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은 간단하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한 영진(나운규 분)은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그는 앞잡이 기호(주인규 분)만 보면 죽일 듯 달려들며, 기호는 영진의 여동생인 영희(신일선 분)에게 음흉한 마음을 품고 치근덕댄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잔치가 벌어지는 마을. 기호는 몰래 영진의 집에 숨어들어 영희를 겁탈하려 하는데, 그 광경을 본 영진 앞엔 갑자기 환상이 펼쳐진다. 태양빛이 내려 쬐는 사막. 젊은 남녀가 사막을 건너는 대상에게 물을 달라고 애원하지만, 대상은 매정하게 지나간다. 그 순간 영진은 낫을 들어 대상을 후려친다. 이때 환상은 끝나고, 영진 곁엔 낫에 찔려 죽은 기호의 시체가 있다. 이때 제 정신으로 돌아온 영진. 하지만 그는 일본 경찰에게 이끌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운규가 시나리오와 연출, 주연을 맡은 영화 <아리랑>의 한 장면.
이 영화를 통해 한국영화계의 신화적인 인물이 된 나운규는, 그의 인생 자체가 영화 같았던 인물이다. 1902년 10월 27일, 한반도의 북쪽 끝인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그의 집안은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으며, 형 나시규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외국 문화와 근대적 문물에 대한 관심을 키워왔다. 신흥학교 시절에 만난 선생 박용운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나운규에게 민족주의적인 사상이 깃든 것도 이때부터였다.
나운규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친구이자 이후 동료 영화인이 되는 윤봉춘이었다. 독립운동가이며 영화감독이자 배우였던 윤봉춘은 나운규의 동갑내기 고향친구로, 그의 아들인 윤삼육은 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 딸인 윤소정은 배우이기도 하다. 나운규는 윤봉춘의 친척인 윤마리아와 사랑에 빠졌는데, 조혼 풍습 때문에 1915년 14세의 나이에 결혼한 뒤에도 윤마리아에 대한 연정은 식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 이전에 나운규가 열정을 바친 건 연극이었다. 그는 <육혈포 강도>라는 신파극을 본 후 완전히 매료되었고, 주변 사람들을 모아 ‘만년좌’라는 극단을 결성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는데, 학교 연극에서 일본인을 비판한 것이 문제되어 헌병대에 연행되어 심문을 당한다.
이후 그는 1918년 간도로 갔고, 명동중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는다. 이때 친구 윤봉춘이 찾아와 두 사람은 독립군의 활동 상황을 알리는 <독립신문>을 발간했고,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다. 이후 그의 방랑 생활은 시작된다. 러시아를 헤매던 그는 서울로 피신해 학업을 이으려 했지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쫓겨 만주로 피신했고, 홍범도의 독립군 조직인 ‘국민회’의 일원이 되었다가 서울로 돌아와 운봉춘과 함께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들은 곧 체포되어 1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고, 출옥 후 고향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중 신극 단체 ‘예림회’의 회령 공연을 보고 다시 열정을 되살린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한 장면.
‘예림회’의 문예부장이었던 안종화는 신극 운동을 거쳐 이후 영화감독이 된 인물. 그리고 그의 가장 큰 공적 중 하나는 나운규를 영화계로 끌어들인 것이다. 안종화와의 인연으로 부산에 있는 ‘조선키네마 주식회사’의 연수생이 된 나운규는 드디어 첫 영화를 만난다. 바로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1925). 여기서 그는 단역을 맡아 가마꾼으로 등장한다. 배우로 인정받은 작품은 이경손 감독의 <심청전>(1925)으로 심학규 역을 맡았다. 그리고 1926년, 1년 전엔 가마꾼 역할을 맡은 단역 배우였던 나운규는 첫 영화의 감독이 된다. 바로 <아리랑>이었으며, 이 영화는 단숨에 20대 초반의 청년을 한국영화의 대표적 인물로 끌어올린다. 그는 카리스마 가득한 배우이자 열정적인 연출가였으며, 억압의 시대를 격한 감정으로 표현한 예술가였다. 이른바 ‘몽타주’를 실험한 영상은 당대의 파격이었고, 평자들은 “조선 영화의 예술성을 드러낸 첫 영화인”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성공은 이후 1930년과 1936년에 두 편의 속편으로 이어졌고, 광복 이후 수많은 후배 영화인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1954년 이강천 감독의 <아리랑>을 필두로, 1957년엔 김소동 감독이, 1968년엔 유현목 감독이 <아리랑>을 내놓았다. 1966년엔 배우 최무룡이 메가폰을 잡고 직접 주연을 맡은 <나운규의 일생>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2002년 이두용 감독은 흑백 무성영화 스타일의 <아리랑>을 내놓았다. 이처럼 <아리랑>은 끊임없이 환기되는 민족의 걸작이며, 지금은 볼 수 없지만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이름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나운규의 삶은 언제나 욕망과 고뇌로 들끓었다. 기생과 사랑에 빠져 배우로 발탁하기도 했고, 촬영 도중 여배우와 밀회를 즐기기 위해 사라지기도 했다. 원하지 않은 결혼을 했다고는 하나, 조강지처와 아이들을 가난 속에 방치한 건 그의 큰 인간적 흠이었다. 당시 사회주의 계열인 ‘카프’의 영화인들은, 스타이자 감독으로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나운규의 사생활을 비난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점점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1930년대에 퇴락한다. 뒤늦게 영화에 대한 열정을 되살리려 했지만 너무 늦은 시기였고, <오몽녀>(1937)를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유현목 감독은 <한국영화 발달사>라는 책에서 나운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운규는 균형 잡힌 미남 스타는 아니었다. 스타가 될 수 있는 육체적인 여건을 갖추지 못한 사나이였다. 하지만 이런 조건을 초극해서 영화 속에 살아 있는 주인공의 성격을 빈틈없이 그대로 표출했다. 진실로 그는 영화 연기의 창조자였다. 그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작품처럼 한국영화의 역사를 일으켜 세운 풍운아였다.”
지금 그가 출연하거나 연출한 영화는 단 한 편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일제 강점기 한국 영화계에 뿌려놓은 씨앗은 든든한 토대가 되었고, 이후 한국영화는 나운규라는 이름 위에서 존재할 수 있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