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교수는 20대 후반이던 지난 73년에 이미 노동당에 입당한 ‘당원’이었다. 또한 지난 91년 5월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북한 노동당 서열 23위인 정치국 후보위원 겸 당 중앙위원으로 선임됐고 지난 73년 9월부터 지난 3월까지 18차례에 걸쳐 입북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북한으로부터 최소 10만달러 이상의 ‘공작금’ 내지는 ‘연구비’를 받았다. 이밖에 국정원이 검찰에 보낸 2천 페이지의 조서에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X파일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번 파문이 한국 사회의 막강한 보수층에게 매카시즘적 마녀사냥의 빌미를 주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걱정들도 송 교수의 학자답지 못한 처신에 가려져 그 빛을 잃고 있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노동당 가입과 김철수 논란 등 ‘팩트’에 대해서조차 계속 거짓말을 해왔다. 국민들 대다수가 이번 사건에 대해 엄정한 법 처리를 요구하고 있는 주된 이유다(대부분의 네티즌 여론조사 결과 60~70%가 찬성).
또한 송 교수가 국정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굳이 한국에 제 발로 찾아와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했던 이유도 석연치 않다. 일부에서는 정부의 ‘호의적’ 인사들이 그의 귀국을 위해 노력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지난해에도 분위기가 성숙했지만 귀국하지 않은 점을 가정하면 그가 자신 있게 귀국한 배경에 뭔가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남과 북의 ‘경계인’에서 자칫 영원한 우주의 미아로 전락할 위기에 빠진 송두율. 그의 알려지지 않은 30년 ‘활동’을 따라가 봤다.
지난 10월2일 오후 2시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송두율 교수는 미리 준비한 ‘그간의 활동에 대한 자성적 성찰’이라는 기자회견문을 어눌한 한국말로 읽고 있었다. 귀국할 때의 ‘당당한’ 목소리는 이미 찾을 수 없었다. 지난 며칠 사이 그를 둘러싼 온갖 ‘거짓말’들이 탄로났기 때문일까. 황망한 표정으로 회견문 위의 글자들을 쫓는 그의 시선에는 37년 만의 귀국에 대한 회한이 서려 있었다.
“사죄할 것은 사죄하고 해명할 것은 해명하고 실정법적인 처벌을 받을 사항이 있으면 감당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의 참여자가 되어 남북 모두를 끌어안는 화해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한국 땅에서 새로운 삶을 다시 열고 싶어했던 그의 바람이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귀국 초반만 하더라도 공소보류 등의 ‘관대한’ 처분이 내려질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그의 ‘속살’들이 하나둘씩 드러나면서 구속기소나 국외추방 등의 강경 기류가 자리잡고 있다. 송 교수는 이럴 경우 남과 북 어느 나라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회색의 광장’에 홀로 남겨질 운명에 처해 있다. 58년 송두율의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송두율은 해방 전인 1944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약 2년 동안 살다가 해방을 맞아 서울로 왔다. 아버지 송계범씨가 경성제국대 후신인 경성대학의 교수로 근무하면서 그도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겪고 난 뒤 아버지 송씨는 전남대 물리학 교수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송 교수는 아버지를 따라 전남 광주로 이주해온 뒤 중앙초등학교와 서중을 다니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민족문제’라는 화두에 매달리게 된 것도 소년시절 노닐던 광주의 충장로가 핏자국으로 얼룩진 80년 5·18이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송 교수가 어린 시절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집안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송 교수는 올해 초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집의 분위기가 아버지가 물리학을 하셔서 토론을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한때 물리학을 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송 교수는 그 뒤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마친 뒤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김지하 김정남 등과 교분을 쌓으면서 민족문제와 사회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67년 약관 23세에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그때만 해도 독일로 유학 가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송 교수의 부친은 물리학 교수이자 기계를 발명하는 발명가였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도 나름대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60년대에 유학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 지난 2일 송두율 교수가 국정원 조사와 관련, 기자회견을 하는 도중 답답한 듯 눈을 감고 있다. 임준선 기자 | ||
송 교수는 독일 유학 5년 만인 72년(28세)에 프랑크푸르크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 교수 자신도 예상 밖으로 일찍 학위를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리고 72년부터 뮌스터대 사회학과에서 처음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77년부터 84년 사이에는 베를린 자유대에서 계속 강의를 했다. 송 교수는 보수적인 독일 사회에서 인문사회학자로는 한국인 최초로 ‘교수’로 강의를 하는 행운을 누렸다.
‘철학박사’ 송두율에게 73년은 매우 의미 있는 해였다. 당시는 유신 때문에 정국이 매우 불안하던 시기였다. 민청학련 사건, 그의 친한 친구였던 김지하의 사형 선고 등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송 교수는 민주화가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고국의 민주화 운동을 해외에서 지원하고 국제사회에 한국의 정치 실상을 정확하게 알리는 데 힘을 쏟게 된다. 그래서 74년에는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만들어 유신 독재에 항거하며 활발히 반체제운동을 벌여나갔다.
또한 남한의 유신체제에 분노를 느끼던 송 교수는 자연히 북한의 주체사상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한국에서는 유신과 독재 체제가 횡행하고 있었지만 북한이 당시 다소나마 경제적 발전을 이루며 서구사회의 관심을 받게 되자 북에 애정의 눈길을 돌리게 됐다. 바로 이 시점에서 그의 노동당 입당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송 교수는 박사학위를 받은 이듬해인 1973년 9월 북한 노동당에 입당하게 된다. 국정원 조사 결과 송 교수는 1973년 9월 독일 거점 북한 공작책 이재원(71)에게 포섭돼 모스크바를 거쳐 입북, 2주간 초대소에서 주체사상 학습 및 공작원 교육을 받고 노동당에 가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현재 송 교수는 노동당 입당과 주체사상 교육은 1970년대 북한 방문자들에게는 ‘불가피한 통과의례’였다고 해명하고 있다.
이때부터 송 교수는 북한과도 ‘호의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그는 73년 독일 유학생 포섭 및 조국통일사업을 위한 지식인 중심의 조직 결성 등의 지시와 함께 1천달러를 받은 것을 비롯해 74년 3월에는 독일에서의 활동을 보고한 뒤 다시 돈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91년 5월 김일성 주석 면담 이후 95년까지 독일 내 공작원을 통해 연구비 등 명목으로 매년 미화 2만∼3만달러를 수수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은 송 교수의 북한 자금 수수가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송 교수는 유학 초기만 해도 부친의 도움으로 비교적 어렵지 않게 살았지만 점차 생활도 쪼들리게 됐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 발표 이후 서울에 있는 가족들이 ‘인질’이 되어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 또한 송 교수가 해외에서 반체제 운동을 활발하게 하면서 부친의 회사도 문을 닫는 등 서울의 가족들도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한다.
당시 송 교수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부인이 옆에서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독문학과 도서관학을 전공한 그의 부인은 현재도 베를린예술대학 영상연구소에서 사서로 근무하고 있다. 정형근 의원은 이와 관련해 “송 교
수가 수입원이 없으며 북한의 공작금으로 사는 공작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송 교수는 91년 5월 입북했을 때 묘향산 별장에서 김일성 주석과 면담했다. 특히 그는 94년 7월 김일성 사망 때 북한의 독일 주재 이익대표부에 있는 북한 공작원 김아무개(지난 99년 미국에 망명)로부터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장의위원에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고 북한에 입북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송 교수는 올해 3월 방북하기까지 모두 18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송 교수가 한국의 통일운동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광주민주화운동 이후부터라고 전해진다. 광주의 민주화 열망이 총칼에 유린당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경험한 뒤 그는 한국의 민주화에 더욱 힘을 쏟게 된다. 송 교수는 남과 북의 냉전 체제가 허물어지고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한국에서의 민주화도 성공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래서 91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지난 95년 이후부터는 베이징에서 남북해외학자 회의를 정기적으로 주도하고 학자들 간의 교류를 계속 추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송두율 교수의 친북 활동 논란은 우리 사회를 또 다른 진보 대 보수의 대결구도로 내몰고 있다. 지난 82년부터 98년까지 일본에서 반체제활동을 하다가 귀국한 A씨는 송 교수의 친북 활동에 대해 “학자가 자신의 이론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직접 ‘현장’을 방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해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성숙하는 좋은 계기로 삼길 바란다”고 말했다.
송 교수 본인은 비록 전향의사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한국사회에 학문적으로 기여하고 싶다고 희망한다. 그는 37년 동안 계속 ‘경계인’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한국에 정착해서 후세들에게 자신이 직접 체험한 남과 북의 장단점을 들려줘 통일의 밑거름으로 삼고 싶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처벌을 감수하고라도’ 오랜 타국 생활을 청산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송 교수는 독일에서 활발하게 반체제운동을 했지만 정작 교민사회에서는 그리 환영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송 교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 한 기자는 “교민사회에서는 송 교수가 왕따 분위기다. 독일 교민들은 대부분 옛날에 광부나 간호사로 온 사람들로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많다. 그래서 송 교수와 교민사회는 교류가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송 교수가 그쪽에 쉽게 발을 못 붙이는 이유다”고 말했다.
앞서의 반체제인사 A씨는 “반체제 활동하는 사람의 사회적 활동은 굉장히 제한된다. 인간관계도 거의 없어 외로워진다. 서울에서 친구들이 찾아와도 불이익을 겪을까봐 쉽게 찾아오지도 못한다. 그러면 자연히 옛 친구들과도 멀어지게 된다. 깊게 사람을 사귀는 것이 어렵다. 송 교수도 이런 점들을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 그렇게 귀국하려고 애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검찰의 조사가 어떻게 마무리되든 한반도의 냉전구조 속에서 희생된 한 지식인의 ‘수구초심’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다. 하지만 송 교수가 입국한 뒤부터 계속 자신의 과거행적에 대해 거짓말을 한 부분에 대해서는 도덕적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지난 98년 7월 ‘송두율 교수=북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는 황장엽씨(전 북한노동당 비서)의 주장은 그동안 송 교수가 쌓아놓은 연구성과의 순수성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그러나 송 교수가 “황씨의 주장은 상상도 못하는 얘기”라며 법적으로 대응하자 일부에서는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나마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한국의 진보학자들조차 그의 거짓말이 밝혀지자 지극히 실망스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 독일 뮌스터대에서 송 교수의 지도를 받았던 김양현 교수(전남대 철학과)는 “독일에서 7년 동안 가까이 모시며 북한에 두 차례 방문한 것은 알았지만 그 정도로 북한과 가까웠는지는 몰랐다. 실망스럽고 당혹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앞서의 A씨는 이에 대해 “그 점은 송 교수 자신도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것이다. 며칠 새 말이 자꾸 바뀌니까…. 아직 구체적인 조사가 필요하지만 그의 도덕성에 금이 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남북관계를 오랫동안 취재해온 전직 기자 B씨는 “솔직히 아직도 그가 김철수가 아니길 바란다. 이번 파문을 계기로 해외에서 어렵게 민주화운동을 해온 사람들마저 도매금으로 몰리는 것 같아 더 마음이 아프다”고 지적했다. 송두율. 37년 만의 귀국에서 그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