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임현식이 살짝(?) 웃기만 해도 여기저기서 킥킥대는 소리가 난다. 연기자들은 물론 스태프들마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촬영장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다. 잠시 동안 촬영이 중단될 정도로 임현식의 ‘웃음파워’는 주변을 압도하고 만다. 잠깐 휴식∼(현장 사람들 모두에겐 웃음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하다).
지난 23일 <대장금> 촬영이 한창이던 MBC 의정부 세트장의 모습이다. 임현식은 <대장금>에서 수랏간 숙수 ‘덕구’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치고 있다. 숙수란 당시 궁궐 내 음식을 만들던 남자요리사. 이날 촬영장면을 통해서도 임현식이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잠깐 동안의 촬영이었으나 그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언제나 상대배우를 편하고 즐겁게 만드는 연기자 임현식. 웃음을 가져오는 묘약이라도 있는 걸까. 임현식의 연기에는 언제나 웃음과 해학이 담겨있다. ‘애드리브의 달인’ ‘감초 연기자’ 등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닉네임을 갖고 있기도 한 그를 <대장금> 촬영장에서 만났다. 연륜이 묻어 있는 그의 연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시간이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의정부 세트장에는 수십 명의 연기자와 제작진들이 모여 있었다. A팀과 B팀으로 나누어 진행되고 있는 <대장금> 촬영은 전날 밤샘에 이어 이날도 철야를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자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모두들 피곤한 기색보다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얼굴에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스태프들 사이로 임현식의 모습이 보였다. 왜 다들 웃고 있었는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았다.
때마침 요리하는 장면을 촬영중. 임현식은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곁에서 구경하던 이희도(최판술 역, 장금을 괴롭히는 악역으로 등장한다)가 “이거 이 팀 때문에 우리 팀이 촬영을 못하고 있잖아∼”라며 딴죽을 건다. 임현식과 절친한 사이인 이희도의 ‘방해작전’(?)에 이번엔 임현식이 웃음을 터트리며 NG를 내고 만다. 같이 웃던 이병훈 PD. “저리 좀 가 있어. 웃겨서 촬영이 안되잖아.”
잠시 뒤 ‘덕구’ 임현식과 ‘장금’ 이영애의 신이 이어졌다.
덕구 : 자 쓸개다. 이 쓸개를 먹으면 미각을 잃은 사람의 미각이 다시 돌아온단다.
장금 : (맛을 보며 얼굴을 찡그린다)
덕구 : 쓰지? 쓰니까 쓸개지∼.
컷! 잠시 뒤 이병훈 PD의 큐 사인이 떨어지자 같은 신이 반복된다. 그런데 대사가 어딘가 이상하다.
덕구 : 자 쓸개다. 이 쓴 것을 먹으면….
임현식의 애드리브는 ‘쓸개’를 금새 ‘쓴 것’으로 바꿔놓았다. 그런데 이병훈 PD가 “진지하게”라며 제동을 건다. 이번 애드리브는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던 것. 촬영을 구경하던 한 시간 동안 이 PD의 ‘연기지도’는 그 한 번뿐이었다. 여러 편의 작품을 함께 해온 두 사람은 눈빛만 봐도 뭘 말하는지 알 수 있는 사이다.
인터뷰 약속시간을 이미 한참 넘겼지만 기자는 그저 묵묵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지는 무렵, <대장금> 속 덕구의 모습 그대로인 임현식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한 시간여의 인터뷰 동안 느꼈던 화면 밖의 임현식은 덕구와 같기도 하고 또 다르기도 했다(진지하면서도 유머가 있었으며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는 대답들에는 그의 인생관과 연기관도 묻어났다).
▲ 이병훈 PD | ||
▲어휴, 어느 새 그렇게 됐어? 감회랄 게 뭐 있나. 그저 꾸준히 열심히 하다보니 여기까지 온 거지(웃음).
─<대장금>의 인기요인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요즘 사극 엄청 나오잖아. 각 방송사마다 다하고 있고 하나 끝나면 또 이어서 하고. 그런데 <대장금>은 좀 다르지. 궁중의 최하위의 사람들 얘기 아냐.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사람들을 다룬 첫 작품이라고 볼 수 있지. 역사 속의 주인공들만 다루던 다른 사극하고 다르잖아. 궁녀들 중에는 굶어죽을 수 없어 들어온 애들도 많구, 왕 하나만을 바라보며 평생 수절하며 살아가는 거지. 장금이라는 여자의 삶 자체가 매력적이야. 10대들에게도 교육적 메시지를 준다고 봐.
─연기를 즐기면서 하는 것이 느껴진다. 당신에게 연기란 어떤 의미인가.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웃음). 이제 연기는 너무 편안하고 익숙한 거지. 난 그렇게 생각해요. 연기는 ‘타당성이 있게’ 해야 해. 대사나 달달 외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덕구란 사람 속에서 연기를 하는 거지. 적당히 폼만 잡으면 타당성이 없어. ‘제3의 인물’을 만들어 내는 재미가 대단해. 그 맛에 연기를 하는 거지, 뭐.
─매번 비슷한 캐릭터를 맡는다는 지적도 있는데.
▲나도 사람들이 식상해 할까봐 걱정과 고민을 많이 해. 이번 역할은 또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허준>의 ‘임오근’하고 <대장금>의 ‘덕구’를 비교해봐. 연기의 기본색은 비슷하겠지만 뭔가 다른 모습을 만들려고 연구하는 게 느껴지지 않나(웃음).
─애드리브 분야에서는 더 이상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혹시 애드리브도 연습하는지.
▲음…. 대본은 밥상과 마찬가지야. 밥상을 받으면 반찬도 있고 국도 있고 그렇잖아. 국을 떠먹었는데 내 입맛에는 좀 싱거워. 그러면 간장을 한 반 숟갈쯤 넣어보는 거지. 이 ‘간장 반 숟갈’이 바로 애드리브야. 그런데 내 입맛만 고집할 순 없잖아. 감독 입맛에 아니다 싶으면 소금도 넣어보고 그러는 거지. 연기자는 여러 가지 양념을 준비하면 선택은 감독의 몫이야. 응, 근데 뭘 물어봤지? 어, 애드리브 연습? 하지. 대본을 보며 한 3분의 2쯤 만들고 나머지 3분의 1은 현장에서 즉석으로 하지.
─기억에 남는 애드리브가 있다면.
▲어유, 이거 하도 많아서(웃음).
─다른 연기자들과 달리 촬영장 분위기를 띄우려고 애쓰던데 힘들지 않나.
▲난 그래. 아무리 밖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일단 여기 오면 첫인사는 밝고 명랑하게 해. 그게 편하고 좋아. 일부러 농담을 하기도 하고 그래. 스트레스 때문에 나도 담배 하루에 한 갑 정도 피우거든. 이 바닥이 담배 안 피울 수가 없게 생겼어. 우리나라 방송 여건이 항상 촬영이 빡빡하게 진행되니깐. 다들 힘든데 나라도 재미있게 해줘야지.
─작품 선택에 어떤 기준이 있는지.
▲나를 원하는 작품이 있으면 마다하지 않지(웃음). 난 솔직히 감초 같은 연기자란 말을 싫어해요. 어디서나 필요한 존재라는 뜻이지만 감초맛은 하나잖아. 다양한 맛을 내는 연기자가 좋은 거지.
─이병훈 PD와는 오랜 시간 함께 일해왔는데.
▲이병훈 PD와는 MBC 입사 동기예요. 이 감독은 옛날 운동화 신고 뛰던 조연출 시절부터 봐왔지. 내가 이 감독 작품은 거의 다 했지.
─그럼 새 작품이 들어갈 때 미리 섭외가 들어오겠다(웃음).
▲그렇지. 이 감독이 작품 한다고 하면 내 배역은 아예 염두에 두고 한대(웃음).
임현식은 자신이 ‘악기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다양한 소리를 내고 싶다는 의미였다. ‘미’도 내보고 ‘솔’도 내보는. 그런데 제일 듣기 싫은 말이 ‘감초 같은 연기자’라니 의아했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듣고서는 연기에 대한 그의 지론을 엿볼 수가 있었다. ‘애드리브도 연습한다’는 것 또한 흥미로운 사실.
─주연에 대한 욕심은 없나.
▲있지. 있는데 내가 하고 있는 역할도 인기 좋고… 출연료는 적지만(웃음). 그래도 나 같은 사람도 주인공이 되는 작품이 나와야 해. 그동안 너무 식상했잖아. 그래서 틈만 나면 나를 주인공으로 쓰는 작품을 만들라고 얘기하고 다녀. 여기저기 섭외하라고 강요하고 그래. 껄껄.
─그렇다면 주인공으로 맡아보고 싶은 역은. 예를 들자면 김두한이나 왕건 같은.
▲나는 역사인물은 맞지 않아. 날 봐. 최불암은 이승만 대통령을 할 수 있지만 난 도대체 닮은 사람도 없고. 난 이런 역 한 번 해보고 싶어. 한 손엔 술잔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여자를 끼고 그리고 입엔 담배를 무는 거야. 야∼, 그럼 가장 행복할 거 같애. 그런 호탕한 인물을 맡으면 아주 잘 할 것 같은데 말야. 누구나 실수를 하잖아? 똑 떨어진 인물은 매력 없어.
─혹시 파격변신을 할 생각은 없나. 베드신 촬영 같은 거 말이다.
▲난 뭐든지 할 의향이 있어. 그런 것 좀 시켜달라고 내가 먼저 얘기하는데(웃음). 자신도 있고 말야. 우리들도 그런 것 좀 해줘야 해. 멜로 연기도 꼭 해보고 싶어.
▲나도 여배우들 좋아하고, 그들도 다 날 좋아해. 내 또래나 젊은 친구들이나. 근데 내가 한 여자하고만 친하게 지내면 다른 애들이 질투해서 안돼(웃음).
─첫 키스신은 언제였나.
▲한 7∼8년 전 <베스트극장>에서 젊은 배우랑 처음 해봤어. 그 배우 누구였더라. 좀 있다가 (TV에) 안 나오대.
다소 ‘센’ 질문에도 임현식은 재치 있게 대답을 이어갔다. 여느 배우들과 달리 ‘상대’하기가 너무 편안해 마치 옆집 아저씨랑 얘기하는 것 같았다. 기자 역시 그가 화면 속의 모습과 비슷하기를 못내 바라고 있었나 보다. 그의 평소 모습이 궁금해졌다.
─혼자 있을 때는 어떤 모습인가.
▲난 혼자 있을 때랑 둘이 있을 때, 셋이 있을 때 또 달라져. 그동안 너무 남의 인생만 산 거 같아 혼자 있을 때는 나 자신을 돌아보려고 애를 많이 써. 특히 연기자라는 직업이 뭔가를 계속 흡수하지 않으면 안되거든.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지지. ‘애드리브의 샘’을 찾아서 항상 노력하지(웃음).
─그 노력이란 대체 어떤 방법인가.
▲나는 책을 많이 읽으려고 해. 근데 요즘 시는 안 읽어. 흘러간 명시를 좋아하지. 명언집도 많이 읽고. 호머(호메로스)나 소월 시를 좋아해. 김동리의 단편소설도 좋고. 그 속에서 내가 연기에 응용할 부분을 찾지. 책 읽을 때마다 내가 주인공이 돼서 말이야, 허허.
─오랜 연기생활 동안 ‘IMF’를 느꼈던 적은 없나. 위기의식 말이다.
▲왜 없었겠어. 연기자는 6개월만 쉬어도 위기감을 느껴. 끊임없이 자기개발을 해야 해. 그래도 아직까지 여기저기서 불러주니 고맙지.
─주량은 얼마나 되나.
▲요즘 바빠서 잘 못 마시는데, 난 멤버가 맘에 들어야 마셔. 주로 고향친구들이 좋지.
이어 임현식은 독특한 ‘주법’을 공개했다. “시원한 맥주에 소주를 한 2cm쯤 타서 7잔을 두 시간 동안 나눠서 마셔.” 흔히들 말하는 ‘소폭’이다. 그런데 반드시 두 시간 동안 7잔을 마셔야 다음날 탈이 없다고 한다. ‘쓰라린’ 경험으로 터득한 그만의 비법이란다.
정신 없이 대화를 나누다보니 어느 새 훌쩍 1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간단한 질문에도 달변을 토해내는 터에 기자는 글로 옮겨 적기가 바쁠 정도였다. 표정과 몸짓까지 글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임현식은 “아직 일곱 신이나 남았어, 오늘도 밤새겠는데”라며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대화 중 나왔던 한 대목이 문득 떠올랐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말하기를 즐겼던 임현식은 이런 얘기를 남겼다. 마치 ‘연기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듯.
“어떤 유명한 지휘자가 있었어요. 그 사람이 카잘스라는 첼리스트한테 주문을 하는 거야. ‘더 약하게’. 그랬더니 첼리스트가 약하게 현을 퉁겼어요. 근데 ‘더 약하게.’ 또 그러는 거야. 그래서 더 약하게 했지. 그런데도 또 약하게 하라는 거지. 결국 그 첼리스트는 음이 들리지 않을 만큼, 그 떨림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현을 만졌어. 그 미세한 강약조절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