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한 열혈 팬이 <대장금> 홈페이지에 구구절절 ‘한상궁 마마’에 대한 마음을 고백한 글 중 일부다. 요즘 가장 잘나가는 MBC <대장금>에서 주인공 장금이보다 더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한상궁’ 양미경. 그녀는 팬들의 아우성을 뒤로한 채 16일 방영분에서 드디어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며 한상궁으로서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한상궁’ 역으로 연기생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양미경은 요즘 어떤 심정일까. 실제의 그도 과연 한상궁다울까. 지난 3일 <대장금> 촬영이 한창이던 MBC 의정부 세트장에서 양미경을 만났다. 극중에서 한창 요리솜씨를 과시하고 있던 그는 “요즘 사람들이 제 얼굴이 밝아졌다고들 해요”라며 살포시 웃었다. 촬영 현장의 매섭고 쌀쌀한 날씨도 쉽사리 그의 미소를 얼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양미경은 요즘 얼굴이 유난히 밝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곧 한상궁이 죽게 될 운명에 놓여 있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기쁘단다. 그는 “연기하면서 내게 이런 좋은 시절이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나이 마흔둘의 양미경은 올해로 연기를 시작한 지 20년째를 맞았다. 지난 1983년 KBS 공채탤런트 10기로 데뷔해 그동안 수백여 편의 작품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맡아왔다. 그러나 그녀에게 <대장금>만한 작품이 또 있었으랴.
─한상궁 역의 캐스팅 제의가 왔을 때 결정을 쉽게 했나.
▲<대장금>을 시작하기 전에 연습실에서 이 국장님(이병훈 PD)을 우연히 뵙게 됐다. 마침 그날이 내 생일이어서 기억이 나는데 지난 7월이었다. 그때 ‘한번 보자’고 말씀을 하시더라. 무슨 일인가 했는데 그 다음에 만난 날 한상궁 역을 제의하셨다. 국장님이 ‘초반에 죽는 역이라 미안하다’며 할 수 있겠냐고 하시더라. 그분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병훈 PD에 대해서 연기자로서 어떻게 평하는지.
▲87년에 <인현왕후>라는 작품으로 처음 일을 같이 했었다. 국장님이 워낙 사극을 오래 해오셨기 때문에 사극에 관한 한 노하우가 대단하다. 굉장히 섬세하고 열정적인 분이다. 너무 섬세하셔서 예를 들면 감정 잡는 신에서 ‘비슷한데 한 번 더’와 같은 식의 주문을 하시기도 한다. 참 어려운 주문 아닌가(웃음). 현장에서 밤샘촬영을 하면서도 오히려 젊은 연기자들보다 지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걸 보면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한상궁이 이렇게 인기를 얻으리라고 예상했나.
▲물론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에 일찍 죽을 거라고 하셨는데 무려 10회나 생명이 연장됐다(웃음). 그러나 이 모두 시청자들, 그리고 이 국장님의 덕이다. 아마 국장님이 아니었다면 한상궁이 이렇게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청자들이 감동적이었다고 평하는 장면들의 대부분이 국장님이 섬세하게 ‘코치’를 했던 부분들이다.
─너무 겸손한 것 아닌가. 연기자 본인이 한상궁 배역을 그만큼 잘 소화했기 때문 아닐까.
▲난 워낙 욕심을 부리는 성격이 아니다. 그저 주어지는 역에 충실하고 노력할 뿐이다. 만약 국장님의 섬세한 지도가 아니었다면 밋밋한 한상궁이 되었을 것이다.
단 한 신이 비는 짬을 이용해 ‘막간 인터뷰’를 시도했던 기자는 다시 틈이 나기만을 기다리며 한상궁으로 돌아간 양미경의 연기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어지는 신은 한상궁이 요리하는 장면. 알려졌다시피 요리장면의 ‘손 대역’은 궁중음식연구가 한복려씨의 수제자인 박준희씨가 연기한다. 그렇다고 대역연기만을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양미경도 똑같은 조리순서대로 찍어 두 촬영분을 적절하게 편집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두 한상궁’은 서로 번갈아가며 같은 음식을 두 번씩 만들고 있었다. 양미경은 박씨가 음식을 만드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가 똑같은 손놀림으로 이를 반복했다. 이 모습이 흥미로워 막간을 이용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대역이 요리하는 장면을 그대로 다시 하던데.
▲대역을 쓴다고 해도 군데군데 진짜 한상궁의 모습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똑같이 따라서 연기한다. 그래서 되도록 어설프지 않게 보이도록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웃음).
─아까 보니 칼질하는 솜씨가 수준급이던데(<일요신문> 603호 기사에도 소개됐듯이 양미경은 과거 요리프로그램을 진행했을 만큼 ‘내공’이 깊다).
▲아유. 그 정도를 가지고 뭘(웃음).
▲ 양미경은 이영애(왼쪽) 에 대해 “시간이 흐를 수록 인간미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맞는 말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음식에 대한 철학’을 담고 있는 게 마음에 든다. 한상궁이 미각을 잃은 장금에게 ‘맛을 그리는’ 능력을 가르치는 것 또한 음식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상궁이 죽더라도 정상궁(여운계 분)으로부터 전해온 그 철학만은 장금이가 이어가야 할 것이다.
─곧 죽음을 앞두고 있다. 기분이 어떤가.
▲이제 죽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정말 이상하다. 대본을 받으면 ‘오늘은 죽을까?’ 조마조마하기도 한다(웃음). 얼마 전 정상궁이 돌아가실 때도 기분이 묘해서 촬영장에서 가만히 앉아있질 못하고 괜히 들락날락했다.
─그럼 한상궁이 죽으면 장금이가 마찬가지로 들락거리겠다.
▲아마 그러지 않을까(웃음).
─개인적으로 바라던 한상궁의 죽음은.
▲스태프들도 ‘한상궁이 어떻게 죽어야 하나’를 두고 요즘 고민을 많이 한다. 그렇잖아도 아까 국장님께 ‘저 어떻게 죽어요, 예쁘게 죽죠?’라고 물어봤는데 그냥 웃기만 하셨다. 그저 예쁘게 죽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런데 참, 애초에 한상궁이 아닌 최상궁 역(견미리 분) 제의를 받았었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그건 잘못 전해진 얘기 같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한상궁 역을 놓고 처음엔 송채환씨에게 캐스팅 제의가 갔다가 고사해 내게로 왔다고 한다.
─연기로 느낀 궁녀들의 삶은 어떤가.
▲한상궁 입장에서 봤을 때 그저 왕의 스쳐지나가는 여자 중 하나였을 뿐 아닌가. 정상궁이 죽으면서 그 외로움 때문에 서로 질투하고 시기한다고 했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래서 장금이를 더 딸처럼 아꼈을 테고.
─요즘 한상궁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비유되곤 하는데 소감이 어떤가.
▲그렇잖아도 그 글을 읽어보았다. 기분은 좋지만 정치엔 별 관심이 없어서…(웃음).
─이영애와 호흡을 맞추고 있는데 선배 연기자로서 이영애를 평한다면.
▲93년에 영애를 처음 봤으니까…,딱 10년 전이다. 그때 참 맑고 순수한 이미지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단지 외모의 아름다움을 떠나 인간미와 사람냄새가 느껴지는 친구다. 영애와는 이번이 세 번째 작품이라 연기하는 데도 참 편했다. 친해질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만약 장금이를 다른 배우가 맡았다면 이렇게 편하게 연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애도 <대장금>을 맡으며 각오가 남다른 것 같았다. 새벽까지 촬영해도 지치지 않는 열정과 욕심을 보여준다.
양미경과 이영애의 인연은 남다르다. 93년 이영애의 드라마 데뷔작 SBS <댁의 남편은 어떠십니까>에서 시누이와 올케 사이로 출연했던 두 사람은 SBS <불꽃>에서도 또다시 시누이-올케로 재회한 바 있다. 그리고 이번 세 번째 작품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나게 된 것.
─촬영 중 에피소드가 많을 듯한데.
▲소라독을 먹고 내가 쓰러지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머리에 얹은 ‘트레머리’가 떨어져 버렸다. NG가 날 뻔했는데 영애가 재치 있게 받아주더라. 다행히 어색하지 않게 잘 넘어갈 수 있었다. 미각을 잃은 장금이를 업는 장면은 시청자들이 많이 기억해 주시는데 촬영 전에 미리 ‘업는 연습’을 했었다(웃음). 누군가 깊숙하게 업으면 덜 무겁다고 해서 그렇게 해보았더니 좀 낫더라. 영애는 생각보다 가벼웠다(웃음).
▲ 양미경은 “영화 <호타루>의 다나카 유코(원안 위)처럼 눈빛 좋은 여배우로 늙고 싶고 멜로 연기는 문성근(원안 아래)과 하고 싶다”고 털어놨다. | ||
─틈틈이 아들과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다고 하던데.
▲진석이가 너무 예쁘다. 엄마가 아들을 챙겨줘야 하는데 요즘은 오히려 아들이 엄마 걱정을 한다. 촬영 때문에 고생하는 걸 보고 ‘엄마, 밥 잘 챙겨 드세요’ ‘우리 엄마 잠보인데 잘 못 자서 어쩌지?’라는 메시지를 보내곤 한다. 진석이 친구들도 한상궁을 좋아한다고 하니 기분이 좋다(웃음).
양미경은 이어 ‘아들자랑’을 참 예쁘게 했다. 진석이는 엄마를 위해 노래를 다운받아 CD에 구워주기도 한단다. “아이아빠랑 나랑 반반씩 닮아서 이쁜 구석이 참 많아요”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 양미경의 성격은 어떤가. 한상궁과 비슷한가.
▲고집도 있고 외곬 같은 면이 있다. (음식철학을 가르치는 한상궁처럼) 어릴 적 꿈도 선생님이었다. 어디 나서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다. 이런 내가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가끔 우습다(웃음).
양미경은 83년 숭의여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가 한 극단의 워크숍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연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KBS 탤런트 공채에 합격해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
─앞으로 꼭 한 번 맡고 싶은 역이 있다면.
▲일본영화 <호타루>에 나왔던 중년 여배우(다나카 유코)가 너무 멋졌다. 그 눈빛이 너무 근사해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눈빛이 좋은 여배우로 늙어가고 싶다. 그리고 멜로 연기를 하게 된다면 문성근씨와 한번 해보고 싶다(웃음). 예전에 MBC <베스트극장>에서 같이 연기를 했던 적이 있는데 참 잘한다고 느꼈다.
양미경이 “아줌마가 팬 카페 생긴 것도 참 기이한 일이죠”라고 운을 떼는 걸 보니 아마 당분간, 아니 오랫동안 한상궁을 잊지 못할 모양이다. 덕분에 CF와 드라마 섭외도 많이 들어오고 있지만 쉽게 결정하진 않겠다고 한다. “이참에 CF도 많이 찍으시라”는 덕담을 건넸더니 웃음으로 화답했다.
언제나 단아해 보이는 그에게서 한번쯤은 흐트러진 모습을 엿보고픈 짓궂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큰언니 같은 그와 언젠가 한번 마음을 풀고 술 한잔 섞고픈 욕심 때문이었을까.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음, 그런데 주량은 어느 정도나 되나요?”
“여태까지 취해본 적이 없어요. 남편이 워낙 술꾼이어서…(웃음).”
남편 상대하느라 술이 늘었다는 양미경, 은근히 부부금실까지 자랑하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