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년 아시안게임에 나섰던 서재응의 피칭 모습. | ||
서재응의 형 서재환씨(28·여수중 코치)는 동생 서재응의 울퉁불퉁한 근육질 몸매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거라고 말하면서 고등학교 이전까지만 해도 왜소한 체구로 인해 지금의 모습은 상상조차 못했다고 회상했다.
“제가 성격 개조 차원에서 운동을 시작했다면 재응이는 방과 후 운동장에서 형이 운동 끝나기만을 기다리다가 자연스럽게 야구와 접한 케이스예요. 제가 야구하는 걸 무척 부러워했어요. 하지만 같이 야구선수로 활동하면서 엄청 많이 싸웠어요. 형이자 야구 선배로서 뭔가를 가르쳐주고 싶었는데 재응이가 못따라 왔거든요.”
서씨는 그 이유를 대학 진학 후에 깨달았다고 한다. 서재응의 체력이 기술을 습득할 만큼 좋은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몸이 약해서인지 서재응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야구에 대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입학 후 신체조건이 나아지고 몸이 단단해지면서 야구를 신나게 할 수 있는 노하우를 깨달았다는 것. 당시 서재응은 기본기를 열심히 다진 덕분인지 체력이 뒷받침되자 실력에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미국 보스턴으로 건너간 재응이가 당시 보스턴 구장의 마운드에 서는 순간 뭔가 강한 메시지나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후로 미국에 가고 싶다는 얘길 자주 했어요. 결국 운 좋게 저도 뉴욕 메츠에 입단할 수 있었는데 그게 시련의 시작이었죠.”
서재응은 야구 선배인 형과 함께 97년 뉴욕 메츠에 입단하게 된다. 코리안 형제는 뉴욕 메츠 싱글 A팀에서 동고동락하며 타향살이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나눴지만 99년 서재응이 더블 A로 올라가며 동거 생활을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 생활 중 의사소통 문제가 가장 큰 장벽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잖아요. 전 개인적으로 승용차가 없었던 게 제일 힘들었어요. 동료 선수들의 차를 얻어 타는 수준이었는데 그러다보니 모든 일정이 차를 소유한 동료의 사이클에 맞추게 돼요. 즉 그 친구가 연습하러 일찍 나가면 더 자고 싶어도 일어날 수밖에 없죠. 굉장히 서러웠어요. 그건 재응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더블 A에서 오매불망 빅리그로 올라가기만을 기다리던 서재응이 어느 날 갑자기 싱글 A로 다시 내려왔다. 팔꿈치가 아픈 게 이유였다.
“손톱 끝이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면서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죠. 결국 재응이는 수술을 했고 전 2000년에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귀국 전 한 달 반 정도를 같이 지내며 헤어짐을 아쉬워했는데 그때 재응이는 재활훈련 마치고 집에 오면 한국행 비행기표를 펼쳐놓고 ‘나도 형따라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서재환씨는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동생이 실현시켜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지난 18일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에서 서재응이 5승을 거뒀을 때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고 한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에요. 지금 이런 리듬을 시즌 끝날 때까지 살려가야 하는데 말이죠. 플로리다 경기에서 손톱 부상으로 마운드를 내려올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팔꿈치 부상이 재발된 줄 알았던 거죠. 한때 야구 잘하는 동생이 부러워 질투를 한 적도 있었어요.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이젠 형이자 팬으로서 재응이의 호투와 역투를 진심으로 응원할 뿐입니다.”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