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26일 민주당에서 이강철 특보와 면담 후 돌아가는 이기명 전 후원회장. 최근 땅문제로 의혹이 제기되자 노무 현 대통령은 인터넷을 통해 ‘선생님께’라며 절절한 편지를 띄웠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 6월5일 새벽, 노 대통령은 그 ‘선생님’께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편지를 띄웠다. 노 대통령은 ‘선생님의 고초를 생각하면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다’며 이기명씨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이씨의 용인 땅 의혹을 둘러싼 언론의 보도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무일푼 후원회장’ ‘김삿갓 북한방랑기 작가’ 등으로 알려진 이기명씨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 몇 안 되는 ‘뉴스메이커’로 떠올랐다. 노 정권 초기 방송 인사에서부터 최근 용인 땅 문제와 관련해 직·간접으로 ‘의혹’의 중심에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씨는 세간의 부풀려지는 의혹들에 대해 아직 침묵과 잠행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기명씨가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과정은 ‘운명’에 가깝다. 그 운명에는 시간을 관통하는 ‘코드’와 크고 작은 인연들이 엮여 있다.
이씨는 노 대통령의 후원회장으로 정식 인연을 맺기 전까지 철저한 ‘방송인’이었다. 성우·PD를 거쳤지만 그의 본업은 방송작가다. 그러나 그가 작가 반열에 들어서기까지는 험란한 길이 놓여 있었다.
그의 대학시절 전공은 정치학이다. 영화감독이나 성악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동국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그를 기억하는 지인들은 그가 현실 참여에 적극적이고 뜨거운 열정을 지녔던 청년이었다고 말한다.
‘열혈 청년’ 이기명의 모습은 대학 1학년 때부터 나타났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1956년, 자유당의 이승만 대통령과 맞섰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 선생이 호남지방으로 유세를 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한 일이 발생했다.
그때 김관식이라는 시인이 독재에 항거, 신익희 선생 유해를 경무대 앞까지 운구하였는데 신익희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라는 소문이 확산되면서 시위열기가 고조됐다.
대학생이던 이기명은 동료 학생들과 시위에 참석했다가 경찰에 구속돼 15일간 유치장 신세를 졌다. 그때부터 그는 전공임에도 정치학이라는 학문과 인연을 끊었다고 한다.
이씨는 1961년 KBS에 입사하면서 방송인의 길을 걷는다. 처음 성우로 출발했다가 이듬해 문화공보부 연속방송극 현상모집에 <평화스런 날의 작별>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초창기는 <극비지령99호> <반역의 종말> <악마의 계곡> 등 주로 반공극을 썼다. 공동작품인 <김삿갓 북한방랑기>는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이밖에 별명이 반달곰인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주인공으로 다룬 <낮에 나온 반달> 등 시대극도 적지 않이 다뤘다.
그의 필명은 60∼70년대 라디오 전성시대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80년대 TV가 보급돼 작품활동이 줄어들면서 다른 분야에 관심을 보였다. 이씨와 함께 활동했던 작가들은 그가 80년대 정치적 암흑시대를 거치면서 현실 정치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그는 80년대 중반 <3김 시대> <코리안 드림> 등 정치 다큐작가로 유명한 이영실씨를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만남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영실씨는 당시 김 전 대통령의 비서로 있던 남궁진 전 문광부 장관을 통해 그를 DJ에게 소개했다고 한다. 그후 그는 열렬한 DJ 지지자가 됐다.
그는 87년 대선에서 DJ가 패배하자 ‘컴퓨터에 의한 조작선거’라고 주장하며 보름간 술만 마시고 지냈다고 한다. 마침내 탈이 난 그는 서울 백병원에서 생사를 오가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 지난 2001년 9월6일 부산 롯데호텔에서 열린 노무현 후원 회의 모습. 맨 오른쪽이 이기명 당시 후원회장이다. | ||
DJ와의 인연 후 정치에 부쩍 관심을 갖게 된 그는 88년 5공비리 청문회에서 맹활약한 노무현 의원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88년 중반 KBS 노조 초청으로 노 의원이 강연을 하러 온 것을 계기로 ‘인연’이 맺어졌다.
당시 노 의원은 강연 중 현장에서 만난 힘없는 사람들, 노동자를 얘기를 하며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위해 방송의 역할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때 이 씨는 노 의원이 ‘반듯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날 노 의원에게 ‘조건 없이 당신을 돕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그해 말 지금은 청와대 국정실장이 된 이광재씨 등 노 의원 보좌진들이 찾아와 후원회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씨는 “글을 쓰는 사람이 무슨 정치인 후원회장이냐”며 거절했지만 보좌진들은 “반드시 재력가나 명망가가 후원회장이 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설득했다.
이씨는 가족회의 끝에 현실 참여에 관심이 많은 딸과 대학생이던 아들, 그리고 성악가 출신의 아내가 적극 지원해 결국 후원회 회장을 맡기로 했다.
그는 후원회장이 된 뒤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 그리고 후원회 같은 조직적인 지원 대신 작가로서의 능력을 십분 발휘, 주변에서부터 노무현을 알리는 작업을 했다. ‘사람과 사람’이란 팸플릿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전달하는 일부터 시작한 것.
이씨는 후원회장이 된 뒤 노 대통령과 가시밭길을 걸으면서 아픔도 같이 했다. 노 대통령은 청문회 스타였지만 14대 총선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3당 합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역’이라는 높은 벽에 부딪혀 낙마했다.
지구당 해단식 때 이씨는 너무 억울해 비 내리는 창밖을 보며 오열했다고 한다. 어느날 낙심한 채 지내는 그에게 노 대통령은 “후원회장 자리는 돈을 알고 사업을 아는 사람이 적당한 자리”라며 부담을 덜어주려고 했지만 그는 “평생 글만 알아서 구멍가게 하나 운영해 보지 못했다”면서 “돈도 모르고 수완도 없지만 그러나 나에게는 마음이 있다. 후원회장은 성심(誠心)으로 하는 자리다”라며 오히려 노 대통령을 격려했다고 전해진다.
노 대통령은 서울 종로에서 꼬마민주당 후보로 치른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또다시 낙선했다. 노 대통령 진영 내부에서 지구당 간판을 내리자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이씨는 종로에서 2평짜리 방 하나를 얻어 지내며 꿋꿋이 노 대통령을 지원했다.
97년 대선 직전 노 대통령은 국민통합추진위(통추) 의원들과 함께 ‘DJ 지지’를 선언하고 이듬해 치러진 종로 보궐선거에서 다시 국회에 입성했다.
그러나 후원회장으로서 이씨의 기쁨도 잠시, 2000년 4·13총선을 앞두고 노 대통령이 지역구인 종로구를 버리고 부산 강서구 출마를 선언해 두 사람 간에 언쟁이 오가기도 했다.
이씨는 “왜 정치를 그렇게 어렵게 하느냐”며 노 대통령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지역구도 타파’라는 대의를 위해 적진으로 들어가는 그를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노 대통령은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우세로 나왔지만 결국 ‘지역정서’ 장벽에 막혀 고배를 들었다. 이씨는 당시 서울로 올라오면서 후원회장을 맡은 이래 가장 많은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 5월28일 언론에서 제기한 땅 관련 의혹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 노 대통령 | ||
대선 과정에서 최대 고비였던 후보단일화 문제를 놓고 내부 갈등이 상충할 때 그는 노 대통령에게 ‘큰 걸음’을 할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즉 ‘대의를 위해 사심(私心)을 버리면 하늘이 반드시 기회를 준다’는 믿음을 갖도록 한 것.
결국 노 대통령은 코드가 맞지 않지만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에 적극 나섰고 마침내 단일후보로 나서 대선에서 승리를 거뒀다.
대선 후 이씨는 후원회장 자리를 내놓았다. 언젠가 그는 “정치인 최고의 꿈은 대통령이고, 정치인 후원회장의 꿈도 대통령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 그는 56년 신익희, 87년 DJ에게 걸었던 꿈을 2002년 노 대통령을 통해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지인들에게 자기 할 일을 다한 만큼 정치권에서 물러나 조용한 ‘조언자’로 남겠다는 의지를 줄곧 피력해왔다.
그런데 최근 이씨의 이름이 자주 정치권 중심부에 떠오르면서 그의 순순한 꿈(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이 ‘과욕’으로 인해 변질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노 정권 초기 신임 KBS 사장 임명 과정에 이씨와 친척관계에 있는 서동구씨가 사장으로 추천된 것이 구설수에 오른 데 이어 완전히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던 그가 대통령의 문화특보를 맡기로 한 일 또한 비근한 예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최근 불거진 ‘용인 땅 의혹’은 진위 여부를 떠나 이씨는 물론, 일정 부분 노 정권의 도덕성에 생채기를 남기고 있다.
지난 6월1일 청와대가 나서 의혹을 해명했지만 또 다른 의혹을 부추긴 결과를 불러왔다. 급기야 노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인 강금원 부산 창신섬유 회장이 “내가 몸통(1차 매입자)”이라며 나서는 사태까지 초래했다.
그러나 이기명씨를 둘러싼 의혹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이씨는 나서서 해명하는 대신 아직 잠행과 침묵을 계속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도’에서 벗어난 행보가 아니냐는 시각이 적지 않다. 오히려 그의 그런 모습이 정권에 부담을 주고 의혹을 부풀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 6월5일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이씨가 당할 고초를 생각할 때마다 잠을 이룰 수 없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노 대통령과 이씨의 개인적 인연은 그만큼 두텁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정작 잠 못 이루고 고민하는 이들이 그 편지를 바라보는 국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국민 모두가 대통령과 공적인 인연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