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26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새 대표로 선출된 최병렬 의원. 흩어진 ‘당심’을 모으기 위해 탈당파 처리, ‘창심’에 대한 뒷수습 등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만 해도 만만치 않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당초 서청원 후보에 비해 열세라는 예상을 뒤엎고 천신만고 끝에 대표직에 당선됐지만 최 대표의 앞날 역시 경선과정 못지 않게 험난할 것으로 예상된다. 당내 갈등 봉합과 내년 총선 대비 등 당장 최 대표가 헤쳐나가야 할 난제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기 때문이다.
정가에선 일단 최병렬 대표가 ‘합리적인 대화를 통한 상생의 정치’를 펼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 대표 자신도 대표 당선 후 기자회견에서 “남의 탓이나 하는 여야 관계가 아닌 새로운 패턴을 추진할 것”이라며 “청와대가 초청 안 해도 체면 버리고 찾아가서 민생관련 문제를 설득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대북송금 특검에 대한 최 대표의 태도 역시 눈에 띈다. 여권 일각에서 논의중인 ‘1백50억 비자금 조성 부분’으로 범위를 좁힌 재특검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합리적 비판자’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는 평이다.
게다가 앞으로 최 대표 체제의 머리와 손발이 될 홍사덕 원내총무나 이강두 정책위의장 역시 여야 정치권에 두루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사들이다.
그러나 최 대표 주변과 당내 일각에선 최 대표가 청와대와 여권을 결코 ‘웃는 얼굴’로만 대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 최 대표 진영의 한 관계자는 “최 대표에겐 당권경쟁에서 패한 주자들이나 탈당파 의원들 처리 문제 등 수습해야 할 당내 문제들이 많다. 흩어진 ‘당심’을 수습하는 최선의 방안은 하루빨리 대표성을 인정받고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노무현 정권과 맞각을 세워 당의 목소리를 하나로 이끌어가는 게 필요하다. 아마도 최 대표는 정국을 ‘노무현-최병렬 2자 대결구도’로 재편하기 위해 ‘대여 공격’에 주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표직 수락연설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당적 이탈과 신당 불개입을 강하게 요구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는 지적이다.
경선과정에서 최 대표 진영의 인사들은 “최 의원이 대표가 되면 정국 구도가 무척 흥미로워질 것”이라 밝혀왔다. 최 대표는 그동안 65세라는 고령, 민정계 출신, 영남권 중진이라는 배경 탓에 ‘꼴보수’란 다소 부정적인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최 대표 진영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함량미달의 개혁 드라이브와 운동권 출신 권력층 이너서클 형성 등을 통해 지탄을 받아왔다. 노 대통령과 정치적 컬러 면에서 100% 상반된 이미지의 최 의원이 보수층과 영남권의 지지를 업고 내년 총선 이전까지 노 대통령측을 압박하면 또 한번의 총선 압승이 기대된다. 어설픈 개혁 주창으로는 한나라당의 르네상스를 기대할 수 없다”고 밝힌다.
최 대표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언론인 출신이다. 1963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22년간의 기자생활을 거쳐 편집국장까지 지냈다. 지난 85년 전두환 대통령이 발탁해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청와대 정무수석, 문공부, 공보처, 노동부 장관 등의 요직을 거치며 활약했다. 김영삼 정부 때엔 서울시장을 지내 대중적 지명도를 높일 수 있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최 대표의 ‘화려한’ 이력은 노 대통령이 걸어온 ‘험난한’ 길과 평행선을 달린다. 그의 이런 경륜은 분명 노 대통령과 현 정부에 대한 기대가 한풀 꺾이고 실망감을 느낀 유권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내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배경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6월30일 홍사덕 의원(왼쪽)이 새 원내총무로 선출된 뒤 최 대표와 함께 웃고 있다. | ||
최 대표는 ‘깡보수’ 이미지를 뒤바꾸기 위해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당 개혁과 대대적인 물갈이를 예고해왔다. 그러나 당내에서 ‘물갈이 대상’으로 거론되는 인사들 중엔 ‘최병렬 대표 만들기’에 공헌한 인사들도 적지 않다. 당 개혁에서 이른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셈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시민단체로부터 대표적 네거티브 정치인으로 지목된 정형근 의원은 최 대표 경선공략의 밑그림을 그린 사람이고, 최근 당내 소장파를 ‘진보를 가장한 좌파’로 몰아쳤던 ‘색깔론’의 대가 김용갑 의원은 최 의원의 영남권 수성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또 지난 2001년 논란을 일으키며 자민련에서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긴 김용환 의원은 서청원 의원의 아성인 충청권을 흔드는 데 역할이 컸다”며 “이들 인사들을 최 대표가 내치기는커녕 오히려 전국구를 줄 것이란 소문도 돌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불거진 일부 의원들의 탈당 논란도 최 대표의 당 운영에 대한 부담을 한층 더 무겁게 만들고 있다. 당내 개혁파의 좌장격인 이부영 의원은 전당대회 직후 일본에서 탈당 의사를 밝혔다.
김부겸 안영근 의원 등 5~6명의 의원도 곧 짐을 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집단 탈당은 곧 한나라당 신임 지도부를 ‘수구 보수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최 대표는 이들 탈당 거론 인사들을 직접 설득하고 달래면서 “탈당을 막을 것”이라 공언하고 있다. 하지만 최 대표 진영 내부에서도 이들 탈당파 인사들에 대한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경선과정에서 최 대표측 진영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탈당 거론 인사들에 대해 “그 사람들 나가주면 당으로서는 고마운 일”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이 인사는 “최 의원이 추구하는 합리적 보수를 실현하려면 극우 극좌로 분류된 사람들은 걸러내야 한다. 당이 한목소리를 내기 위해 체질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차피 제1당인데 1백53석이나 갖고 있을 필요가 있나”라고 역설했다.
노무현 정권이 각을 세우고 있는 보수언론, 이른바 ‘조·중·동’과의 관계 설정도 최 대표에게는 또 하나의 과제다. 한나라당과 메이저 언론의 유착관계가 최 대표 체제 출범으로 인해 더욱 견고해질 것이란 얘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최 대표는 메이저 언론사의 간부들과 두터운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정·언 유착’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이미 경선과정에서 다른 후보측에 의해 거론되기도 했다.
전당대회 10일 전인 지난 6월16일 〈중앙일보〉는 한나라당 당대표 선거 여론조사를 실시해 최병렬 후보의 1위를 점친 바 있다. 서청원 후보 진영의 한 관계자는 당시 보도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중앙일보> 조사보다 이전에 행해진 <조선일보>의 여론조사에서는 서청원 후보가 최병렬 후보에게 9%포인트 정도 앞선 결과가 나왔다고 하더라. 그런데 보도는 되지 않았다. 경선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라더라. 하지만 그후 거꾸로 최병렬 후보에게 유리한 조사 결과는 보도가 됐다. 최병렬 후보측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봐야 하지 않겠나.”
이에 대해 최병렬 대표측은 “<조선>이나 <중앙> 같은 큰 언론사가 일개 당대표 후보가 원하는 대로 보도 여부를 정하겠나. <조선일보> 여론조사 결과는 우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론조사는 샘플링이 잘못된 탓에 보도가 안된 것으로 들었다”고 반박했다.
▲ 최 대표에게 이회창 전 총재(왼쪽)는 이제 ‘넘어 야 할 산’이다. | ||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노무현 정부에 대해 맞각을 들이대온 메이저 보수 언론사들이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 최병렬 대표 체제를 맞이한 이상 여권에 대한 논조의 수위를 조금은 낮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즉각 최 대표와 보수언론이 유착됐다는 소릴 듣기 십상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당내에선 최 대표의 발목을 붙잡을 최대의 장애물로 ‘창심’이 거론되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회창 전 총재에 대한 ‘삼고초려’ 발언 때문에 최 대표가 서청원 후보를 제칠 수 있었던 것 아닌가”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일찍이 최 대표는 ‘온갖 동네철새들은 왜 받아들였는지…’라는 식으로 이회창 전 총재의 역량이 역부족이었음을 비판한 바 있다”며 “서청원 후보측이 ‘창심’을 이용한다고 비난하던 최 대표측이 선거 막판에 오히려 ‘창심’을 활용해 덕을 봤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전당대회 직전 최병렬 후보의 이 전 총재에 대한 ‘삼고초려’ 발언은 의도된 작품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최 대표 진영의 한 관계자는 “막판 판세 역전을 위해 ‘창심’을 적극활용하자는 내부 논의가 지난 6월12일 있었다”며 “그리고 다음날 최병렬 후보 본인이 부산에서 열린 부산·울산·경남지역 선거인단 상대 합동연설회에서 ‘대표가 되면 이회창 전 총재를 삼고초려해서라도 다음 총선에 모든 힘을 결집시키겠다’고 발언하게 된 것”이라 밝혔다.
최 대표측은 “이회창 전 총재에 대한 ‘삼고초려’ 발언은 ‘정계복귀 종용’이 아닌 ‘명예회복’ 차원이었다”며 “총선에서 지원유세를 해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이 전 총재 보좌역을 지낸 한 인사는 “선거전에서 필요한 만큼만 ‘창심’을 활용하고 나서 대표로 당선되고 나니까 이 전 총재 역할과 위상에 한계를 설정하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도 “가을에 귀국할 것으로 보이는 이 전 총재와 그 추종세력, 그리고 유권자들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회창 향수’의 뒷감당을 최 대표가 어떻게 해낼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창심 수습’ 방법에 따라 앞으로 최 대표의 스탠스가 달라질 것이라는 시각이다.
그러나 이처럼 산적한 난제들 앞에서도 최 대표는 특유의 돌파력을 믿는 듯 ‘자신만만’한 모습이다. 정계 인사들은 최 대표의 최대 강점으로 정치인답지 않은 ‘솔직함’을 꼽는다. 경선과정에서 기자들이 최병렬 후보에게 가장 많이 물어본 부분은 바로 불출마 선언을 번복한 서청원 의원에 관한 것이었다.
최 대표의 한 측근은 이와 관련, “‘그냥 서청원 의원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만 답하면 되는데 ‘나 같으면 한 번 뱉은 말 주워담지 않을 텐데…’라는 속마음을 들키기 일쑤였다”고 전한다.
최 대표와 10여 년 동안 같은 당에서 지냈던 한 중진 의원은 “최병렬 의원은 정치를 오래 해왔지만 속내를 일부러 감추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의원은 또 “솔직하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즉흥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이라면 최 대표는 입이 무거운 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최 대표의 이 ‘신중함과 솔직함’이 당심을 수습하고 신뢰를 키워가는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동안 최병렬 대표에겐 ‘해결사’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지난 90년 노태우 정부 시절 노사관계가 극한대립으로 치달을 때는 노동부 장관으로, 김영삼 정부 시절인 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건 때는 서울시장으로 긴급 투입돼 소방수 역할을 맡아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온 이력 탓이다. 위기 때면 어김없이 등판한 검증된 ‘구원투수’인 그가 두 차례나 연거푸 정권 창출에 실패한 한나라당의 ‘위기 해결사’ 역할을 어떻게 해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