 금감원장 | ||
엄 의원의 이 폭로는 정·재계에 일파만파의 충격을 던졌다. 이와 관련해 엄낙용 전 산은총재도 국정감사 증언대에 올라 “현대상선이 대출금을 회사 운영자금으로 쓰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이 문제를 둘러싼 의혹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세간의 의문은 크게 세 가지. 현대상선이 어떤 경로를 통해 산업은행에서 대출받았으며, 누가 이 대출을 지시했는지, 그리고 의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출금의 북한지원설이 사실인지 하는 점 등이다.
이른바 정·재계를 강타하고 있는 ‘현대상선 4억달러 대북지원설’이 터지면서 정권 핵심 주변 인사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표면에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인사 중 한 사람은 이근영 금감원장(금감위장 겸임)이다. 사실 엄격히 말하면 금감원이라는 조직은 실무적으로 현대상선의 대출문제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금감원의 역할이 금융기관을 감독할 뿐 실제 현장에서 이뤄지는 대출현황을 일일이 검사하진 않기 때문이다.
▲ 지난 2000년 8월 3대 금감원장에 발탁된 이근영씨 | ||
실제 이같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시민단체인 경실련은 최근 “계좌추적 당사자인 이 원장이 스스로 계좌추적을 거부해 국민의 알권리를 무시했다”며 이 위원장의 해임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이 원장이 의혹의 중심에 선 이유는 또 있다. 이 원장의 뒤를 이어 산은 총재를 지냈던 엄낙용 전 총재가 국회 국정감사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2000년 8월 무렵 이 원장을 포함한 이기호 청와대 수석 등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고 폭로한 때문이다.
여기에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도 최근 “이 원장이 검찰 고위간부(이귀남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계좌추적을 자제해달라고 주문했다”고 폭로하면서 그에 대한 의혹은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물론 이 원장은 “사실무근”이라며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어쨌든 이번 사건은 국가적으로 엄청난 스캔들임이 분명하지만, 이 원장 개인적으로도 반평생의 공직 생활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서른한살의 나이에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늦깎이로 국세청 사무관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관료의 길로 들어섰던 이 원장은 30년 공직생활 끝에 마침내 2000년 8월 경제 실세 3인방 중 하나인 금감원장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이제 현대상선 의혹이라는 뜻밖의 덫에 걸려 벼랑 끝에 몰려 있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폭로한 대로 “현대상선 계좌추적을 하면 사건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이 원장의 통화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는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근영 금감원장의 요즘 심경을 잘 아는 지인들은 그를 매우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이 원장 주변 인사가 전하는 얘기 하나. “이 원장은 현정부 들어 가장 성공한 사람 중 하나이지만, 가장 어려운 일을 많이 풀어낸 관료 중 한 사람이다.”
실제 이 원장을 보좌해온 금감원 직원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평소에도 새벽 2~3시가 돼서야 잠자리에 들 정도로 부지런하다. 하던 일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집에까지 서류를 들고 퇴근해 검토할 정도의 일벌레라는 것이다. 이 원장을 잘 아는 시중은행장이 전하는 그의 산은 총재 시절(1999년) 에피소드. 당시 은행들은 단체협약 개정문제로 경영진과 노조간에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때 이 원장은 은행장들과 노조측이 제안한 1백여개의 단체협약 개정안 내용을 일일이 점검했다.
이 자리에서 대부분의 행장들은 단체협약 내용 자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원장은 달랐다. 항목별 내용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대응안을 제시해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원장이 단체협약에 대해 다른 행장들보다 잘 안 것은 미리 대비한 때문이었다. 그는 협상테이블에 앉기 전에 며칠을 두고 미리 단체협약안을 구해 탐독했다. 그리곤 전문가들과 일일이 의견을 나눠 머리속에 담아두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 원장은 매사에 철저히 대비한다. 외부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상대방의 경력과 성격 등을 사전에 파악해 어색하지 않도록 배려한다. 그는 외모에서 우직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부하 직원들의 말에 의하면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를 업무에도 그대로 연결시켰다가는 된서리를 맞기 십상이라는 것. 결재서류를 내밀면 자구 하나까지도 일일이 따질 정도로 엄격하다는 게 직원들의 말이다.
이 원장과 가까운 지인들은, 그의 이같은 꼼꼼한 성격이 성장과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전한다. 이 원장은 1937년 충남 보령시 청소면 신송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여의고 대전에서 재봉틀 일을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던 것이다.
고교 시절에는 월세방을 구할 돈이 없어, 입주과외를 하면서 독학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도 학업성적은 매우 우수했다. 그는 금융계 마피아라고 불리는 대전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나와 고려대 법대에 진학했다. 그는 1968년 제6회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 공직에 발을 디뎠다. 행시에 합격한 것은 고대 법대를 졸업한지 7년이나 더 지난 뒤였다. 서른한살에 합격을 했으니,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빠른 편은 아니었다.
▲ 이헌재 전 부총리 이근영 금감원장 정세균 의원 진념 전 부총리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왼쪽부터). | ||
재무부 세제국장과 세제실장을 지낼 당시 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토지초과이득세와 금융종합과세 제도를 직접 담당했다. 이 원장은 국세청 조사국장을 3년간 역임하면서 1986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장영자-이철희 사건을 파헤쳤다. 그 후 1989년에 그는 재무부 세제국장으로 재무부의 본류에 다시 합류했다. 이 원장은 재무부 재직 시절이던 1990년 민자당 전문위원으로 경제정책에 간여했고, 1994년에 재무부 세제실장으로 본격적인 고위 관료사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 원장이 관료의 길에서 떠난 것은 1994년의 일이다. 그는 재무부 세제실장을 끝으로 한국투자신탁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그는 당시 한국투신 사장으로 가면서 낙하산 인사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원장이 세인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96년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으로 다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그의 이런 경력은 재무부 출신들 중에는 바깥으로 도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물론 그같은 야인시대의 경력이 나중에 금감원장으로 발탁된 이후 현대, 대우의 기업구조조정을 주도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는 했다. 한국투자신탁 사장,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산업은행 총재를 지내면서 그는 관료에서 증권-금융 전문가로 대변신했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그는 탄탄대로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1998년 그는 국책은행인 산업은행 총재로 전격 발탁됐다. 그의 발탁 배경에는 진념 당시 기획예산처 장관, 이기호 청와대 수석, 이헌재 당시 금감원장 등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가 금융계의 실세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산은 총재가 된 이후였다. 현정부 들어 산은은 과거와 달리 금융계의 핵심 기관으로 급부상했다. 산은이 뜬 가장 큰 이유는 현정부 출범 초기 경제정책의 역량을 총집결한 벤처기업 육성이나 대우, 현대 등 부실기업에 대한 투자를 대부분 이곳에서 담당한 것과 무관치 않다. 이런 금융기관의 수장 역할을 그가 맡았으니 자연스럽게 언론 등에 부상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기아차 처리문제부터 시작해 대우자동차 매각 등을 초기부터 주도했다. 당시 현정부의 최대 고민거리였던 기아차, 대우차 매각을 주도한 것은 그가 금융 실세로 부상하게 된 결정적인 배경이 됐다.
그는 산은 총재 시절 3차까지 가는 국제경쟁 입찰을 통해 기아차를 현대에 매각한 뒤 잡음이 없었고, 대우사태 이후 대우중공업과 대우차 문제를 신속하고 엄정하게 해결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는 산은 총재에 오른 이후 산업은행의 구조조정 및 경영혁신도 시작했다. 그는 당시 2천5백25명이던 산은 직원을 세 차례에 걸쳐 25%나 감축, 인원 규모를 10년 전으로 되돌 려 놓는 결단을 내렸다.
또 산은의 여신의사 결정단계를 5단계에서 2단계로 축소하고 집단심사제를 도입하는 등 업무절차를 대폭 축소했다. 능력위주의 발탁인사와 팀제, 영업점장 공모제 등 인사제도를 과감히 개혁했다. 그는 지난 2000년 8월 개각에서 금감원장에 발탁된 뒤 “새로운 금융 환경에 맞지 않는 제도를 과감히 폐지하고 , 금융기법을 선진화시켜 금융-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포부를 내비치기도 했다.
외환위기 이후 부실기업과 부실금융기관 처리에 몰두해 온 기업-금융구조조정에 소프트웨어와 시스템 개혁을 접목시켜 금융산업의 체질을 선진국 수준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의지였다. 금감원장에 오른 그의 모습은 사실 그 이전의 원장들과는 달랐다. 초대 이헌재 금감원장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금감원의 칼을 휘둘렀다. 또 2대 원장이었던 이용근 원장 역시 스캔들로 단 6개월만에 물러날 때까지 경제개혁의 야전사령관으로 공포감을 조성했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좀 다르다. 비교적 기업의 편에서 일을 처리했고, 재계와의 거리감을 좁히는 데 애를 썼다. 금감원 내부관계자의 말. “2000년에 원장이 된 뒤 2년 동안 금감원장으로서 나서거나 모가 나게 일을 처리하진 않았다. 비교적 잡음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금감원장에 발탁된 이후 그는 벤처기업과 금감원 관계자의 연계의혹이 터지면서 곤욕을 치렀다. 당시 정 아무개 국장이 벤처비리 의혹으로 자살하는 사건이 터진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은 이 원장과 직접 관계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금감원에 대한 외부의 눈길이 따가워짐에 따라 그 역시 예전 만큼 막강한 금감원장으로서의 실력은 행사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 현대상선 대출문제가 불거지면서 그는 36년간 걸어온 공직자의 길에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이번 사건이 미칠 정치적, 사회적 파장은 상상외로 커질 수 있다. 그의 행보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로 떠오른 이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