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 이회창 전 후보가 불법 대선자금 수수에 대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 ||
20여 년간의 강직한 판사 생활과 10여 년간의 뛰어난 변호사활동으로 화려한 명성을 쌓아왔던 서정우 변호사는 불과 6개월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 정치권에 잠깐 발을 담근 게 화근이 되어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온갖 불명예를 뒤집어 쓰고 있다.
‘주군’으로 모신 이회창 전 대통령후보의 두 차례에 걸친 대선 낙방과 함께 감춰진 그의 존재는 뜻밖에도 불법 대선 자금 모금 파문으로 부각되고 있다.
현재 정치권과 법조계 주변에서는 그를 향해 “‘창(昌)의 강금실’이 되어야 했을 사람이 ‘창의 장세동’으로 전락했다”는 안타까운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회창 전 대법관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셨다. 그분이 정치에 입문했을 때 별로 찬성하진 않았지만 대통령감으로 가장 적당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변함없이 그를 지지한다. 정치판이 사람을 망친다는 말도 있지만, 법관 때부터 마음속에 가진 대쪽같은 지조를 잃지 않을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게 없다면 그 분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어느 정권이고 법을 도구로 이용해 왔지만 이 전 대법관은 법을 행동규범으로 여기시는 분이다.”
지난 2000년 5월 한 시사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서정우 변호사가 밝힌 ‘이회창론’이다. 단순히 학교와 법조계 8년 선후배의 관계를 떠나 서 변호사가 평소 이회창 전 후보를 얼마나 믿고 따랐는지를 단번에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정치권에서는 서 변호사를 ‘리틀 창(昌)’으로까지 부르고 있다. 그만큼 두 사람의 관계가 지난해 대선을 계기로 해서 밀착됐다는 반증이다. 서울법대 출신인 한나라당의 한 전직 의원은 “이 전 후보는 항상 자세가 꼿꼿하고 행동거지에 빈틈이 없어 꼬장꼬장한 강골 선비의 풍모를 풍기는 반면, 서 변호사는 옷매무새도 좀 어수룩하고 자세도 구부정한 촌구석의 훈장 선생 냄새가 난다”고 대비했다. 이 전직 의원은 그러나 “얼핏 두 사람은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지만 ‘원칙주의’를 앞세운 고집과 소신을 서로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고 평했다.
그런 두 사람이 지금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 만한 대형 탈법의 책임자로 나란히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점은 이 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치권에서 꽃을 피운 두 사람의 인연은 법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의외로 주변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울법대를 나온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이 전 후보와 서 변호사가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였는지는 솔직히 이번 파문을 보고 새삼 느꼈다”며 “두 양반 모두 사람을 모으고 끌어들이는 정치적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사실 두 사람의 이력을 보면 여러 가지 공통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서울 출신이다. 이 전 총재는 지난 대선 때 자신의 출생지를 황해도 서흥이라고 밝혔으나 본적이 서울 종로구 명륜동으로 되어 있는 등 사실상 서울내기나 다름없다.
또한 둘 다 법조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전 후보의 부친은 고 이홍규 변호사고, 서 변호사의 부친은 고 서극형 변호사이다.
두 사람은 가장 결속력이 강한 학맥이라는 ‘경기고-서울법대’ 동문이다. 나란히 판사의 길을 선택한 것도 같다. 지난 71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첫 법복을 입은 서 변호사가 이 전 후보를 처음 만난 것은 81년이었다. 당시 대법원 판사로 있던 이 전 후보 밑에 서 변호사가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들어왔다.
서 변호사는 “그때 매일 야근은 기본이고, 철야도 수시로 했다. 매일 밤 법원 청사 층계를 더듬거리면서 내려오곤 했지만 그래도 뿌듯함이 더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당시의 이 전 후보에 대해 “소신있는 판결만큼이나 법이론도 탁월했다. 그분을 만날 때마다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할까 하는 깨우침을 주셨다. 법이론뿐만 아니라 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배웠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두 사람은 법원을 떠난 시점마저 공교롭게 일치한다. 이 전 후보는 93년 2월 대법관을 끝으로 법복을 벗고 이후 감사원장, 국무총리 등을 맡아 사실상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이와 같은 시점에 서 변호사는 돌연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직을 던지고 변호사 개업을 선언했다. 당시 서 변호사의 갑작스런 사표는 법원 안팎에 적지 않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전 후보가 81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에서 곧바로 대법원 판사로 승진한 전철을 후배인 서 변호사도 밟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실제 당시 법원 출입 기자들은 ‘미래 대법관감의 아쉬운 사표’라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두 사람의 밀착 관계가 어느 정도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97년 대선 직전이었다. 당시 대선에 나섰던 이 전 후보의 법조계 인맥으로 서 변호사는 항상 등장했다. 하지만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스스로 “정치는 할 줄도 모르고,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뒤에서 국세청을 동원한 선거자금 모금 사건인 이른바 ‘세풍’과 안기부 자금 예산 전용 의혹인 ‘안풍’사건 등의 변론을 도맡으며 뒤치다꺼리를 했다. 이 전 후보의 전폭적인 신뢰는 이때부터 더욱 공고해졌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서 변호사와 이 전 후보간에 얽힌 여러 화제들이 거론되고 있다. 지난 97년 대선 패배 후 실의에 빠져 있던 이 전 후보에게 “제1야당의 당수로 다시 일어선다면 정치적 능력도 검증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서 변호사가 재기를 강력히 권했다고 한다.
지난해 선거 운동시 이 전 후보가 당원들을 향해 넙죽 큰절을 올린 것이라던지, 점퍼를 입고 다니며 시장 상인들과 해장국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등의 서민풍을 강조한 것도 서 변호사의 끊임없는 조언이 뒤따랐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지난 대선 당시 이 전 후보 캠프의 한 관계자는 “서 (법률)고문은 이 전 후보에게 두 번째로 큰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첫 번째 조언자는 한인옥 여사를 일컫는 것이었다. 그만큼 서 변호사가 이 전 후보의 ‘측근 중의 측근’으로 급속히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 지난 대선 직전이었다.
이번 대선자금 파문이 불거지기 전인 지난 7월께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사석에서 “가정에 불과하지만 만약 이 전 후보가 대권을 잡았다면 아마 지금쯤 서 변호사는 현 노무현 정권의 강금실 장관이나 이광재 실장만큼이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흘리듯 말한 바 있다. 그는 “지금 이 실장이나 안희정씨가 노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른바 ‘좌희정 우광재’로 꼽히고 있지만 막상 지난 대선 때 이들이 전면에 나선 적이 있느냐. 최측근 참모란 바로 그런 것이다. 정작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은 결과가 나타나기 전엔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아마 이 전 후보가 당선됐더라면 지금쯤 ‘좌정우 우승민’이 떴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 변호사와 유승민 여의도연구소장을 일컫는 것이었다.
지난해 12월 당시 대선 결과가 나오기 직전 마감에 임박했던 각 시사월간지들은 ‘이회창 당선’과 ‘노무현 당선’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염두에 둔 채 보도 준비를 했다. 결과적으로 빛을 못 본 ‘이 대통령의 섀도우 캐비닛’ 원고에는 서 변호사가 새 정권의 법무장관이나 감사원장의 유력 후보로 올라 있기도 했다.
서 변호사가 지난 8일 검찰에 긴급 체포되었을 때 변호사 출신인 열린우리당의 천정배 의원은 “이회창씨가 대법관으로 활약할 때 매우 훌륭한 법조인으로 존경했으며 판결이 탁월한 분이다. 서 변호사 역시 법조인으로 자세가 매우 훌륭했고 (후배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다”며 “이런 분들이 파렴치범으로 몰리는 것은 한나라당이라는 시스템에 편입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정치적 이해 관계를 달리하는 많은 법조인들도 서 변호사의 체포에 대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아니었는데…”라며 애석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서 변호사 주변에서는 여전히 지난 93년의 갑작스런 사표를 궁금해하는 이가 많다. 한창 잘나가던 부장판사였기 때문. 이에 대해 서 변호사는 “돈이 필요했다”고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93년 당시 딸의 결혼과 부인의 병환으로 목돈이 필요했던 차에 변호사 전업의 유혹을 받았고 “어차피 법관이 명예직이긴 하지만 이젠 가족을 위해서라도 돈을 좀 벌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것.
서 변호사는 지난 93년 변호사 개업 후 오히려 법조인으로서의 빛을 더 발했다. 한보 사건,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인기가수 김성재씨 피살 사건 등 주요 사건들을 도맡으며 대부분 승소를 이끌어냈다.
그는 지난 97년 법무법인 광장으로 옮기면서 강력한 리더십과 행정능력까지 선보였다. 사실상 법인 대표격이었던 그는 많은 후배 변호사들을 직접 가르치고 다듬으면서 송무 전문가로 키워냈다.
지난 2001년 1월에는 법무법인 한미와의 합병을 이끌며 광장을 국내 4대 로펌의 하나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이즈음 광장이 외환위기 사건을 맡아 강경식 전 부총리와 김인호 전 수석을 무죄로 이끌었던 것은 대단한 화제가 됐다. 누가 봐도 승산 없는 게임이라고 판단했던 송사였기 때문이다.
술은 잘 못하지만 유머 감각이 뛰어난 서 변호사는 친근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이어서 평소 대인관계가 원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시절에는 대법원 공보관 역할까지 겸임하면서 기자들과 잘 어울렸고, 그래서 기자협회로부터 감사패까지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대학 동문들 사이에서는 “겸손한 성격에 별로 잘 나서지 않는 스타일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서 변호사가 평소에도 “나는 늘 중간 정도만 달려온 중간 인생”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 경기고 시절 성적도 중상위권 정도였고, 서울대 재학시절에도 중간 정도의 성적에 그쳤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사시(6회) 합격도 어중간하게 운좋게 합격했다. 내 동기들 중에 정말 뛰어난 친구들이 많은데 그들을 보면 주눅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고. 판사 또한 딱히 그의 꿈이었다기보다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라는 것이 그의 솔직한 고백. 원래 의사를 꿈꿨던 그는 갈수록 자신이 없어지면서 고3 2학기가 다 되어서야 가까스로 전과를 했고 그것이 지금 법조계의 길에 들어선 계기가 됐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서 변호사의 지나친 겸손이라는 지적이다. 동문들에 따르면 서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했을 뿐만 아니라 판사 시절에도 동기들 가운데 항상 선두그룹에 속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변호사 개업 이후 더욱 명성을 날려온 서 변호사는 지난 2000년 대법관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나 ‘친창 인맥’이 부담으로 작용해 탈락했고, 예리한 사건파악 능력과 추진력으로 지난 2001년 이용호 게이트 특검 후보 물망에도 올랐으나 역시 낙점받지 못했다.
DJ 정권의 견제가 보이지 않게 작용한 탓이었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분석. 하지만 언젠가는 빛을 발할 것으로 예상되어 왔던 터였고, 그는 자신의 ‘존경하는 선배’를 제대로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현재 서 변호사는 두 얼굴을 가진 추악한 ‘야누스’로 공격받고 있다. 참여연대측은 “삼성중공업의 사외이사를 98년부터 6년여간 맡아온 서 변호사가 결국 자기의 친정집에 돈을 뜯은 형국이 됐다”며 “서 변호사는 이건희 회장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75억원의 비자금을 제공한 사건의 변호인을 맡으며 ‘기업 입장에서 보면 뇌물은 또다른 투자의 성격이 있다’라는 말까지 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법조계에서도 서 변호사의 현재 혐의만 갖고도 정치자금법 위반죄 적용에 특경가법상 배임죄와 횡령죄도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프로필]
생년월일:1943년 6월28일(양력)
출생지:서울
소속:법무법인 광장
병역:해군 법무관
취미:등산
혈액형:B
1961 경기고 졸업
1965 서울대 법대 졸업
1966 사시 6회 합격
1971 대전지법 판사
1977 서울가정법원 판사
1978 서울민사지법 판사
1980 서울고법 판사
1987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1993 서울고법 부장판사
1993 변호사 개업(서울)
1997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
1998 삼성중공업 사외이사
2002.06~2002.12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법률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