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26일 프랑스 대표팀과의 친선경기에서 첫 골을 넣고 환호 하는 박지성 선수(맨앞)와 동료들. 특별취재단 | ||
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세 차례의 평가전에서 새로운 스타탄생의 서곡을 알린 박지성은 월드컵 전에 너무 많은 기대와 관심이 쏠리고 있음을 심히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약간은 신기하고, 조금은 재미있으면서, 어느 정도는 이 긴장감을 즐기는 자세로 월드컵 본게임을 맞이하겠다는 각오다.
너무나 평범한 스물한 살 청년으로부터 넓은 지면을 메울 만한 재미난 이야기가 흘러나올까 싶었지만 박지성 그는 솔직함 속에서 묻어나는 잔잔한 행복과 따뜻한 감성을 전하며 시종일관 유쾌한 담소를 나눌 줄 아는 ‘럭키 보이’였다.
월드컵에 출전할 대표팀 엔트리가 발표되기 전까지만 해도 기자들 사이에선 탈락이 예상되는 선수들에 대한 추측이 분분했었다. 그중 한 명으로 지목된 선수가 박지성이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체격의 열세와 공수 연결고리로서 경기의 완급을 조절하거나 슛 찬스를 만드는 데 인색하다는 점들이 지적됐다. 그러나 박지성은 예상을 뒤엎고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양쪽 날개와 공격형 또는 수비형 미드필더 어느 자리에서도 제 몫을 충분히 해낼 재목이라는 감독의 안목이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당시 어느 언론에서 내가 엔트리 탈락 1순위라는 기사를 내보낸 적이 있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 기사를 보고 충격받았을 부모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공식적인 발표를 하기도 전에 어떤 근거로 그런 기사를 내보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음날 허위보도로 판명됐지만 잠깐 사이에 지옥과 천당을 오간 기분이었다. 그리고 히딩크 감독이 정말 좋아졌다.”
박지성은 엔트리 발표 이후 감독의 믿음에 ‘배신을 때리지’ 않기 위해 모든 걸 잊고 훈련에만 집중했다고 말한다.
어린 나이에다 키 175cm, 70kg의 왜소한 체격 등은 결코 박지성이라는 축구선수에게 기대를 가질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지 못한다.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경기 스타일도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요소. 박지성의 장점은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눈에 띄는 부지런함, 체격의 열세를 노력으로 극복해나가면서 조금씩 자신의 위치를 레벨 업 시켰다는 데에 있다.
“아직까지 축구에 눈을 뜨지 못했다. 축구를 다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라운드에서 상대하는 마이클 오언, 지네딘 지단 같은 슈퍼스타들보다 내 자신이 더 두려울 때가 있다. 경험 부족에서 오는 자신감 상실이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은 나를 한층 성숙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기대된다.”
2000년 6월 명지대를 휴학한 뒤 일본 J2리그 교토 퍼플상가로 입단한 박지성은 일본에서 생활한 2년여 동안 축구보다는 그 외적인 면을 훨씬 더 많이 배웠다고 말한다.
대부분 부모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외국생활을 하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박지성은 처음부터 혼자 생활하며 낯선 이국문화와 맞서 나갔다. 위기의 상황에서 손 내밀 곳이 전무한 조건에서도 박지성은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조용하던 성격이 외향적으로 변했다. 외국생활하며 너무 말을 안하고 자기 생활에만 충실하면 ‘왕따’당하기 십상이다. 가끔은 오버도 해야 관심을 끈다. 일본 선수들은 날 아주 재미있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오픈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선 또 달라진다.”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그것도 운동과 관련된 조직에선 위계질서가 경기 결과보다 중요할 때가 있다. 박지성은 그 점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일본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운동 사회의 자유분방함 때문이었다.
히딩크 감독이 부임 초부터 선후배간의 벽을 허물라고 수차례 강조했지만 그래도 뿌리깊게 남아있는 위계질서는 박지성을 힘들게 했다. 또래의 선수들한테는 농담과 유머를 곁들이며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다가도 나이 차가 많은 선배들 앞에선 ‘단답형’이 될 수밖에 없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명령과 복종 관계의 틀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2년간의 일본 생활중 가장 힘들었던 일을 묻자 박지성은 트레이드 마크가 돼버린 ‘글쎄요∼’를 연발한다. 생각을 정리할 때 주로 내뱉는 말이다.
2000년 후반기에 일본으로 입성한 박지성은 입단하자마자 대표팀을 오가는 바쁜 생활로 동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부에서 2부로 내려앉는 바람에 말도 붙이기 힘들 만큼 좋지 않은 분위기가 계속됐다. 그러나 1부리그 진입을 위해 선수들 모두가 한마음이 돼 훈련에 열중하면서 그동안 한발 빼고 지낸 동료들과의 관계가 오히려 더 좋아졌다.
박지성의 부단한 노력도 있었지만 그의 진가와 실력을 눈치챈 일본 선수들이 먼저 손을 내밀며 다가온 것이 박지성을 품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결국 지난해 교토 퍼플상가는 그의 대활약에 힘입어 팀 우승과 1부리그 진입에 성공했다.
일본 J리그로 간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그의 선택을 비판하는 소리도 많았다. 나이 어린 선수가 유럽이 아닌 일본을 선택했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난 다르게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선 유럽으로 진출하기까지 무척 어려운 과정을 거친다. 또 힘들게 가서도 실패하고 돌아오는 사례가 많다. 그렇다면 좀 돌아가더라도 일본에서 외국생활의 경험을 쌓고 좀더 좋은 성적과 좋은 몸값으로 유럽에 진출한다면 얼마나 보람된 일이겠는가. 그래서 J리그를 내 인생의 첫 직장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유럽 진출도 나름의 조건을 생각하고 있다. 구단에서 보내주는 것은 절대 사양하겠다는 것. 유럽 구단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정당한 대우를 제시할 때만 응하겠다는 것이다.
축구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했다. 수원의 한 아파트 단지로 이사해 인근의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마침 학교에서 축구부를 창단했다. 학교에선 박지성의 아버지 박성종씨에게 축구부 창단을 알리며 아들이 축구부에서 뛸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가정통신문을 발송했다.
아버지 박씨는 축구부 창단을 지지해달라는 내용으로만 알고 도장을 찍어 보냈다. 나중에서야 그 통신문이 박지성을 축구부에 입단시킨 계기가 된 것을 알고 반대했지만 이미 박지성은 축구의 재미에 푹 빠진 뒤였다.
그러나 축구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재정문제로 팀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해체의 길을 밟았던 것. 하루는 폭설이 쏟아진 한겨울에 밤늦도록 박지성이 귀가하지 않았다. 걱정스런 마음으로 학교를 찾아간 아버지는 캄캄한 운동장에서 혼자 공을 차고 있는 박지성을 발견하곤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박지성은 창단팀 감독이 다른 학교 코치로 옮겨간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사정한 끝에 세류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다. 집에서 30여분 버스를 타야만 다닐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박지성은 아침 7시30분에 등교해 축구 연습을 한 뒤 수업에 들어가는 노력과 정성을 보여줬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키가 155cm에다 몸무게가 말할 수 없을 만큼 적게 나갔다. 하루는 감독님이 집에서 쉬면서 체격을 키우라고 말씀하시면서 1년간 축구부 출입을 통제하겠다고 선언하셨다. 나한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지만 1년 동안 10cm가 더 크고 몸무게도 많이 늘어나 고2 올라가자마자 보란 듯이 축구부에 다시 들어간 기억이 난다. 그해 수원공고가 창단 20년 만에 첫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박지성은 축구계에선 ‘주류’ 출신이 아니다. 수원공고와 명지대를 택한 걸로만 봤을 땐 당시의 축구 실력이 의심스러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지성의 생각은 달랐다. 축구명문학교에서 날고 기는 선수들 틈에 가려 지내기보다는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학교를 찾았다.
명지대 이전에 S대 진학을 꿈꿨지만 학교측에서 사정상 받을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차선책으로 택한 곳이 명지대였다(요즘 S대쪽은 박지성을 ‘내친 일’에 대해 가슴을 치고 있다는 후문).
명지대 입학 후부터 박지성에겐 태극마크의 행운이 찾아왔다. 1학년 때 청소년 대표팀 발탁이 대표팀과의 첫 인연이었고 그후 계속해서 학교보다는 대표팀에서 더 많은 생활을 해나갔다.
박지성의 아버지는 수원에서 정육점을 운영했다. 어머니 장명자씨도 정육점 옆에다 반찬가게를 내고 함께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박지성이 일본에서 혼자 지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부모님이 모두 생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얼마 전 아버지는 아들의 운동생활을 뒷바라지해왔던 주수입원, 정육점을 그만뒀다. 어머니도 가게문을 닫았다.
아들의 성화도 있었지만 아들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장사를 고집할 수만은 없었고 각종 매스컴에서 인터뷰 요청이 봇물 터지듯 밀려들자 생업을 유지해나가기가 벅찼던 것이다.
“자식을 더 두고 싶으셨지만 날 훌륭한 운동선수로 키우기 위해 일부러 낳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만큼 헌신적이고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얼마 전 18평 아파트에서 35평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태어나서 처음 갖는 큰 집이었다.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고 기뻐하셔서 그 모습을 본 나도 정말 행복했다.”
박지성은 잉글랜드, 프랑스전에서 골을 터트린 데 대해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A매치 성적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전의 연속골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고.
“평가전은 평가전일 뿐이다. 예상 밖의 결과에 대해 우쭐하거나 자만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월드컵 대회다. 평가전에서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실력을 보여줄 자신이 있다. 국민들도 그런 정신을 기대할 것이다. 더 좋은 컨디션으로 실력 체력 정신력에서 한수 위라는 자부심을 갖고 한국 축구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다. 기대를 감동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지 여부는 첫 게임인 폴란드전에서 확인해보기 바란다.”
시종일관 ‘글쎄요∼’를 연발하던 박지성이 이성문제로 화제를 옮기자 갑자기 말이 많아진다. 묻지도 않았는데 여자친구는 있지만 애인이 없다는 것과 결혼은 아직도 우주에서나 있을 법한 일로 생각된다는 것, 그러면서도 이성친구는 다다익선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일본 생활의 외로움을 간접적으로 호소하기도 했다.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 여자를 위해 죽을 수 있을 정도의 감정”이라는 명쾌한 해석도 내렸다. 인터뷰 내내 애어른 같은 말투로 기자의 감정선을 넘나들던 박지성이 결국엔 여자얘기가 나오자 스물한 살 청년다운 환상과 꿈을 드러내 친근함을 느끼게 했다.
비록 오언이나 안정환 같은‘꽃미남’은 아니지만 얼굴 못지 않은 깊은 속내로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 박지성의 사람 됨됨이가 오랜 여운을 남기는 인터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