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훌륭한 지명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한 대중적인 지지도는 그가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환영을 받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5년 동안 청와대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익힌 정치 권력에 대한 뛰어난 감각도 그의 장점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나이도 1952년생으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1953년생)과 비슷해 한나라당의 늙은 이미지를 상쇄시킬 수 있다. 그의 존재는 박정희 향수를 매개로 흩어진 보수층의 결집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유신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실제로 당내에서는 그의 부상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며 반발하는 의원들도 적지 않다.
또한 지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탈당과 복당을 반복하면서 일관성 있는 정치인 이미지에 상처를 입었다. 또 하나의 약점은 그의 리더십이나 역량에 대해 한 번도 검증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 안팎에서는 박근혜 의원의 잠재적인 능력에 신뢰를 보내고 있다. 아직 정치적 기반이 미약한 그가 왜, 창당 이래 최악의 시련을 겪고 있는 한나라당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의 실마리를 추적해봤다.
1998년 4월2일 늦은 밤. 대구의 한 선거사무실에서는 때아닌 ‘새마을 노래’가 힘차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던 박근혜씨는 승리가 확정될 무렵 눈시울을 붉히며 “아버지가 못다 이룬 뜻을 이루기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고 말해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운동원들도 “고 육영수 여사가 생각나 더 열심히 뛰었다”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이 장면은 박근혜 의원이 20여 년 동안의 ‘은둔’ 생활을 깨고 마침내 공식적으로 정치권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하루 30회가 넘는 거리 유세 등 악착같은 선거운동으로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였던 엄삼탁 후보(그는 박씨가 여고생이던 시절 청와대 경비를 책임지던 30경비단의 중대장이었다)를 거의 두 배 차로 물리치는 이변을 일으켰다. 초반 열세 예상에도 불구하고 막상 선거캠페인이 시작되자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박씨가 가는 곳은 어디나 군중이 모여들었다. 군중을 휘어잡는 호소력 있는 연설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나직하면서도 또박또박한 목소리에 환호를 했다. 주민들이 도시락과 음료수를 싸들고 지구당사를 찾아들었고 전국에서 지구당사 위치를 물어오는 전화가 쇄도했다.
이렇게 박씨는 승리를 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
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때부터 그는 ‘박근혜 가는 곳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는 신드롬의 주인공으로 떠올랐고 그 뒤 각종 선거에서도 항상 영입 1순위 연사로 인식되었다.
박 의원은 여의도 입성 몇 달 뒤 초선으로는 극히 이례적으로 여성 몫 부총재로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아버지의 ‘음덕’도 있었지만 그 자신이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절제된 언행으로 무게 있는 직위에까지 빠르게 오른 것이다. 그리고 1년 반 뒤 재선에 성공한 박 의원은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실시된 총재·부총재 동시 경선에서 부총재 후보로 나서 최병렬 의원의 뒤를 이어 2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 뒤 ‘박근혜 브랜드’에 대한 인기는 지금도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 대표 경선을 앞두고 실시된 3월20일 여론조사에서 박 의원은 32%의 지지율을 얻어 홍사덕 총무(26%)를 앞섰다. 당내 계보가 없는 그가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홍 총무를 리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반 국민들 대상에서도 23%의 지지율을 기록해 12%를 얻는 데 그친 홍 총무를 큰 차로 앞섰다. 선거 운동도 거의 하지 않았지만 당내 주류인 홍 총무를 여유있게 앞선 것은 그의 정치적 잠재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정치인 박근혜의 첫 번째 강점은 바로 이 같은 대중적인 인기에 있다.
▲ 지난 21일 KBS <한나라당 대표경선 5인 토론회>에 모인 후보들. 왼쪽부터 권오을, 박근혜, 박진, 김문수, 홍사덕 의원. 국회사진기자단 | ||
그렇다면 그 성공의 배경에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먼저 그가 5년 동안 경험한 청와대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생활이 큰 밑거름이 되고 있다. 박 의원은 한 회견에서 “나는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께 여론전달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녁 식사시간에 아버지께 시중의 일들을 꼼꼼히 말씀드리곤 했다. 물론 아버지께서 내 말을 받아들여주니까 내가 계속 ‘대변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박 의원의 정치적 잠재력에 대해 “박 부총재를 단지 아버지의 후광에 기댄 ‘공주’로 폄하하고 간단하게 봐서는 안 된다. 그는 박 대통령 밑에서 사실상 10여년간 정식 지도자 수업을 받은 인물이다. 누구보다 냉철하게 정치적 흐름을 분석하고 자신의 꿈을 키울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고 분석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이라는 가장 훌륭한 가정교사를 둔 그에게 정치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서도 인터뷰하기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정치인으로 통한다. 기자의 유도 질문에 결코 넘어가지 않으며 민감한 핵심현안에 대해서는 두루뭉실한 답변으로 넘어가는 노련함을 보이기도 한다.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은 몇 년 전 그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전 대변인은 인터뷰를 마친 뒤 이렇게 소감을 피력한 바 있다.
“박근혜는 매우 훈련이 잘 된 정치인이다. 많은 정치인들이 그렇게 살얼음판 디디듯 조심하다가도 ‘정치적 수사’ 즉 정치적 어법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자신이 뱉은 말의 뒷감당을 못해 위기를 맞는다. 특히 ‘순진한’ 여성들이 그런 실수(?)를 한다. 그러나 박근혜는 아마도 그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정치적 수사’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물일 것이다.”
한나라당을 오래 출입한 한 기자는 이에 대해 “박 의원은 매우 절제되고 정제된 언어구사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확신이 서지 않으면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이 때문인지 그는 말실수로 구설에 오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절제된 언행을 두고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빼닮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으로 그는 차분하고 침착하지만 어떤 결정을 내리면 강단 있게 돌파하는 추진력도 있다는 평가를 듣는다. 옳다고 생각하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이런 그의 결단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적 성향을 그대로 물려받은 듯하다는 평가다. 그가 지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총재와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탈당을 강행한 것이 좋은 예다. 아직까지 그의 탈당과 복당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많긴 하지만 정치적인 면을 놓고 보면 당시 잘 나가던 부총재직을 버리고 ‘보스’의 뜻을 거스르는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의 개인적 인품에 대해서도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박 의원과 사적인 모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다는 교수 A씨는 “박근혜 의원에게는 확실히 사람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다. 어떤 허튼 소리도 성심 성의껏 최선을 다해 들어주는 태도라든가 기품 있고 명석한 두뇌로 사람을 즐겁게 한다. 같이 있으면 꽤 괜찮은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평했다.
그의 이러한 개인적 능력과 인품은 정치를 하는 데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지금은 만신창이가 된 한나라당의 ‘박다르크’로 떠오르고 있다. 여기에는 그가 대구 달성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될 때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은 강재섭 의원의 힘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최병렬 대표가 사퇴 의사를 밝힌 뒤 강 의원은 가장 먼저 ‘박근혜 대안론’을 확산시킨 주인공이다. 여기에 강창희 의원과 남경필 의원 등 일부 소장파 의원들도 박근혜 대안론에 가세하고 있다.
이들이 한결같이 내세우는 박 의원의 강점은 ‘전국적인 지명도와 대중적 인기’에 있다. 강 의원은 최근 박 의원의 부상에 대해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는 사람이 나서 당을 든든히 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강창희 의원도 이에 대해 “박근혜 의원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론이 있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명도와 대중성, 그리고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도를 가진 사람은 박근혜 의원뿐이다. 박 의원이 국민을 위해서 앞장서야 할 때다. 민주당도 추미애 의원쪽으로 힘의 균형이 옮겨온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한나라당도 여성 지도자를 모실 때가 되었다고 본다. 새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나라당이 단합하는 모습을 보일 때 국민들도 한나라당이 정말 달라졌다고 새롭게 보아주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수도권의 또 다른 의원은 이에 대해 “박 의원은 대중적 인기와 함께 참신하면서도 안정적인 이미지를 겸비해 최선은 아닐지라도 차선은 될 수 있다”며 지지를 하고 나섰다.
박 의원은 나이 면에서도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죽음 뒤에 박근혜 의원은 영부인 역할을 수행했다. | ||
하지만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박 의원이 넘어야 할 산은 절벽투성이다. 우선 탄핵정국으로 완전히 종이호랑이가 된 한나라당을 총선에서 부활시킬 ‘파워’와 강력한 리더십이 있느냐가 문제다. 이에 대해 당내에서는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특히 최병렬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중진 의원들은 그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게 사실이다.
영남권의 한 중진 의원은 대표 경선을 앞두고 “대구경북 출신 의원들이 박 의원을 지지하고 있긴 하지만 과연 그가 탄핵 정국 등 당이 가장 어려움에 처한 이 시기에 제대로 당을 이끌어나갈 수 있을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한 여성 대표 체제라는 실험에 대해 ‘왜 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그런 모험을 해야 하느냐’는 불만의 목소리도 높은 게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를 영원히 따라다니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과 유신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비토의 목소리도 높다. ‘차떼기 정당’으로 낙인찍히고 민의를 거스르고 대통령 탄핵을 가결시킨 뒤 새롭게 태어나려는 정당의 수장으로서는 너무 구시대 이미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특히 이재오 의원은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박근혜씨의 이미지는 독재자의 딸이다. 5·6공이 물러난 자리에 3공을 앉힐 바에야 왜 최 대표를 물러나라고 했나. 또 박 의원은 지난 대선 때 탈당했다가 복당하는 등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며 박 의원을 적극 비판하고 있다. 박 의원의 대중적 인기에 따른 총선 경쟁력에 대해서도 “아줌마 부대나 박수 부대에서 통하는 소리다. 한 당의 흐름과 역사를 바꾸려는데 말이 안 되는 얘기다. 박 의원이 당직을 맡아 당 조직이라도 꾸려본 적이 있나. 오히려 지난번엔 탈당해 당을 만든다고 했다가 실패하지 않았나”라고 반문하고 있다. 이 의원은 분당까지 거론하며 ‘박근혜 대안론’에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사실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여성 대표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기류도 없지 않다. 하지만 과도기 관리형 체제 정도면 굳이 반대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당 주류의 인식이다. 대표 경선에서 홍사덕 총무가 떨어지더라도 박 의원이 다음 전당대회까지만 당을 맡아준다면 주류들이 다시 한번 당권 장악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한 당직자는 이에 대해 “그는 여자로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번 총선에서 얼굴마담 정도의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본다. 그가 대표가 되더라도 막강한 중진 의원들이 있는 이상 마음대로 당권을 좌지우지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의사결정은 당 선대위 등에서 합의하에 추진하면 된다. 만약 당 대표로서 전횡을 휘두른다면 역풍을 만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다음 전당대회 전까지 과도 관리형 체제로 가는 게 안전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의원의 한 측근은 이에 대해 “계보가 없고 당내 조직이 없는 것이 오히려 큰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여성 특유의 친화력과 정치력을 발휘해 이번 기회에 많은 사람들을 박 의원의 우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비록 대부분의 ‘남성’ 의원들이 박 의원의 정치력에 박한 점수를 주고 있지만 만약 당 지도부에 입성한 박 의원이 특유의 승부수로 당 주류를 전면 재편하고 총선에서도 비교적 선방하게 되면 한나라당의 권력 구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이를 위해 박 의원이 어떤 정치력을 발휘할지가 최대의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박 의원은 아홉 살 철부지 때 아버지를 따라 청와대에 들어간 뒤 스물 두 살에 퍼스트레이디 생활을 했고 그 뒤 20여년 동안은 ‘야인’으로 지내는 등 한국 현대사의 명암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불운을 인내로 극복하고 거대 야당의 지도자 반열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정가에서는 이번 총선이 ‘정치인 박근혜’가 ‘정치지도자 박근혜’로 성장하느냐 아니면 퇴보하느냐를 가리는 중요한 관문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과연 박 의원이 어떻게 험난한 장애물을 돌파해 나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