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의 측근비리를 수사할 ‘제5호 특검’으로 임명된 김진흥 특별검사는 원칙주의자이자 학구파로 알려져 있다. 국민일보 | ||
이번에 출범하게 될 ‘제5호 특검’은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과 관련된 비리를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특검 후보를 둘러싸고 사전 하마평 또한 무성했다. 여러 명의 가능성 있는 후보들이 거론되었지만, 그 어디에도 김 특검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와 함께 후보에 오른 박인환 변호사를 비롯, 심재륜 전 부산고검장, 안강민 전 대검 중수부장, 이신섭 전 서울지법 부장판사, 박재권 전 서울지검 부장검사 등의 이름이 후보자 명단에 막판까지 오르내렸다. 하지만 그 이름들은 썰물처럼 빠져 나갔고, 대신 그 한켠을 차지한 이름은 무명의 김진흥 변호사였다.
확실히 김 특검의 이력은 여러 면에서 소위 말하는 ‘법조계 주류’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 사실이다.
그는 군법무관 임용고시 출신이다. 1967년의 1회 군법무관 시험에 합격했다. 군법무관 임용고시 합격자는 현역 군인 신분으로 법무부 및 군사법원에서 근무하게 된다. 국방부 법무관리관(소장)이나 육군 법무감(준장) 등의 장성 진급을 노리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의 경우 의무 복무 기간에 해당하는 10년이 지나면 군복을 벗고 변호사의 길로 나선다.
거기에 비하면 김 특검은 90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기까지 23년간의 오랜 군생활을 했다. 그의 군법무관 동기인 김영삼 변호사는 “64명쯤 되는 우리 동기들 가운데 김 특검은 군생활을 꽤 오래한 축에 속한다. 장성 진급을 내심 바랐던 것 같다”고 전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김 특검은 장성 진급에 실패했다. 1회 군법무관 임용고시 출신 가운데 장성에 진급한 이는 전창렬 장동완 예비역 소장 등 4명이다.
동기 멤버인 한 변호사는 “전 소장이나 장 소장 등은 서울법대 출신으로 항상 진급에서도 동기들에 비해 앞서 나갔다. 그에 비하면 김 특검은 지방대 출신의 한계를 성실과 노력으로 극복하며 육군법무차감(대령)까지 올랐지만 장성 진급에는 실패했다”고 전했다.
1회 군법무관 출신의 동기 모임인 ‘정미회’의 총무 고재규 변호사는 “법조계에서 아직도 군법무관 출신을 비주류로 칭하는 것은 그만큼 법조계가 여전히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상태임을 나타내는 것”이라며 “이번 김 특검의 임명을 계기로 그런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환영했다.
김 특검의 군생활에서도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그는 지난 79년 10·26사태 직후 계엄사령부의 검찰과장으로 발탁됐다. 여기서 그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 박흥주 대령을 불러 직접 조사하기도 했다. 이후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구속에 따른 기존 군부의 몰락과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의 실권 장악 등 역사의 소용돌이속에 그도 함께 했다.
▲ 지난 16일 노무현 대통령이 김진홍 변호사에게 특검 임명장을 수여한 후 환담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그는 지난 81년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 특검은 “계엄사 시절 군사법정 판사로 있으면서 제대는커녕, 매일 밤새워 근무했다. 그것과 관련해서 받은 훈장”이라고 밝혔다.
이후 그는 5공 정권에서 국방부 송무과장, 육본 고등검찰부장 등을 거쳐 6공 출범과 함께 육군 법무차감(대령)까지 올랐으나, 장성으로 진급하지 못한 채 지난 90년 3월 예편했다.
42년생으로 전북 임실 출신인 김 특검의 어린 시절은 여느 집안과 마찬가지로 궁핍했다. 그는 고향인 임실군 삼계면에서는 그래도 알아주는 집안의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김 특검은 집안 살림을 도맡아온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수재로 불릴 정도로 공부를 잘했고, 당시 전북 지역 내 중학교에서 전교 1, 2등을 다투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전주사범학교(현재의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단짝 친구였던 김필수 한양대 교수는 김 특검과 그의 집에 대해 아련한 추억을 소개했다. 김 교수는 “1학년 때부터 김 특검을 비롯해서 유독 함께 잘 어울린 8명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우리 ‘8인회’의 아지트는 바로 김 특검의 집이었다. 거기서 밥도 먹고 놀고 함께 공부하며 꿈을 키웠다. 당시 그의 모친께서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항상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던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고 과거를 회고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고교 시절 김 특검은 가끔 학교 등록금을 제때에 내지 못해 다시 집으로 되돌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모친은 친구들이 집에 올 때마다 항상 먹을 것을 챙겨줄 정도로 아들 사랑이 남달랐다.
지금도 이 8인회는 ‘아우회’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매년 한 두 차례씩 부부동반 모임으로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김 교수는 “김 특검은 학창 시절부터 문학적 소양이 뛰어나서 수필 등을 쓰기를 좋아 했다”며 “아우회라는 이름도 ‘싹 아(芽)’자와 ‘벗 우(友)’자를 조합해 김 특검이 직접 지었다”고 전했다.
또 김 교수는 “당시 사범학교는 일제시대의 영향으로 그 규율이 아주 엄격했기 때문에 이성친구를 사귄다든가, 술이나 담배를 하는 등의 탈선행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며 “특히 김 특검을 비롯한 우리 8인회는 그중에서도 ‘범생이’ 그룹으로 통했다”고 전했다.
김 특검은 이때의 인연으로 지금의 부인을 만나기도 했다. 그의 장인은 당시 전주사범학교의 사회과목 선생님이었다는 것. 부인은 김 특검의 고교 2년 후배다.
김 특검의 부인과 전주사범학교 동기인 윤여헌 전 서울지법 부장판사는 “학창 시절의 김 선배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후 선생님의 딸과 연애한다고 해서 우리 동창들에게 화제가 된 바 있다”면서 “감수성이 풍부한 문학가적 소양을 지녀 국어 선생님이 될 줄 알았는데, 그가 법조인이 될 줄은 몰랐다”고 전했다.
실제 김 특검은 학교 졸업 후 경남 하동에서 1년 남짓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전북대 법학과에 입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