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천수가 에스파뇰과의 스페인리그 개막 데뷔전 에서 질풍같은 돌파로 공간침투를 시도하고 있 다. 이날 경기에서 최고의 활약을 선보인 그에 대한 현지의 평가는 찬사 일색. 스포츠투데이 | ||
지난 8월31일 바르셀로나 몬주익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2003∼2004 프리메라리가 에스파뇰과의 개막 원정경기에서 이천수는 데뷔 첫 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1-1 무승부를 이끌었다.
첫 단추를 제대로 꿰었다는 안도감에다 스페인 현지 언론으로부터 기대 이상의 극찬을 얻은 탓인지 전화를 통해 만난 이천수는 ‘명랑 소년’ 그 자체였다. 개막전 다음날 휴일을 맞아 모처럼 시내로 쇼핑하러 나왔다는 이천수는 기자와 전화통화를 하면서도 현지 팬들로부터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연신 스페인어로 건네지는 짧은 인사에 가볍게 화답하던 이천수의 밝은 음성에서 ‘인기가 장난 아니다’는 매니저의 말 그대로 뜨거운 현지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스페인 산세바스티안에서 엄청난 관심과 인기 속에 ‘이천수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주인공을 지면에 초대했다.
―프리메라리가의 공식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장식했다. 이천수답게 소감을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경기 전에는 내가, 이천수라는 사람이, 그것도 A매치 출전 경험이 40경기 정도밖에 안되는 선수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리그에 첫 발을 내딛는다는 사실이 굉장한 떨림으로 다가왔다. 한국에서처럼 혼자 축구만 잘하겠다고 생각했다면 아무 걱정이 없었을 것이다.
외국에 나와보니까 이천수라는 타이틀 앞에는 항상 ‘한국 선수’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는 걸 깨달았고 내 행동 하나하나가 한국 사람의 이미지와 연결된다는 사실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첫 게임에서 ‘스페인 축구팬들에게 이천수라는 이름을 각인시켜 놓았다’는 현지 기자들의 평가를 받아냈다. 비록 내 골로 기록되진 않았지만 골을 넣은 것과 다름없는 어시스트였기 때문에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천수는 공식적인 인터뷰에서 사적인 대화로 이어질 때는 “누나, 난 가면 갈수록 더 잘할 자신 있어. 정말이야. 여기서 좀 더 적응이 된 후라면 아주 무서워질 것 같아. 지금의 이 찬사는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사적인’ 자신감을 피력했다. 그런데 그 자신감이 건방지거나 철없어 보이지가 않았다.
▲ ‘골 같은 어시스트’를 기록한 후 선보인 스페인 판 속옷 세리머니. | ||
▲순전 내 실수였다. 골키퍼의 키를 살짝 넘기는 로빙슛을 날렸는데 당시 골문 앞이 선수들로 혼전 상태라 내 발에 의해 골이 들어간 줄로 착각했었다. 관중들도 내 이름을 부르며 환호를 해 당연히 내가 골을 넣은 줄 알았고 한국 팬들에게 약속한 것처럼 언더셔츠 세리머니를 펼친 것이다.
설마 골 세리머니했다고 주심으로부터 경고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비록 내 골은 아니었지만 한국팬들에게 ‘한국축구의 자존심’을 꼭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언더셔츠 세리머니를 보여주기 힘들 것 같다. 여기선 경기 중에 유니폼을 벗는 행위에 대해 경고를 주기 때문이다. 언더셔츠 세리머니는 아쉽지만 7번째를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 같고 앞으로 이천수만이 할 수 있는 골 세리머니를 연구해서 또다른 서비스를 펼칠 것이다.
―동료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처음엔 동양 선수에 대해 그다지 좋은 기대나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을 것 같은데.
▲처음 얼굴을 봤을 때 이 표현이 가장 정확한 반응이었을 것 같다. ‘쟤, 뭐냐?’ 그러다 오스트리아 전지훈련에 참가했을 때는 ‘좀 뛰는데. 그런대로 괜찮네’가 아니었을까. 어제 데뷔전 이후로는 ‘자식 정말 잘하네. 큰소리가 ‘뻥’은 아니었군’이었을 것이다.
첫 훈련 때는 나한테 볼도 잘 안 주고 자기네들끼리만 공을 돌리는 걸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투톱으로 나서서 그런지 나한테 맞추려고 한다. 말수 적기로 소문난 디누엑 감독도 어제 경기 후 최고 평가를 내렸고 나에 대해 신뢰를 보내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스페인 진출 뒤 가장 큰 어려움이 있었다면.
▲외국에서 생활하는 선수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외로움, 향수병 아니었겠나. 아직은 어린 나이고 한국에 있어도 ‘영웅’ 대접 받으며 돈도 벌 수 있는데 뭐하러 고생스럽게 여기 와서 이렇게 혼자 지내나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생각에 머물렀다면 평생 도전과 목표는 없었을 것이다.
고생은 하고 있지만 와 보니까 선수들이 왜 유럽에 진출하려고 애를 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없고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고 내색할 순 없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 큰 자신감과 당당함으로 사람들을 대하려고 노력했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떨리고 긴장돼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야 했다. 그래야 처음부터 무시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스페인에서 ‘아시아의 베컴’으로 더 유명해졌는데 자신과 베컴을 비교한다면 솔직히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실력으로 붙었을 때는 절대 뒤지지 않는다(이천수는 서슴없이 베컴보다 잘할 자신이 있다고 강조했다). 베컴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선수다. 그리고 지금 옮겨간 레알 마드리드는 팀 실력이나 선수들의 개인기가 우리 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즉 주변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고 기죽지는 않는다. 베컴과 난 같은 리그에서 뛰는 선수이기 때문이다.
이젠 ‘아시아의 베컴’이란 타이틀도 듣기 싫다. 이곳 기자들한테도 더 이상 ‘아시아의 베컴’으로 날 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젠 이천수만의 독특한 뭔가를 보여주고 싶고 그걸로 인정받고 싶다.
▲ 이천수에겐 어머니 박희야씨가 현지 적응에 엄청난 원군이다. | ||
▲오버하는 면도 있다. 인정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여기서 자신감을 잃으면 시체다. 한국과는 너무나 다른 축구 수준에다 절로 눈이 돌아가는 선수들의 탁월한 개인기 등을 접할 땐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특히 말도 안 통하고 외로움이 엄습해 오면 ‘튀는 아이’ ‘당돌한 아이’는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때론 오해를 받을 만한 자신감으로 날 흔들고 일깨우려고 하는 것이다.
다소 부담스럽게 들릴 수도 있는 ‘이천수표 자신감’도 때론 스물두 살 어린 나이라는 한계 앞에서 조금씩 흔들리고 무너질 때도 있는 모양이다. 통역을 맡고 있는 박병민씨가 전하는 에피소드 중엔 이런 일도 있었다.
오스트리아 전지훈련을 마치고 이탈리아 인터밀란과 첫 번째 친선경기가 열리기 직전 다른 선수들은 라커룸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있는데 유독 이천수만 가만히 앉아 있는 거였다.
박씨가 왜 옷을 갈아입지 않느냐고 묻자 이천수 왈, “형, 내가 진짜 여기, 이곳에 있는 거 맞아? 혹시 꿈꾸는 거 아니지?” 박씨는 항상 여유 있고 자신만만했던 선수가 연습경기에 처음 나서며 그답지 않게 두려움을 호소하는 모습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말 부탁하고 싶은 얘기다. 만약 유럽에 진출하려는 선수가 있다면 성격부터 적극적이고 외향적으로 바꿔야 한다. 한국에선 나를 가리켜 ‘건방지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이곳에선 오히려 그런 부분이 이곳 사람들에게 제대로 어필하고 있는 것 같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은 이곳에서 살아남기가 어렵다.
―‘이천수의 전성시대’는 언제쯤 찾아올까.
▲지금은 아니다. 앞으로 3, 4년 뒤엔 반드시 그 말이 적용될 수 있게끔 만들어 놓겠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건.
▲놀고 싶다. 나이트클럽도 가고 싶고, 노래방도 가고 싶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고… . 이곳 산세바스티안은 바스크 지방이고 시골 지역이라 유흥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스페인 여자들의 구애 공세가 대단하다고 들었다.
▲벌써 (여자)친구들이 많이 늘었다. 정확한 언어 구사 능력은 떨어지지만 대충 스페인어를 알아듣고 몇 마디 하고 그러니까 친구들이 금세 생겼다. 그런 걸 보면 한국과 스페인 여성들의 남자 보는 눈이 상당히 높은 것 같다(웃음).
한국에서 생활할 때 그라운드 밖 별명이 ‘작업맨’이었던 이천수는 스페인에서도 그 ‘끼’는 숨기질 못했다. 하지만 스페인 여자들과의 ‘썸씽’은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고. 자칫 잘못했다간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기 때문에 철저히 ‘몸 조심’을 하고 있단다.
이천수의 성공적인 데뷔전으로 인해 네덜란드에서 송종국, 박지성, 이영표 등을 취재했던 기자들이 대거 스페인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네덜란드 ‘친구들’이 상당히 섭섭해(?)한다는 후문이다.
산세바스티안의 해변가에 자리한 이천수의 집은 어머니 박희야씨의 맛깔스런 음식 솜씨로 인해 한국 기자들한테 최고의 ‘명소’로 꼽히고 있다. 어머니 박씨는 기자들한테는 물론 현지 팬들한테도 아들의 유명세를 고스란히 이어받으며 또 다른 유명인사로 등장했다고 한다.
이천수는 인터뷰 말미에 “누나도 잘 알다시피 정말 어렵게 이곳까지 왔잖아. 뭔가 큰일을 저질러야지. 그전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거야”라고 다짐하듯 말을 맺었다. 기자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이천수가 ‘성공’하기 전엔 한국에서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