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응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영장 기각 직후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일요신문DB
앞서 검찰은 롯데그룹 비리 의혹의 정점으로 신 회장을 지목하고 혐의 입증에 사활을 걸었다. 수사 초기 단계부터 그룹 총수가 연루된 비자금 조성 가능성을 언급하며 여론을 환기했다. 계열사 간 내부거래 문제, 롯데월드타워 인허가 비리 의혹, 오너 일가의 증여세 포탈 의혹 등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검찰은 롯데 수사가 본격화된 지난 6월 ‘수개월간의 내사로 비리 정황을 일부 확인했다’며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롯데 수사는 신 회장에 대한 영장이 기각되면서 ‘부실 수사’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법원은 검찰이 주장한 총수 일가에 대한 수백억 원대 부당 급여 지급, 부실 계열사에 대한 자금·일감 몰아주기 혐의에 대해 ‘아버지(신격호 롯데 총괄회장) 지시로 벌어진 일로 신 회장과 무관하다’는 롯데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롯데 관계자는 “(검찰 시각과 달리) 신동빈 회장은 신격호 총괄회장이 남긴 ‘구악’을 해소하려 애썼던 분”이라며 “법원 판단을 존중하고 회사가 정상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6월 10일 검찰은 수사팀 인력 250여 명을 투입해 롯데그룹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사상 최대 규모의 인력이 투입된 수사 배경을 놓고 재계 안팎에선 추측이 난무했다. 재계 관계자 중에는 조심스레 ‘롯데가 정권 실세 간 파워게임에 휘말린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낸 사람이 적지 않았다. 파워게임의 두 축으로는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과 최경환 새누리당 의원이 거론됐다.
재계와 사정기관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른바 청와대 내의 특정인맥이 ‘최경환 라인’을 조준해 롯데 수사와 대우조선해양 수사를 동시 기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확인되지 않은 친박 정치인의 금품수수설 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롯데가 박근혜 정부의 사정 타깃이 된 배경과 관련해서는 한 기업인에 대한 ‘봐주기 수사’가 그 출발점이란 시각이 있다. 사정기관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은 한 기업인에 대한 수사 과정에 친박 정치인이 개입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당시 우 수석은 민정수석의 ‘지휘’를 받아야 할 검찰이 특정 정치인과 ‘내통’하고 있다는 보고에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후 우 수석은 지난 1월 검찰 인사권을 발동하는 한편 해당 정치인과 ‘인연’이 있는 롯데에 대한 수사를 기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 수사를 지휘한 이동열 서울중앙지검 3차장 검사는 ‘우병우 사단’의 핵심 인물로 꼽힌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연합뉴스
그러나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 수사는 곧 한계점을 노출했다. 영장심사를 앞두고 만난 사정기관 관계자는 “롯데 수사 착수 당시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의 금품수수 혐의를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첩보가 없었다고 본다”며 “특히 신동빈 회장과 관련해선 소환 시점까지 압수물 분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등 문제가 노출됐다. 영장은 아마 기각될 것이다. 자료가 워낙 방대해 엑셀파일에서 이름을 분류하는 데만 꼬박 며칠이 걸렸다고 한다. 수백수천 명의 협력업체 관계자도 일일이 조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정기관 관계자는 “현재 검찰이 오너 일가에 적용한 탈세 혐의 등은 이미 국세청에서 모니터링을 마치고 징벌이 어려운 것으로 결론내린 사안”이라며 “다른 대기업 오너 수사에서 무죄가 나온 판례가 있고, 일본 세무당국으로부터 자료 협조를 받기 쉽지 않아 수사팀 내부적으로 이견이 많았는데 수사팀 고위 관계자가 ‘어떻게든 만들어내라’고 말해 그대로 밀어붙인 것”이라고 전했다.
재계와 사정기관 관계자들에 따르면 우 수석은 롯데 수사의 명분으로 ‘국부유출’을 주장하며 박근혜 대통령을 설득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당시 친박 정치인 등과 관련한 의혹은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검찰 고위 관계자는 지난 6월 “기업 내부 비리를 밝히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고 특정인(정치인)을 겨냥해 수사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수사 진행 경과를 살펴보면 검찰의 숨은 의도는 신동빈 회장 구속→정치권 금품 로비 규명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롯데 수사의 최종 과녁으로 ‘아버지 신격호’가 아닌 ‘아들 신동빈’을 선택했다. 신 회장이 받고 있는 혐의 가운데는 오너 일가인 서미경 씨와 신영자 전 이사장의 가족회사(유원실업, 시네마통상)에 대한 770억 원대 일감 몰아주기가 있다. 그런데 각각 사건 발생 시점은 2005년께로 신격호 총괄회장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는 사안들이다. 또 신동빈 회장은 2013년 국회 국정감사 등에서 일감 몰아주기 논란이 제기되자 이들 회사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최경환 새누리당 의원. 일요신문 DB
당초 검찰은 신동빈 회장을 구속해 롯데건설이 조성한 비자금 300억 원의 용처를 캐물을 계획이었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신격호 총괄회장은 비자금과 관련한 진술을 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검찰의 관심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가까운 신격호 총괄회장이 아닌 ‘최경환 라인’으로 분류되는 롯데 주요 임원들의 정치권 로비 여부에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시 말하면 처음부터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신동빈 회장을 구속하기 위해 ‘퍼즐’을 맞춰왔다는 것이다.
검찰은 수사 기획 단계부터 ‘신격호 총괄회장’이란 쉬운 길을 버리고 ‘신동빈 회장’을 선택했다. 소환된 계열사 임원들은 그룹의 전반적인 비리와 신동빈 회장의 연관성에 대해 부인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8월 30일 그룹 2인자인 이인원 부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부회장의 죽음은 비자금 의혹 등이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을 높였다.
지난 29일 영장이 기각된 후 검찰은 신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재청구하는 방안 등에 대해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새로운 혐의가 추가로 확인되지 않는 한 영장 발부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전해진다.
재계 일각에선 ‘120일간의 수사로 롯데가 입은 경제적 손해가 막심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여론은 검찰의 수사 의지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 일본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서미경 씨와 신격호 총괄회장의 딸 신유미 씨의 소재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롯데 관계자는 “지난해 신 씨의 아들이 사망하면서 가족이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아는데 정확한 소재는 우리도 모른다”고 말했다. 검찰 역시 서 씨 등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다. 신 회장에 집중하던 검찰은 남은 오너 일가마저 놓치며 출구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