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 위작 논란을 겪으며 국내 미술계 최대 스캔들로 꼽히는 <미인도>. 연합뉴스
# 천 화백 의견 무시한 진작 결정으로 시작된 ‘25년 진실공방’
미인도 위작 논란의 시작은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1년 4월 천 화백이 “미인도는 내가 그린 게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논란은 시작됐다. 당시 언론 기사에 따르면 미인도는 1979년 천 화백이 지인 오 아무개 씨에게 줬고, 오 씨가 다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준 걸 정부가 압류해 문화공보부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에 이관됐다. 천 화백은 당시 “어떤 그림을 오 씨에게 준 건 맞지만 미인도는 아니었다”고 했다. 반면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인도가 맞다”고 주장했다.
이에 국립현대미술관은 화랑협회 산하 감정위원회에 감정을 의뢰했다. 결론은 ‘진품’ 판정이었다. 이경성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은 1991년 4월 12일 기자회견을 통해 화풍과 천 화백 작품에 이용된 동산방화랑의 표구가 장부에 기록돼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이날 이 관장은 “천 화백이 절대 진품이라고 시인하지 않는다”며 “앞으로 위조범이 나타난다거나 가짜로 밝혀질 경우 모든 책임을 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천 화백은 당시 언론 인터뷰에 “목에 칼을 갖다 댄다 해도 가짜는 가짜다”라며 “작가에게 있어 작품은 자기분신이며 따라서 진짜가 가슴에 와닿는 것처럼 가짜도 금방 느껴진다. 시간이 흐르면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천 화백은 절필을 선언하며 큰딸이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정신적 고초를 겪은 것으로 전해졌다.
잊힌 듯했던 논란은 그로부터 24년이 흐른 지난해 10월, 천 화백이 두 달 전 타계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재점화됐다. 차녀 김정희 씨와 그의 남편 문범강 씨가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들 유가족은 위작이라고 추정할 만한 증거로 미인도 소장 과정에 관한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직원의 자필 증언, 미인도에 쓰인 물감이 널리 사용된 물감이라는 것, 미인도 위작 감정에 참여한 위원의 증언, 다른 천 화백의 작품과 비교한 미학적 분석 등을 제시했다.
이후 유가족이 올해 4월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미술관계자 6명을 고소하며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동안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보관 중이던 미인도를 확보해 안료 검사, 엑스레이 검사, DNA 검사 등을 진행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 결과 지난 19일 검찰이 위작 여부 감정을 위해 프랑스 연구팀 ‘뤼미에르 테크놀로지’를 초청했고, 25년에 걸친 미인도 위작 여부가 외국 감정팀 손에 넘어간 것이다.
# “핵심 관계자가 과거 위작 논란 당시 ‘진품’ 판정내린 화랑협회 부회장”
그런데 외국 감정팀이 오기 전부터 갈등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감정 장소로 지정된 서울옥션의 핵심 관계자가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 당시 ‘진품’으로 감정한 화랑협회의 부회장이라는 점 때문이다. 천 화백 유가족 관계자는 “서울화랑 이호재 대표와 천 화백이 적대적인 관계는 맞다”며 “과거에도 미인도 사건이 일어나기 전 천 화백과 위작 논란을 겪은 사람이다. 이후 미인도 사건이 발생했을 때 화랑협회 주도로 감정위원회가 구성되자 감정위원들에게 천 화백에 대한 허위 사실을 공표하고 다녀 미인도 사건 감정에 부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유가족 측은 감정 장소로 서울시립미술관을 추진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립미술관에는 천 화백의 작품 93점이 보관돼 있다. 1998년 천 화백이 큰딸이 있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자신의 주요 작품들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유가족 측은 “(서울시립미술관이) 천 화백이 기증한 작품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분석을 위해선 당연히 그곳에서 감정을 하는 게 맞다”며 “하지만 서울옥션, 그것도 작품이 있는 평창 본사가 아닌 강남에서 진행한다는 데 의구심이 든다. 검찰에서는 주요 작품들이 서울옥션에 있고 정확한 감정을 위해선 그 작품들이 필요하다며 서울옥션에서 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에 서울옥션 측은 1991년 이호재 당시 화랑협회 부회장이 서울옥션 핵심관계자라며 유가족이 제시한 의혹에 대해 “그 부분은 전혀 관계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서울옥션 관계자는 “현재 유가족 측이 언급하고 있는 사람은 경영에서 은퇴하신 분으로 참여 안하고 있다”며 “그런 의혹에 조금이라도 신경 쓰였다면 감정 장소 제공을 안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국내에서 미술품 경매를 가장 먼저 시작하고 미술업계를 선도하고 있는 회사로서 사회공헌 차원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 생각해 장소제공을 한 것”이라며 “감정장소 제공은 사회공헌 차원의 협조일 뿐 다른 뜻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천경자 화백은 국내 근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 위작 논란이 25년째 지속되고 있다. 국민들도 관심이 집중된 사안이고 그런 부분에서 유가족과 검찰에 협조하고자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 위작 논란 결정지을 ‘키(key)’ 쥔 프랑스 연구팀, 국내 미술계 반응 ‘미적지근’
이런 가운데 미인도를 감정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온 프랑스 연구팀 ‘뤼미에르 테크놀로지’가 어떤 감정 평가를 내렸는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연구팀은 3D 다중스펙트럼 카메라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지난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속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 유명세를 탄 바 있다. 감정팀은 모나리자 그림 안에 다른 여인상이 있고, 내부에 눈썹이 숨겨진 점, 다빈치가 파운싱이란 도구로 스케치했다는 것과 모나리자의 시선이 원래는 옆쪽을 향했던 것 등을 알아냈다.
모나리자의 속 그림을 확인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이 카메라는 ‘층간증폭법’을 활용한다. 특수카메라를 이용해 그림에서 반사돼 나오는 빛의 파형을 추적하여 그림을 양파 껍질 벗기듯 살펴보는 기법이다. 이번 미인도 감정에도 이 같은 기술이 활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소장한 천 화백 그림 3점과 서울옥션이 소장한 10점 등 총 14점을 비교분석해 천 화백이 사용하던 붓 종류에서부터 붓질 방법, 물감 종류 등을 파악해 진위 여부가 가려진다.
연구팀은 현재 한국에서의 감정평가를 마치고 지금까지의 감정 과정 보고서를 검찰에 제출한 상태다. 천 화백 유가족 측에 따르면, 19일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 연구팀은 서울옥션에서 약 열흘간의 감정 작업을 마치고 28일 현재 검찰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번 프랑스 연구팀의 감정평가에 대해 국내 미술계에선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원로 대우를 받는 한 미술 평론가는 “개인적으로는 큰 돈 들여 외국에서 감정팀을 데려와 감정한 것이니 위작이든 진작이든 결론이 나면 좋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어느 한 쪽으로 결론이 나도 분명 인정하지 않은 목소리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25년 동안 논란이 지속돼 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25년 동안 어느 한 쪽이 고수했던 입장이 무너진다면 그 자존심과 신뢰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또 다른 미술품 감정 전문가는 “감정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감정사가 누구든 그들의 감정 방식에 대해선 존중한다”면서도 “이들(뤼미에르 테크놀로지)의 감정법은 ‘다중 스펙트럼 고화질 촬영 카메라’를 활용해 그림 그리는 과정을 패턴화해 다른 작품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 수많은 감정법 중 한 가지로 확실히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ilyo.co.kr
수천만원 들여 모셔온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어떤 곳? ‘모나리자’ 속 비밀 밝혀내 유명세 사진출처=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홈페이지 그보다 앞선 2007년에는 같은 기술로 다빈치의 또 다른 명작 ‘담비를 안은 여인’을 분석해 각광을 받았다. 또 평범한 18세기 그림으로 알려졌던 한 그림을 다빈치의 그림이라는 증거를 제시,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문가 마틴 켐프 옥스포드대 교수와 공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아름다운 공주 : 라 벨라 프린치페사>란 책을 내 놓기도 했다. 천 화백 유가족 측은 약 7500만 원의 비용을 들여 이 연구팀을 국내에 데려왔다. 유가족 측에 따르면,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연구팀은 19일 한국에 들어온 뒤 미인도를 비롯해 미인도가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1977년도 천 화백의 진품 여러 점에 대한 고화질 특수 다중스펙트럼 촬영과 디지털화 작업을 마치고 28일 프랑스로 떠났다. 향후 보고서가 나올 때까지 단층 분석 등 다양한 방법으로 프랑스에서 감정이 이어질 예정이다. 이 연구팀은 체류기간 동안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피한 채 기재 설비 설치에만 이틀이 걸리는 등 방대한 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천 화백의 작품 10여 점과 미인도를 촬영하는 시간에만 한 작품 당 2시간 이상 걸렸다고 유가족 측은 전했다. 한편, 연구팀의 감정 결과에 따라 미인도 위작 논란이 세계적으로 알려질 가능성도 크다. 천 화백 유가족 문범강 씨(미국 조지타운대 교수)는 “연구팀은 이번 연구결과를 앞으로 과학 저널에 소개할 의사도 밝혔다. 이는 한국역사에서 가장 말썽이 오래 지속돼 온 미인도 위작 논란의 과학적 결말이 세계에 널리 알려질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이어 문 씨는 “이들 결과는 순수한 광학적, 수학적 수치에 근거하는 것이기에 누구도 반박하거나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감정결과가 진품 또는 위작, 어느 쪽으로 판명이 나든 과학과 수학의 결과이기에 그 결과를 존중하고 수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