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7일 반기문 신임 외교통상부 장관이 취임연설을 하고 있다. 미국통인 반 장관은 윗사람의 뜻을 그대로 받드는 스타일로 평가받고 있어 대미관계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 주목된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그동안 외교안보통일 분야는 노무현 대통령을 중심에 놓고 외교통상부 내 보수파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중심으로 한 진보파가 잦은 충돌을 일으켜 왔다.
이런 가운데 지난 11일경 외교통상부의 주요 간부와 직원들이 노 대통령의 대미정책을 비판하는 투서가 제보되고,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윤영관 장관이 지난 14일 사표를 제출했다.
보수파의 좌장격인 윤 장관의 사표가 전격 수리되면서 일시적으로 외교가의 주도권은 진보파로 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 17일 역시 보수성향으로 알려진 반기문 청와대 외교 보좌관이 새 외교부의 수장에 임명되면서 진보파의 외교부 장악기도는 ‘이틀천하’로 일단락됐다.
반 신임 장관의 발탁은 “친미인사를 넘어선 ‘숭미(崇美)’인사”라는 비판이 강력하게 제기되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윗분의 뜻을 잘 헤아려왔던 그의 성향으로 볼 때 노 대통령의 충실한 정책전달자 역할을 할 것”이란 예상도 나오고 있다.
참여정부의 두 번째 외교부 수장의 임명은 여러 면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 모았다. 외교통상부와 국가안보 보좌관실을 중심으로 한 ‘한미동맹 강화파’와, NSC와 국정원 통일원에 분포되어 있는 ‘한미동맹 재조정파’간의 경쟁양상에서 대통령의 무게중심이 어느쪽으로 쏠리느냐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였기 때문.
이런 상황에서 반기문 외교보좌관이 장관으로 임명되자 그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미국측은 파월 미 국무장관이 직접 축하전화를 걸어올 정도로 대환영을 나타냈고, 대부분의 보수적 국내 언론과 외교통상부 주변에서도 만족스런 입장을 나타냈다. 반면 진보적 시민단체와 학계에서는 “참여정부의 자주 외교 정책은 이제 완전히 물건너 갔다”며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참여연대측은 “신임 반 장관은 지난 91년 국회 결의도 거치지 않고 한·미간에 체결된 용산 미군기지 이전 양해합의각서의 효력을 재확인해준 장본인으로 자주적 외교를 수행하는 데 적합하지 않는 경력을 갖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처럼 주변에서 반 장관의 친미 성향을 문제삼는 것은 그의 외교부 경력에서 기인한다. 반 장관은 70년 외무부에 들어온 이래 인도영사와 오스트리아대사를 제외하고는 30년간을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거나 외교부 미주국장 등을 거치는 등 그야말로 전형적인 미국통 외교관이었다.
따라서 이번 반 장관의 임명을 놓고 벌써부터 노 대통령의 새해 외교 정책 역시 미국과의 공조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우세하다.
즉 “윤 전 장관의 경질은 다소 방향성을 잃은 듯한 자주외교의 키를 다시 잡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총선을 앞두고 공무원 기강잡기 차원에 불과했다”는 일부 정치권의 시각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반 장관의 성향을 잘 아는 주변 관계자들은 이번 인사의 특성을 단순히 재조정파에 대한 강화파의 한판승으로 섣불리 단정지을 수 없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고위 외교관 출신의 한 인사는 “반 장관은 뚜렷한 소신을 가진 인사라기보다는 무색무취형에 가깝다”고 평한다. 그는 “타고난 성실성을 바탕으로 윗사람의 의중을 최대한 잘 읽어내고 그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반 장관의 스타일을 볼 때, 오히려 윤 전 장관보다 더 충실하게 노 대통령의 외교 정책 기조를 잘 따를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반 장관의 취임 소감 역시 이 인사의 말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취임 후 기자들의 질문에 “지난 10개월간 청와대에서 대통령에게 여러 가지를 배웠고 느낀 게 많다.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스타일을 외교부 직원들에게 많이 설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따라서 참여정부의 외교 정책을 더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련한 경험과 미국 내 인맥이 많은 반 장관의 노하우를 적절히 활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인사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 이와 함께 외교부 내에서 오랜 관료 생활을 해온 탓에 부처 내 헤게모니를 잘 파악하고 있는 그를 통해 ‘말썽 많은 부처’의 기강 잡기를 하겠다는 뜻도 함께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성향 탓에 일부에서는 본격적인 참여정부 외교를 펼치기 전의 기반 다지는 역할에 그칠 것이란 평가절하의 반응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미래전략연구원’이나 과거 인수위 시절 외교안보통일분과 자문위원 출신 등 이른바 노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외교 전문가들이 총선 후 참여정부 2기 내각에 본격 등장하기 전까지의 징검다리 역할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다.
흔히 반 장관을 평가할 때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위아래로 적을 만들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선이 가늘고 세심한 스타일이어서 ‘보스형’보다는 ‘참모형’에 적합한 인물로 보는 평도 많다.
그래서 참여정부가 출범할 때도 그에게는 장관과 같은 조직의 리더보다는 차관이나 보좌관 같은 보좌 역할이 더 적합하다는 평이 뒤따랐던 게 사실이다.
주변에 적을 만들지 않는 그의 성품은 지난 87년의 그 유명한 ‘편지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당시 동기들은 물론 외시 1, 2회 선배들조차 제치고 가장 먼저 2급 서기관으로 승진하게 되자 이를 부담스러워한 나머지 선후배 동기 1백여 명에게 일주일이나 꼬박 걸려서 일일이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 편지 내용은 “일찍 승진해서 죄송하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빈틈이 없고 업무 처리 능력과 성실성에서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정통 외교관”이라는 호평과 “고위 공무원으로서의 카리스마보다는 윗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순종적”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함께 공존한다.
▲ 지난해 6월27일 한·미 재계회의 회장단과 노무현 대통령의 면담 전 하바드 주한미대사(왼쪽)와 얘기하는 반기문 당시 외교안보보좌관. | ||
오늘날 외교부 수장에까지 이르게 된 과정 역시 그를 끔찍이 챙겨준 ‘상관’들의 힘이 컸다. 성실하고 완벽한 일처리와 상관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깍듯이 모시는 성품이 뒤늦게 빛을 발한 셈이다. 또한 승진에 조급해하거나 연연해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업무를 챙기는 특유의 만만디 성향도 한몫했다.
외무고시 차석, 연수원 수석이라는 화려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초임 외교관 시절 그는 출세의 지름길로 누구나 선망하는 미국행을 마다하고 인도행을 자원했다. 하지만 이때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그에게는 좋은 인연으로 작용하게 된다. 당시 주인도대사였던 노신영씨와 그의 후임 고 이범석씨를 만났기 때문. 특히 전두환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맡는 등 승승장구했던 노씨의 덕을 후에 반 장관은 톡톡히 보게 된다.
83년 갓 마흔줄에 접어든 나이에 그는 이범석씨가 외무장관이 되자 장관보좌관으로 발탁되며 일약 부이사관(3급)으로 승진했다. 이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석사 학위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던 그를 노신영씨는 국무총리가 되자 자신의 의전비서관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노 총리에 의해서 87년 4월 동기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이사관으로 승진했다.
87년부터 약 3년간 주미대사관에서 총영사 근무를 마치자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최호중씨는 그를 미주국장으로 전격 발탁했다. 이때부터 반 장관은 미국통으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약 2년간의 미주국장을 마치고 다시 주미대사관 정무공사로 옮겨간 그는 이때 한승수 주미대사를 만나게 된다.
95년 2월 그는 당시 공노명 외무장관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차관보급의 외교정책기획실장으로 다시 한국에 들어왔고, 그해 5월 특2급으로 승진했다. 이후 외무부 제1차관보를 거쳐 청와대 의전수석과 외교안보수석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참모 역할을 맡는 등 그는 YS정권에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순탄한 그의 외교부 관료 생활에도 시련은 찾아왔다. DJ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는 딱히 이유도 없이 주변을 맴돌아야 했다. 지난 정권에서 너무 잘나간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하지만 이때도 역시 ‘윗분’들은 일 잘하는 반 장관을 끔찍하게 챙겨 주었다.
DJ정권 출범과 함께 주미대사나 주프랑스대사로 갈 것이라던 예상을 깨고 주오스트리아대사로 발령받았던 그는 다시 2년 만에 외교부 차관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이었던 홍순영씨의 강력한 추천 덕이었다. 홍씨는 반 장관의 충주중·고 8년 선배로 누구보다 그를 챙겼다.
하지만 외교부 차관을 마치면 보통 주요국가의 대사로 내보내던 통상적인 관례를 깨고 그는 1년여의 차관 생활 후 다시 야인 생활에 접어든다. 70년 외무부에 몸담은 이래 처음 ‘백수’ 신세가 된 그를 다시 챙긴 이는 과거 주미대사로 모셨던 한승수 당시 유엔총회 의장이었다. 그는 한 의장에 의해 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으로 참여정부 출범 직전까지 일하게 된다.
반 장관이 노무현 당선자의 눈에 띈 것은 오히려 지난 DJ정권에서 중용되지 않은 것이 호재로 작용했다. 또한 노 당선자 주변에는 사회 법조 노동 분야의 전문가는 넘쳤으나 외교 안보 국방 분야 인맥 풀이 빈약했기 때문에 반 장관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돋보였다.
반 장관이 노 대통령에 의해 외교보좌관으로 발탁된 데는 그의 라이벌격인 최성홍 전 장관의 역할도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외시 3회 수석합격자였던 최 전 장관은 차석합격과 연수원 수석을 한 반 장관과 곧잘 비교되곤 했고,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선의의 경쟁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외무부 주사 출신으로 외시에 수석합격,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하는 최 전 장관은 반 장관보다 여섯 살이나 위였지만 처음 승진은 다소 늦었다.
그러나 전남 신안 출신으로 목포고를 졸업한 최 전 장관은 지난 DJ정권에서 승승장구했고 먼저 외교통상부 장관에 올랐다. 하지만 최 전 장관도 라이벌인 반 장관의 능력은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권교체 당시에 그는 노 대통령에게 외교보좌관으로 반 장관을 강력히 추천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반 장관이 노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결정적 계기는 참여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해 3월9일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비밀리에 뉴욕을 방문했던 이른바 무디스 신용등급 현상 유지 타결 성공이 크게 작용했다.
참여정부 출범 직전 한국에 대한 신용등급 전망을 하향 조정해 이른바 ‘무디스 쇼크’를 몰고왔던 상황에서 전격적으로 무디스 신용등급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새 정부는 대표적 미국통인 반기문 당시 보좌관을 뉴욕으로 부랴부랴 급파시켰다.
만약 예상대로 한국에 대한 신용평가가 하향조정되면 새 정부 출범부터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입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 중책을 맡은 반 보좌관은 당시 비행기안에서 계속 설사를 했을 정도로 극도로 예민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새 정부 출범부터 경제가 흔들리면 안보 불안 심리로 해외투자자가 모두 빠져나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한 핵문제에도 엄청난 악재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조금만 참고 더 기다려달라고 솔직하게 붙잡고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고 훗날 고백한 바 있다.
아무튼 반 보좌관의 급파는 대성공이었고, 등급위원회를 일시 유보키로 했다는 보고를 받은 노 대통령은 반 보좌관에게 “소주나 한 잔 하자”며 아주 만족해 했다는 후문이다. 외교부 출입 기자들에 따르면 이후부터 노 대통령의 대미관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미 외교가 국내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하게 됐고, 이른바 5월의 방미에서의 이례적인 친미 성향의 발언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는 것. 이 역시 배경에는 반 보좌관이 자리잡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충북 음성이 고향인 반 장관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가 어렵게 공부로 성공해서 자신의 꿈이자 집안의 희망이었던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첫 발령지로 미국보다 인도를 택한 것도 “선진국은 물가도 비싸고 하니, 상대적으로 물가가 싼 후진국에서 근무하면 저축도 많이 하고 한국에 오면 집 한 채는 장만할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고 후에 고백한 것으로 전해진다.
충북 지역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 그는 외교관이 되겠다는 일념하에 특히 영어 공부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충주고 2학년 때는 적십자사에서 주최하는 전국 우수 영어 장학생 선발대회에서 4명 중 한 명으로 뽑혀 미국정부의 초청으로 한달간 미국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목표로 했던 서울대 외교학과에 진학한 후 일찌감치 병장 제대로 군복무를 마치고 외무고시에 응시, 합격했다.
그는 다른 사람 얘기하기를 싫어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12시면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인 생활로 체력 관리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인관계도 원만한 편으로 가끔 술자리도 하고 포커 등의 카드놀이도 했지만, 최근에는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량은 소주 반병 정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