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무형문화재 ‘이천 거북놀이’
“동네 사람들~”
“네~”
“이 거북이가 어떤 거북이지요?”
“복 거북이요~”
[이천=일요신문]유인선 기자=여러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거북놀이 가운데 유일하게 경기도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된 이천거북놀이의 시작이다.
이천거북놀이는 수숫잎을 엮어 거북이 형상을 만들어 마을을 돌며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며, 각 가정의 복을 빌어주고 액운을 막는 의미를 지닌 전통 민속놀이다.
거북이에게 길을 안내해주는 질라아비와 양반, 풍물패, 무동 등 각양각색의 차림으로 모여 있는 수십 명의 연희자들 사이로 푸른빛 도포를 걸치고 두 손을 모아 태평소를 굳게 쥐고 계신 ‘이천거북놀이’ 주요 전승자 예인(藝人) 이종철 선생이 계신다.
질라아비의 사설과 상쇠의 꽹과리 연주와 함께 깃발을 앞세운 거북이, 그리고 마을사람들과 풍물패들이 뒤따르며 길놀이로 막을 열고 농악장단과 함께 지신밟기 등으로 이어진다.
앞을 보지 못해 어느새 대열의 끝으로 뒤쳐진 예인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며 행여 대열에서 이탈할까 걸음을 재촉한다.
이어 풍년을 축원하고 자손번창, 운수대통,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예인의 구성진 가락의 고사덕담(古事德談)이 마을 어귀에 울려 퍼진다.
“오~~호야 에야 오야
천하 농사에는
천하지대본이요
오~~호야 에야 오야”
이천거북놀이 주요전승자 故 이종철 선생의 태평소 연주
그는 1933년 이천시 호법면 유산리 대촌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까막 광목 바지, 저고리에 좋은 양복도 입어보고, 목어단 조끼에 운동화까지 신고 곱게 자랐다.
그러나 그 시절도 잠시뿐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겨울 짚신도 겨우 신게 되는 처지가 됐고 국민학교 2학년 때부터 점점 앞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왜 실명이 되었는지 이유도 모른 채 단지 가난 때문이라 생각하며 현실을 수긍할 수밖에 없던 시절. 동네에 걸립패(집집을 돌아다니며 고사와 축원을 해 주고 돈과 곡식을 얻는 풍물패)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어머니 몰래 걸립패들을 쫓아다니며 고사소리와 태평소 가락을 익히고 70여 년간 외유내강의 소리꾼으로 고집스럽게 전통을 계승하며 예인의 길을 걸어왔다.
지독히도 무더웠던 2016년 여름날.
지난 봄 식도암판정을 받은 선생은 원주시의 한 대학병원에 입원하셨다.
보존회원들이 소식을 접하고 찾아간 병원에서 여느 때처럼 반겨주시며 “빨리 일어나야지, 공연도 가야하고”라고 하시며 경과도 제법 좋아 금방 일어나실 거라고 했다.
그렇게 입. 퇴원을 반복하며 항암과 방사선치료를 병행하시던 선생이 폐렴증상이 심해져 응급실에 들어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다시 찾은 병원에는 여러 의료기기들에 둘러쌓여 겨우겨우 숨을 내쉬고 계시는 선생을 뵐 수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먼데 뭐 하러 왔냐? 고 묻는 선생은 “고맙다고, 잘 살라”고 말씀 하셨다.
보존회원들은 ‘계속 되는 고통의 시간들이 여든을 넘긴 할아버지가 견뎌내기에는 쉽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달 11일 가족들로부터 비보를 접하고 보존회 나름의 방식으로 선생님을 보내드리기로 했다.
지산 이철회 선생은 밤새워 만장을 제작해주셨고, 회원들도 선생님을 떠나보내는 슬픈 마음을 글로 써 내려갔다.
그렇게 대쪽 같은 성격에 나서는 일 없이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이천거북놀이의 보존과 자신의 실력 쌓기, 후진양성에 정진해 왔던 우리가 기억해야할 이천의 예인 이종철 선생은 우리의 곁을 떠났다.
故 이종철 선생을 추모하는 만장기
“거북놀이보존회가 처음 발대식을 해 가지고 여태까지 계속 해 나가는데 고사하는 데 내가 안가면 되나? 축제날 내가 안가면 되나”
“ 나도 도포입고 갓 쓰고 하려면 그것도 얼마나 더운데. 현재 이천에 그거(거북놀이)를 발굴할 사람이 적어요. 그래서 내가 계속 고사를 댕기며 하는데 맨 날 그거여. 있는 것만 맨 날 하려니까 발전이 없어. 널리 안 퍼져서 그런데 이 거북이는 원래 이천이여” 선생이 하신 말씀이 귓가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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