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위 시정 권고로 1조대 사업 무산되고도 ‘지속’
[일요신문] 방위사업청이 해군 함정건조업체에 대한 관리·감독 업무인 ‘감리’를 용역 업체에 맡기면서도 법적 책임은 부여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용역 업체는 해군이 선박을 인수한 이후 문제가 생기거나 비리가 발견돼도 별다른 책임이 없다. 여기에 일부 사업에서는 아예 방사청이 관리·감독을 받아야 할 조선소에 일부 생산관리감독업무 용역 업체 선정을 위임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다’는 지적도 나올 정도다. 특히 지난 2014년 방사청 고유 업무를 위임·위탁한 것은 위법이라는 국민권익위원회의 판단에 따라 약 1조 원대의 함정사업이 무산됐음에도 방사청은 위임·위탁 업무를 지속하고 있었다.
방위사업청이 해군 함정건조업체에 대한 관리·감독 업무인 ‘감리’를 용역 업체에 맡기면서도 법적 책임은 부여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정민규 기자 ilyo33@ilyo.co.kr
‘감리’란 발주자를 대신해 공사 및 선박 건조과정 전반을 감독하는 것을 말한다. 감리자 또는 감리 업체는 직접 현장을 찾아 설계대로 공사가 진행되는지, 관련 법규와 계약 조건을 위반하지 않고 잘 지키고 있는지 감독하며 품질관리, 안전관리 등에 대한 기술지도도 맡는다.
현재 정부·지자체 등은 감리 전문회사에 대규모 건축, 토목 공사 등에 대해 ‘책임 감리’를 맡기고 있다. 부실 공사와 각종 비리를 막는 한편 품질 향상을 위해 점차 강화되는 추세다. 관리·감독 전권을 감리 전문회사에 주는 대신 품질불량에 대한 사후 엄격한 법적 책임을 부여한다.
민간 선박 건조 감리도 건설 감리와 비슷하다. 대표적으로 한국선급(KR)과 영국계 감리회사 등이 발주자를 대신해 감리를 맡고 있는데, 소규모 사업이나 부품 등을 제외하면 앞서의 책임 감리제를 활용하고 있다. 현장에서 관리·감독한 감리 회사의 승인 없이는 선박 인수 자체가 불가능하다.
반면 방사청은 해군 함정 등 군 선박 감리를 용역 업체에 맡기고 있으면서도 감리결과에 대한 책임은 부여하지 않고 있다. 지난 2015년 9월 14일 제정된 ‘함정사업 감리 업무지침’을 보면, 방사청은 “용역 업체와 계약을 맺고 함정 무기체계 전 과정에 걸쳐 방위사업법령, 계약조건 등에 맞게 함정이 설계되고 건조되는지 관리·감독 지원 업무를 수행한다”고 명시했다.
용역 업체가 현장에서 직접 해군 함정 건조 및 관리사업 등에 대한 관리·감독 업무를 할 수 있도록 계약을 체결했으면서도, 책임이 아닌 ‘지원 업무’로 분류한 것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업계, 방사청 내부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감리 용역 업체는 관리·감독 보고서를 주기적으로 방사청에 제출 및 보고하고, 이에 대한 판단과 승인은 방사청에서 하고 있다. 즉, 현장 감독을 하지 않는 방사청이 용역 업체가 작성한 보고서만으로 함정 건조 및 관리 과정을 판단한다는 얘기다.
방사청의 이런 감리 용역이 선박 부실 건조와 방산 비리를 막고 품질을 향상하기 위한 감리제도의 원래 취지, 목적과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감리 용역 업체가 실수를 하거나 다른 의도를 품을 경우, 보고서를 토대로 브리핑만 받는 방사청이 이를 확인하고 적발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주장했다. 방사청의 최근 5년간 감리제도 적용 사업을 보면, 장보고함을 비롯해 다목적 지원정, 예인정, 대형수송함 건조 등 18개 사업에 감리를 이러한 형태로 수행했다.
여기에 관리·감독을 수행하는 업체 선정 권한 자체를 선박건조 업체에 위임한 경우도 있다. 방사청이 시행하고 있는 과학적 사업관리기법이다. 이 기법은 방위력 개선사업의 효율성과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개발된 시스템의 일종으로, 사업 일정과 비용 등을 관리하는 사업성과관리(EVM), 사업 추진 중 목표비용과 실제 사용 비용의 편차를 분석하는 목표비용관리(CAIV), 사업 전반과 향후 효과를 측정·평가하는 모델링·시뮬레이션(M&S)으로 구성돼 있다. 방사청은 이 시스템을 지난 2006년 한국형헬기사업(KHP)에 최초로 도입한 이후 일부 사업에만 적용해 오다 지난해 4월 ‘방산비리 예방과 근절 및 사업비 절감 확보’를 위해 적용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그런데 방사청은 과학적 사업관리 시스템을 방사청이 직접 관리·감독하지 않고 있다. 방사청은 사업 범위를 넓히는 과정에서 일부 사업에 대해 용역 업체를 선정, 이 시스템을 운용 중이다. 문제는 앞서의 선박 감리와 달리 계약 상대자, 즉 조선소에 과학적 사업관리 용역 업체 선정 권한 및 관리를 위임·위탁했다는 점이다. 한 방산 전문가는 “관리·감독을 받아야 할 조선소가 직접 관리․감독 용역업체를 선정하고, 이 용역업체가 조선소를 관리․감독하고 있다. 계약 관계로 볼 때 ‘을’이 ‘갑’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라며 “제대로 된 감독이 될지 의문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방사청 관계자는 “과학적사업관리 수행지침(청 예규 제257호)에 따랐다”고 해명했다. 실제로 과학적사업관리 수행지침을 보면 ‘사업관리기관은 필요시 해당 업무를 외부 기관에 위탁해 수행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이는 방사청이 별도로 마련한 지침에 불과할 뿐, 이런한 위임·위탁은 방위사업법 위반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의 감리 용역 업체 선정과 과학적 사업관리 용역 업체 선정 자체가 모두 위법이라는 얘기다. 방위사업법 제61조 2항을 보면, 방위사업청장은 권한의 일부를 국방과학연구소장 및 국방기술품지원의 장에게만 위탁할 수 있다.
특히 방사청은 이 법령을 위반해 약 1조 원대 사업의 일부 추진 과정(사업추진방법 결정)을 무산 시킨 경험이 있으면서도 이런 위임·위탁을 수행 중이다. 문제가 된 사업은 지난 2008년 10월 합동참모회의에서 새로 도입하기로 결정된 특수침투정/지원함 획득 사업이다. 총 규모는 9152억 원으로 사업 기간은 10년으로 결정됐다.
그런데 방사청은 이 과정에서 건조 업체에게 1220억 원 규모의 특수침투정의 사업추진방법(국외구매 또는 연구개발 여부 판단 권한)을 위임했다. 건조 업체는 구매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국내에서 연구개발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뒤, 더 높은 가격으로 수입산을 들여오기로 결정했고, 이에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 2014년 “방사청이 사업 추진방법을 계약업체가 결정하도록 한 것은 방위사업법 위반”이라며 시정 권고를 내렸다.
결국 이 때문에 특수침투정을 국외에서 구매하기로 한 결정은 취소됐다. 최근 확인한 바에 따르면 방사청은 특수침투정에 대한 사업추진방법을 위임·위탁에서 국내연구개발로 변경했다.
이런 위법한 위임·위탁 논란에 대해 방사청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방사청 한 내부 관계자는 “감리의 경우, 방사청 개청 전(국방부 조달본부)에는 해군에서 감독관을 조선소의 함정건조 현장에 파견해 건조단계 전반을 직접 관리·감독했다”며 “방사청 개청 후 현장감독관제도가 없어졌는데, 모든 사업 현장에 방사청 인원을 직접 파견할 수 없어 감리제도를 활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방산 전문가는 “올해 초 방사청이 낸 감리 용역 입찰 공고를 보면, 이 사업 비용이 6억 2000만 원에 달했다. 인력 부족이 문제라면 이 비용으로 전문인원을 충원하여 직접 파견하는 등 감리예산으로 충분히 적절한 대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며 “관리·감독에 대해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면 인원보강 등 선행 노력이 있어야 한다. 책임 없는 관리·감독은 방산비리 근절뿐만 아니라 예산 절감이라는 취지 자체를 무색하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