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 빈소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박원숙씨. [우먼센스] | ||
TV를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슬픈 마음으로 한 중년 여자 탤런트가 오열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많은 시청자들은 이 중년 탤런트의 오열이 혹 연기가 아닐까 착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상황이었다.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된 채 그는 ‘아들’을 찾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박원숙(54). 약간은 수다스러워 보이지만, 서글서글한 눈매와 거침없는 대사로 항상 시청자들에게 정겨움을 준 친근한 연기자다.
그런 그가 이날 오열한 것은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때문이다. 박원숙씨의 아들 서범구씨(33·방송제작사 M시티 PD)는 이날 오후 1시쯤 서울 강서구 염창동 사무실 앞에서 생수배달 트럭에 치여 사망했다. 그는 먼저 간 아들의 시신을 붙들고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던 것이다.
그를 잘 아는 방송가 친구들은 박씨의 삶을 ‘드라마 같은 인생’이라고 말한다. 그가 출연했던 대부분의 드라마대로라면 이제 박씨의 삶은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려야 할 시점이다. 그만큼 박씨의 인생은 역경을 거듭했고, 그는 이를 헤쳐 나왔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자랐을까. 지금 박씨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픈 상처를 입고 망연자실해 있다. 스무 살의 나이에 첫 아이를 낳고 결혼을 하면서 시작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30대에 첫 남편과 두 번의 헤어짐을 반복하고, 40대에는 두번째 만난 새 남편의 빚에 나락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때마다 쓰러질 듯 쓰러질 듯하는 자신의 다리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어 주었던 아들 범구씨. 부채와 남편 문제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이제 삶과 연기가 모두 ‘원숙’의 경지에 이르렀고, 아들도 가정을 꾸리며 그 스스로 이제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다고 했던 박원숙씨에게 지난 11월3일 아들의 죽음은 청천벽력일 수밖에 없었다.
▲ 지난 3일 탤런트 박원숙씨의 아들 서범구씨가 차사고로 숨졌다. 사진은 서씨의 빈소. | ||
언니나 이모 같은 시어머니가 되고자 했던 박씨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들 내외를 집으로 부르지 않았다. “내 손으로 직접 따뜻한 밥 한끼 지어 먹이지 못할 것 같으면 집으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 박씨의 원칙이었다. 그래서 바쁜 와중에도 그냥 밖에서 식사를 가졌고, 그것이 결국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친구이자 연인인 아들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사고 소식을 접하고 눈물 바람으로 달려온 이는 한둘이 아니었다. 이대 목동병원 영안실은 동료 탤런트 및 방송 연예 관계자들로 가득찼고 그들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박씨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무엇으로 그 어려움들을 버텨왔는지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탤런트 김수미 김영옥 김영란 김자옥 김용림 오미연씨 등 동료들은 하나같이 말없이 그냥 박씨를 껴안고 울기만 했다. 사고 소식을 접하고 제일 먼저 달려온 성우 양지운씨는 “무슨 위로의 말이 필요하겠는가. 자식을 가슴에 묻었으니 그 가슴을 달래주는 수밖에”라며 이심전심 무언의 위로를 대신했다.
마지막 남은 벗인 아들을 잃었으니 이제 박씨가 기댈 마지막 안식처는 하느님뿐인 듯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박씨는 지난 5일 경기도 벽제 승화원에 자식을 묻고는 두문불출했다. 하지만 사흘 만에 박씨는 평소 다니던 교회에 모습을 나타냈다. 양씨는 “혹시나 했는데 그 아픈 몸을 이끌고 교회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보며 다시 한 번 신도들이 모두 울었다. 오히려 박씨가 우리들을 위로하며, 영안실을 찾아준 데 대해 일일이 감사를 표시했다. 박씨는 정말 여장부”라고 울먹였다.
양씨에 따르면 현재 박씨는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생각보다 잘 견디고 있단다. 양씨는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려는 의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집에 혼자 있으면 더 슬프고 힘드니까 애써 사람들을 찾고 있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힘들어 할 며느리와 손녀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들이 마지막 남은 박씨의 가족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박씨 주변 인사들에 따르면 박씨는 현재 전면 중단 상태인 방송 활동도 이달 중순부터 다시 재개할 뜻을 비쳤다고 한다. 힘든 때일수록 더 일에 매달려서 아픔을 잊고자 했던 것이 그동안 박씨가 보여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쏟아지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은 정중히 피했다. 조금 시간을 달라는 박씨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막무가내로 조를 순 없었다.
박씨는 지난 98년과 99년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저서를 발간했다.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아온 자신의 인생 역경을 담담히 고백하는 글이었다. 첫번째 책인 <열흘 운 년이 보름은 못 울어?>의 맨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책을 쓰기 전에 가장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 아들 범구였다. 어릴 때부터 나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제일 컸던 아이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쓰고 싶은 대로 마음껏 써. 콩가루 집안인 거 다 드러난 마당에, 더 이상의 데미지가 있겠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얘기하는 아들 앞에서, 나는 또다시 부끄러워졌다. 나는 과연 좋은 엄마였던가. 그리고 괜찮은 인간이었던가.’
이처럼 박씨는 늘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연기자 박원숙’으로는 1백점 만점을 자신하지만, ‘엄마 박원숙’으로서는 50점은커녕 30점도 안될 것이라는 자조 섞인 푸념을 해오곤 했다. 하지만 범구씨는 얼마 전 한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에 대해 “자기 영역을 뚜렷이 가지고 있는 엄마를 두고 있어 아주 뿌듯하다”고 말했다.
▲ 박원숙씨가 이 사진처럼 다시 환하게 웃음지을 날은 언제쯤이나 될까. | ||
범구씨는 언젠가 이런 말로 어머니 박씨를 감동시킨 적이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밖에서 그 흔한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학교에서도 사고 한 번 치지 않은 점에 대해 범구씨는 “엄마가 유명한 사람이니까, 아들인 내가 허튼 짓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아마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박씨는 평소 동료 탤런트들에게도 서슴없이 “내가 일생동안 진정으로 사랑한 남자는 아들 범구 하나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만약 스무 살 그 철없을 때 범구를 낳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세상을 어떻게 혼자 살아 왔을까”하고 혼잣말처럼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범구씨는 박씨에게 있어 아들이라기보다는 친구 같고 연인 같은 존재였다. “범구가 결혼하는 날엔 마음이 복합적으로 북받쳐 올랐다. 범구 아빠가 참석하지 않은 결혼식에서 나도 범구도 당당하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고 박씨는 고백한 적이 있다.
4년 전 첫 손녀를 본 박씨는 아들의 결혼보다 더 큰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나이 쉰에 할머니가 되었다는 사실보다는 손녀의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사랑스럽기만 했던 박씨가 손수 이름을 짓겠다고 옥편을 뒤적거릴라 치면 아들 범구씨는 “엄마 왕편 보면서 뭐하우?”하곤 놀려대기 일쑤였다.
새 가족이 된 며느리 이지현씨와 손녀 혜린양에 대한 박씨의 애틋함은 그의 책에도 잘 나와 있다.
‘처음 손녀 혜린을 보는 순간 세상에 지 아비를 쏙 빼닮은 오종종한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내 젊은 날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아들이 사랑을 만나, 그 씨앗으로 또 하나의 열매를 맺었다니. 자신의 조화로움 앞에서 정말 묘하고 희한한 기분이었다.’
이제 남은 가족은 며느리와 손녀뿐이다. 주변에서는 “평소 박씨의 성격이라면 당연히 며느리의 행복을 먼저 생각해서 자유를 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사는 그날까지 마음 속엔 늘 내 며느리, 내 손녀라는 생각을 품고 살아갈 것이다”라고 전했다.
박씨는 서울토박이다. 그는 지난 49년 서울 원효로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고 당찬 기질을 갖고 있었다. 특히 유명 만화가였던 부친 고 박광현씨를 닮아 끼를 타고난 듯했다. 그래서인지 박씨는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박씨가 첫 남편 서씨를 만난 것은 대학 2년에 재학중이던 지난 68년이었다. 대학 살롱 드라마 모임체인 YMCA ‘탈’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당시 서씨는 동국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이었고, 이 동아리에서 연출을 공부하고 있었다. 나이는 서씨가 박씨보다 두 살 위였다.
두 사람의 만남과 첫 관계, 그리고 임신과 결혼으로 이어진 과정 또한 한 편의 영화였다. 두 사람은 만난 지 두세 달쯤 지난 때에 우연하게도 통행금지에 걸려 여관에서 함께 묵게 되었다. 이때 첫 관계를 했고, 결국 임신으로 이어지면서 결혼까지 했다. 첫 만남에서 결혼까지는 불과 7개월이 걸렸다.
어쩔 수 없이 학교를 중퇴해야 했던 박씨는, 그러나 배우를 향한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임신 7개월의 몸으로 MBC 탤런트 공채 1기 시험에 응시했으나 “집에 가서 애나 낳으라”는 심사위원의 핀잔만 듣고 떨어졌다. 그러나 박씨는 출산 후 이듬해에 다시 도전, 지난 70년 1월 MBC 탤런트 공채 2기로 당당히 합격했다. 무려 3천 대 1의 경쟁률을 뚫은 것이다.
연기력을 인정받은 박씨는 비교적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지난 74년부터는 MBC 드라마 <수선화> <아버지> 등에 출연하면서 유명해졌다. 인기가 오르자 그는 CF에도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결혼생활에 이상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공군 장교로 제대한 남편 서씨는 박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개인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액세서리, 운동복 제조, 실내장식용품 등 하는 사업마다 서씨는 실패를 반복했고, 박씨가 벌어놓은 통장의 돈은 빠져나가기 바빴다. 두 사람은 결국 지난 81년 합의 이혼했다.
박씨가 남편 서씨와 3년 만에 재결합을 하게 된 것은 동료 탤런트 L씨와 터진 스캔들 때문이었다. 당시 이혼녀였던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덤벼드는 L씨 때문에 고민하던 박씨는 결국 전 남편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한 박씨는 다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으나 이때는 이미 남편에게는 또다른 여자가 있었다. 분명한 성격의 박씨는 남편에게 내연의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순간 미련없이 다시 이혼 도장을 찍었다. 재결합한 지 불과 6개월 만이었다.
당초 첫 이혼 때 남편에게 맡겼던 아들 범구는 이번에는 자신이 맡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계모에게 아들을 맡길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이제 평생 결혼하지 않고 아들만 바라보고 살겠다는 결심을 한 때문이었다.
박씨는 지난 85년 4월 한 선배 탤런트의 소개로 워싱턴에서 사업을 한다는 심아무개씨를 만났다. 잘생긴 외모에 다분히 탤런트적인 끼가 있는 그 남자에게 박씨는 서서히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감정과는 달리 두 사람 앞에 놓인 장벽은 의외로 높았다. 심씨는 미국으로 건너올 것을 원했으나, 박씨는 연기자로서의 인생을 그만두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들과 일과 자신의 종교(기독교)를 포기하면서까지 미국으로 건너가고 싶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결국 친구로 남기로 했다.
한 차례 사랑의 열병을 앓고 나서 지칠 대로 지친 박씨에게 새롭게 한 남자가 나타났다. 아르헨티나에서 사업을 해온 교포 이혼남이라는 김씨는 교회 관계자의 소개로 만나 신앙이라는 공통점으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있던 박씨가 덜컥 두 번째 결혼을 결심해버린 것도 같은 종교인이라는 이유가 컸다. 그만큼 박씨는 당시 약해 있었다. 결혼 초기 자신과 아들에게 한없이 자상하던 김씨는 곧 사업문제와 여자문제로 박씨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남편의 사업 시도에 거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박씨의 애원에도 김씨의 사업에 대한 집념은 막무가내였다. 남편은 양재동에 크게 회사를 만들고 사업을 무작정 확장해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여성편력도 심했다고 한다. 박씨로서는 악몽과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당연히 부부싸움이 잦았고 부부관계는 점점 악화돼 갔다. 김씨는 박씨 명의의 집을 몰래 경매에 부쳐 돈을 끌어 썼다.
결국 사업은 부도가 났고, 남편 대신 자신의 명의를 빌려줬던 박씨는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고 말았다. 박씨는 이혼을 결심했으나 오히려 김씨는 이혼할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1년여에 걸친 소송 끝에 이혼할 수 있었다. 박씨는 “비록 엄청난 빚을 내가 떠안게 되었지만 그보다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더 기뻤다”고 후일 고백할 정도였다.
박씨는 지난해까지 전 남편의 빚잔치를 위해 방송국 출연료까지 차압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박씨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한 것은 빚보다도 “여자가 기가 너무 세서 남편이 하는 일마다 잘 안 풀린다”는 손가락질이었다.
그는 인생의 황혼길에서 다시 한 번 가슴을 쥐어 뜯고 있다. 박씨의 얼굴에 다시 환한 햇살이 비칠 날이 언제일지 그를 사랑하는 시청자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