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3월7일 한나라당 부총재직을 사퇴할 당시의 강삼재 의원. | ||
이번 파문의 핵심은 지난 96년 총선에서 사용된 한나라당 자금의 일부가 안기부(옛 국정원) 예산 9백70억원에서 전용된 것이라는 의혹에서 출발했다. 강 의원측은 김대중(DJ) 정권이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측근인 자신을 죽이기 위해 98년 초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YS 측근들에 대한 세무조사 등 명백한 표적수사를 벌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은 표적수사의 희생물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강 의원은 총선 당시 쓰인 돈은 안기부 자금이 아니라고 강변할 뿐, 이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강 의원의 ‘침묵’은 한나라당 일각에서 “문제의 돈은 YS의 대선자금 잔금”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오면서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강 의원은 과연 무슨 정치적 계산으로 의원직을 버리고 여의도를 떠나려는 것일까. 강 의원 자신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법원의 결정이지만 국민 앞에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공인으로서 정당한 자세라고 생각한다”고 은퇴의 변을 밝히고 있다. 그의 측근들도 “돈 출처를 끝까지 밝히지 않은 것은 ‘돌쇠의 충정’”이라며 그를 거드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항소심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전술”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일각에선 지금까지 ‘나 몰라라’하며 이번 사건에 눈길을 주지 않았던 한나라당 지도부에 대한 불만의 표시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한편으론 YS의 대선 잔금을 혼자서 막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보고 그 짐을 한나라당과 상도동측에 떠넘겼다는 관측도 나온다.
85년 12대 총선 당시 33세 최연소의 나이로 당당하게 금배지를 달았던 강삼재 의원. 그는 92년 대선에서 YS 대통령 만들기로 화려한 제2의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뒤 그는 DJ 비자금 사건 등의 여파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이제 주군이 남긴 ‘마지막 유산’에 발목이 묶여 스스로 정치와의 인연을 끊으려 하고 있다. 과연 강삼재 의원은 마지막 ‘삼재’를 뛰어 넘고 다시 여의도로 돌아올 수 있을까.
9월24일 아침 강 의원은 목동의 아파트를 나서 ‘안기부 예산 전용 사건’ 1심 선고공판이 열리는 서초동 법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강 의원은 속으로 ‘유죄라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 그동안 받았던 핍박을 생각한다면 속 시원한 일이다. 이번에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홀가분하게 갈 길을 가겠다’고 수없이 되뇌였다.
법정에는 아침 일찍 상경한 고향 친구들과 지구당 관계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3년여 동안 끌어온 1심 재판이 드디어 종착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강 의원은 앞서 검찰로부터 중형(징역 9년, 연대 추징금 9백40억원)을 구형을 받고 난 뒤 재판 결과에 대해 “모 아니면 도”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선고공판이 열리기 한 달 전인 지난 8월 중순 강 의원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높은 구형 때문에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안기부 자금이 아닌 이상 틀림없이 무죄를 확신한다. 16대 국회 들어서 이 문제 때문에 한번도 편하게 지내본 적이 없다”며 심적인 부담감을 드러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강 의원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강 의원은 상경한 마산의 측근들과 주변 커피숍에서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2심을 잘 준비해 꼭 승소하겠다”며 의욕을 보였다고 참석자들은 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갑작스런 정계은퇴의 ‘기류’는 전혀 읽을 수 없었다는 게 지인들의 공통된 의견. 하지만 측근들과 헤어진 강 의원은 홀로 3시간여 동안 ‘장고’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던질 것을 결심하고 컴퓨터에 은퇴의 변을 담담하게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밤늦게 강석진 한나라당 국장과 이장연 비서관 등 측근을 불러 마산행을 지시했다. 강 의원의 ‘결심’을 읽은 두 사람은 끈질기게 번복을 설득했지만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세 사람은 아침 일찍 마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강 의원은 지난 20여 년 동안 자신을 ‘키워준’ 고마운 지구당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결심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강 의원의 갑작스런 기자회견 계획에 대해 지구당 당직자들은 내심 ‘의원직 사퇴’ 정도는 예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회견 10분을 남겨두고 강 의원은 갑자기 당직자들을 모은 뒤 “의원직 사퇴와 정계은퇴를 결심했다. 미안하게 됐다. 이해해 달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 위 사진은 지난 2001년 2월 김영삼 전 대통령 (왼쪽)의 서도전에 온 강삼재 의원. 아래 사진은 지난해 국방부 국감. 그는 시민단 체에 의해 국감 최우수의원으로 뽑혔다. | ||
회견 다음날 강 의원의 회관 사무실은 어수선했다. 보좌관들은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18년 의정생활이 고스란히 담긴 책장 속의 수많은 책들은 국회 도서관으로 실려가고 있었다. 국방위 시절 가지고 있던 수많은 군사비밀 서류들도 파기되고 있었다. 강 의원은 2001년, 2002년 국감에서 국방위원으로 활동하며 시민단체로부터 우수·최우수 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강 의원은 사무실을 정리하던 보좌관들을 모아 놓고 또 한번 “미안하다. 그동안 잘 보좌해서 정말 고마웠다”며 인사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사직서에 자필 사인을 한 뒤 비서관에게 접수시킬 것을 지시하며 다시 어디론가 떠났다. 보좌관에게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 말라. 내가 연락할 때까지 찾지도 말라”며 정처 없는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29일 현재까지 강 의원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다.
강 의원은 원래 등산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골프를 즐겨 했지만 ‘안풍 사건’에 연루되면서 점차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대신 근래엔 서울 근교의 북한산을 혼자 자주 찾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모자를 푹 눌러 쓰든지 아니면 안경을 벗고 산행을 즐겼다는 것. 그리고 1년 전부터는 운전면허도 취득해 주로 혼자 드라이브를 즐겼다고 한다. 강 의원은 전국의 명산은 모두 섭렵했을 만큼 등산을 하면서 안풍의 고민을 해소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지난 24일 기자회견을 한다고 마산으로 간 뒤부터 서울 목동 집에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부인 최정윤씨는 지난 9월26일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가끔 별일 없는지 안부전화를 해온다.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한 일주일쯤 지방에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남편이 등산을 좋아해 차 트렁크에 등산화를 싣고 다니며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녔다. 재판이 시작되고 약 3년 동안 열심히 산행을 다녔다. 그동안 옆에서 봐도 재판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어려운 일을 잘 이야기하지 않아 곁에서 더 고통스러웠다”고 전했다. 강 의원은 지난 9월28일까지 ‘연락 두절’ 상태였다.
강 의원이 떠나고 난 뒤 정치권은 8년 전의 정치자금 문제 때문에 또 다시 홍역을 치르고 있다. 먼저 자금의 출처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YS의 92년 대선 잔금이라는 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YS는 지난 2001년 1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적이 있다. YS는 당시 인터뷰에서 기자의 집요한 질문에 끝까지 강삼재 의원을 방어해주었다.
▲ 강삼재 의원이 제출한 사직서 | ||
─15대 총선 당시 안기부 예산이 선거자금으로 불법 지원됐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92년 대선 때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왔어요. 그때 남은 거 가지고도 충분한데 뭣 때문에 안기부 돈을 받느냐 말예요. 내가 볼 때는 구태여 안기부 자금을 받을 이유가 없어요. 강삼재 의원이 받았다고 하는데 강 의원이 얼마나 깐깐한 사람인데요. 누가 안기부 돈이라고 갖다 주려고 했어도 그 사람 절대 안 받았을 겁니다.(중략)
나는 강삼재 총장이 안기부 자금을 받았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어요. 앞서도 말했지만 강 총장은 참 깐깐한 사람입니다.(중략)
모르지요. …안기부 돈이라는 걸 알면서 강삼재 의원이 받을 리 없다니까요.
─강 의원이 착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거듭 말하지만 강 의원은 안기부 돈이라면 절대 안 받을 사람입니다.
YS는 거듭된 기자의 질문에 단호하게 강 의원을 방어하고 나섰다. 그의 강직한 성품에 신뢰를 보내면서 96년 총선 때 지원된 돈이 안기부 자금이었다면 절대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YS는 인터뷰 뒤 “그 돈이 대선자금 잔금이라고 밝힌 바 없다”며 한발 물러섰다.
YS는 또한 인터뷰 시점과 비슷한 시기인 2001년 1월17일 당시 강삼재 한나라당 부총재를 상도동에 불러 점심을 같이하기도 했다. YS는 이 자리에서 “(안기부 돈 선거자금 유입 사건과 관련해) 이번 문제는 나와 김대중씨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YS는 강 부총재에게 “그동안 현 정권의 공작으로 고생이 많았다. 용기를 갖고 싸워달라”며 격려했고, 강 부총재는 “끝까지 꿋꿋하게 싸우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 의원이 당시 집권당의 사무총장으로서 막강한 파워를 휘두르고 있었고 YS는 그 자금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한 배’를 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 외에도 두 사람의 ‘끈’이 웬만한 바람에 끊어질 정도로 약하지 않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지역구 사람들은 이번 강 의원의 정계은퇴를 대체로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도, YS와 관련된 자금설에 대해서만은 함구로 일관하는 강 의원을 ‘의리의 돌쇠’로 지칭하며 긍정적으로 평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제2의 장세동·박지원’이란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런 배경 위에서 강 의원의 정계은퇴를 바라보면 그의 ‘YS 감싸기’는 더욱 명확해진다. 강 의원은 그동안 직·간접적으로 한나라당으로부터 문제의 돈이 YS의 대선 잔금이라는 ‘언급’을 해주기를 요청받았으나 이를 끝까지 거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은퇴’라는 방패로 YS에게로 날아가는 화살을 막고 그 화살을 대신 한나라당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마산 지구당의 한 당직자는 “YS를 법정에 세울 경우 의리를 저버릴 수도 있고 특히 정권 차원에서 이루어진 선거자금을 공개할 경우 정치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을 우려한 측면도 없지 않아 보인다”고 밝히고 있다. 한나라당은 그동안 대표 경선 등으로 이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하다가 이번 강 의원 파문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 됐다. 당 지도부는 ‘YS가 증인으로 나서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게 해야만 내년 총선에서 안기부 총선 자금 유용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내에 친 YS 인사들이 많이 포진해 있어 당 지도부의 속내대로 문제가 쉽게 해결될지는 미지수다. 최근 법사위 국감에서 홍준표 의원이 ‘안풍자금은 YS 대선 잔금’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홍사덕 총무가 “지금 문제된 자금과 연계해 YS가 연루된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비약일 뿐 아니라 증거도 없는 얘기”라고 서둘러 진화한 것도 한나라당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홍 총무는 “내가 아는 한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이래 재계로부터 단 10원도 받은 적이 없다”면서 “증거도 없는 일을 갖고 전직 대통령의 명예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우리 입장은 그냥 법리 논쟁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가 있기 때문에 부담이 크다. 재판에서 이기는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다. 안기부 자금이 아니라는 것만 입증하면 된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지 그것이 문제다”고 말했다. 강삼재 의원은 제 손으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을 결국 포기하고 모든 것을 던져버렸다. 하지만 한나라당에서는 강 의원의 의원직 사직서 수리를 거부하며 계속 그에게 방울을 달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과연 강 의원은 정치인생의 마지막 ‘삼재’를 사뿐히 넘을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YS의 ‘입’이 모든 걸 말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