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4일 국회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지원특위에 나와 동 계올림픽 유치 실패에 대한 책임공방을 벌이고 있는 김운 용 의원. 김 의원의 왼쪽 뒤로 보이는 사람들은 평창 동계 올림픽유치위원회 최만립 부위원장을 비롯한 참고인들이 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국회 평창동계올림픽유치특위(위원장 김학원 의원)는 지난 7월14일 전체회의를 열고 그를 국회 윤리위에 제소하기로 결정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실패에 김 부위원장의 책임이 일정 부분 있다고 인정한 셈이다.
김 부위원장은 지난 30년 동안 대한체육회장, 한국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 IOC위원, GAISF(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 회장, 대한태권도협회장(대태협), 국기원장,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등을 맡으면서 한국 스포츠계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김 부위원장은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줄곧 ‘잡음’의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번 ‘평창 유치 방해’ 논란은 그런 그에게도 가장 위험한 난관이다.
어쩌면 그의 높은 위상에 부딪혀 사라지곤 했던 그간의 ‘비판’들이 이제 국내외 압력으로 응집해 그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연 김운용은 ‘산’을 내려올 것인가, 불안한 정상을 지킬 것인가.
학창 시절 김운용의 본래 목표는 외교관이었다. 그가 국제적인 스포츠맨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외교관에 대한 열망이 우연히 스포츠와 연결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외교관의 꿈을 열어 준 것은 경동고 시절 가장 가까웠던 이원익(작고)이라는 친구였다. 이원익은 그에게 ‘영어와 프랑스어를 잘하니까 외교관이 적격’이라며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할 것을 권고했다.
김운용은 1950년 이원익과 함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자마자 외교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행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러나 6·25전쟁 발발로 ‘꿈’에 도전도 못하고 대신 군에 입대했다. 그는 영어를 잘하는 덕에 UN 연락장교단에서 근무했다.
김운용은 소령이던 1955년(24세) 미국 텍사스에 있는 웨스턴대학에서 1년반 동안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는 미국 유학생활 중 향후 그의 운명을 바꿔놓은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과 군사영어에 능통한 조상호 전 체육부 장관을 만나게 된다.
그는 1958년 대학에 복학했고 그해 지금의 아내인 박동숙씨(이화여대 피아노학과 졸업)를 만나 당시 체신부 장관이던 이응준 장군의 주례로 결혼했다. 1960년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듬해 스물아홉에 중령으로 예편한 뒤 군에 있을 때 인연을 맺은 송요찬 국방부 장관(군정 내각수반 역임)의 비서관으로 일했다. 그리고 1963년 주미 대사관(대사 김정렬) 참사관으로 임명돼 외교관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그의 외교관 생활은 1968년 북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과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으로 일대 전환을 맞게 된다. 당시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이 미국 문제를 전담할 일급 비서관이 필요하다며 그를 부른 것.
김운용은 미국에서 귀국, 청와대 경호관들의 자문역을 맡다 곧바로 청와대 비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던 중 1971년 박종규 실장으로부터 ‘태권도협회장을 맡아달라’는 뜻밖의 제의를 받고 태권도와 인연을 맺게 됐다. 이것이 바로 그가 스포츠계의 거물로 성장하는 첫걸음이었다.
당시 김운용을 태권도계에 끌어들인 사람은 이종우 전 국기원 부원장으로 알려진다. 1970년대까지 태권도계는 청도관, 무덕관, 지도관, 송무관 등 10개 파벌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당시 지도관 관장이었던 이 전 부위원장이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하던 김운용의 정치력을 활용해 태권도계를 정리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 지난 4월3일 만찬을 함께한 이창동 장관과 노 대통령, 김운용 의원, 이건희 삼성 회장(왼쪽부터). 청와대사진기자단 | ||
김운용은 71년 태권도협회 제7대 회장으로 취임한 뒤 매우 열정적으로 일한 것으로 전해진다. 1973년에는 세계태권도연맹을 창설하고 초대 총재로 취임했다. 취임 초에 대태협, 국기원, 세계연맹 등 태권도계의 주요 3단체를 장악한 것이다.
김운용은 1986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91차 총회에서 우리나라의 여섯 번째 IOC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입지가 한층 강화됐다. 그때까지 한국의 IOC 위원이었던 박종규씨가 세상을 떠나고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그를 지지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IOC위원으로서 김운용이 남긴 최대의 업적은 태권도를 올림픽 종목에 포함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태권도는 88서울올림픽과 92바르셀로나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채택됐지만 김운용을 비롯한 전 세계 태권도인의 노력으로 1994년 파리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와 함께 대한체육회 회장(제33대),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IOC 라디오·TV 분과 위원장, 국기원 이사장 겸 원장을 맡는 등 그의 국내외 입지도 견고해졌다.
2001년 IOC소식지에 따르면 그는 2000년 국제 스포츠계에 가장 영향력을 미친 인물 1백 명 중 4위에 선정됐고, 2002년 독일 <스포르트 인테른>이 선정한 영향력 있는 국제 스포츠지도자 10위에 오르기도 했다.
김운용의 위상은 2001년 IOC 위원장 선거에 도전하면서 정점을 이뤘다. 당시 상대는 캐나다의 파운드, 호주의 고스퍼, 벨기에의 로게 등이었지만 김운용은 ‘포스트 사마란치’ 적임자로 당선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선거기간 중 솔트레이크 뇌물스캔들 등 ‘도덕성’이 집중 공격당하면서 현 위원장인 자크 로게에게 패하고 말았다. 동시에 IOC 부위원장 자리마저 상실, 그의 국제적인 입지도 약화됐다. 그가 최근 IOC 부위원장 자리에 집착을 보였던 것도 어쩌면 과거의 불명예를 씻고픈 욕심이 앞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운용은 국내 스포츠계에서도 분명한 명암을 드러냈다. 그의 입지가 막강해질수록 일방통행식 단체 운영 경향이 굳어진 데다 주변에서 ‘비리’ 의혹이 함께 싹텄던 것. 태권도계 원로들은 그가 태권도를 세계화하는 등 공을 세운 것은 인정하지만 그로 인해 태권도계가 곪아간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국기원의 한 임원은 “김운용씨가 국내외 태권도계를 좌지우지하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독단 운영을 해왔다”고 말했다. 또한 태권도계에 자기 사람을 심어 ‘비판’을 봉쇄시켜 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 위 사진은 김 의원에게 동계올림픽 유치 실패 책임이 있다 고 주장한 한나라당 김용학 의원(오른쪽)과 자민련 김학원 의원. 아래는14일 김 의원이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 최만립 부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 ||
2001년 10월 말에는 ‘범태권도바로세우기운동연합’(운동연합)이 김운용의 태권도계 비하 발언(“나는 무(無)였던 태권도에서 유(有)를 만들어냈다. 태권도인들을 밥 먹게 해준 것도 나다”)을 문제 삼아 ‘퇴진’ 운동을 벌이는 사태가 있었다.
이듬해인 2002년 2월 그는 아들 김정훈씨가 검찰로부터 대태협 간부들로부터 금품을 받고 그 중 일부가 자신의 계좌로 흘러들어간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태협 회장에서 물러났다.
국내 스포츠계 인사들은 김운용 체제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로 후계자를 양성하지 않은 점을 꼽고 있다. 일방독주로 한국 스포츠계를 이끌다보니 후계자 양성에 소홀, 국제적으로도 한국을 대변할 차세대 인재를 발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운용 IOC 부위원장에 대해서는 ‘스포츠의 대부’ ‘일당백의 외교관’이란 찬사도 있지만 ‘처신의 귀재’ ‘언변의 달인’이란 상반된 평가도 있다.
정가에서는 그가 97년 대선 때 당선 가능성이 엿보인 이회창 후보쪽에 줄을 댄 적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상당수다. 그가 민주당 전국구 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개인적 능력보다는 무시할 수 없는 태권도 인구 때문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그가 최근 동계올림픽 유치와 관련, 구설수에 오른 것에 대해 ‘처신’ 문제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책임’의 단초가 될 수 있는 이상스런 행보를 보인 것도 사실이다.
사정이야 어떻든 그는 동계올림픽유치 실패에 따른 책임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국회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공분은 이미 ‘이성적’ 판단의 범주를 벗어난 듯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김운용 부위원장이 대중의 망각 속에 그만의 신화(神話)를 이어갈지, 아니면 새로운 신화를 위해 용퇴를 할지 그의 선택이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