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29일 추미애 선거대책위원장이 민주당 상임고문들과 인사 자리에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날은 일요일인데도 당사 1층에선 30여 명의 당직자들이 ‘지도부의 결단’을 촉구하며 농성중이었다. 추 의원이 당사에 도착하자 당직자들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환호하며 그를 맞았다. 추 의원은 당직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뒤 “오늘 희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라며 ‘가볍게’ 눈시울을 적셨다.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당 운영에 대해 전권을 위임받았다”며 말문을 연 추 의원은 “저는 오늘 민주당 선대위원장직을 맡기로 했다”면서 “저로서는 어려운 결심이었다”고 말했다.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 추미애. 광주고등법원 판사로 재직중이던 지난 95년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를 처음 만나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가 새로운 정치 시험대에 섰다. 난파 직전까지 갔던 ‘민주호’를 이끌고 총선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그의 별명 ‘추다르크’는 ‘추미애’와 백년전쟁에서 위기에 빠진 프랑스를 구한 소녀 영웅 ‘잔다르크’의 합성어. 과연 그가 위기에 빠진 민주당을 ‘기적’처럼 구해낼 수 있을까.
추미애 위원장이 정계에 입문한 지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강산이 한 번 바뀐,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것이다. 서울 광진을 지역구에서 출마해 15·16대 내리 당선돼 재선에 성공한 ‘중견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바꿔 말하면 이 정도 정치 이력이면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 회자될 수 있을 법도 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그는 ‘공식석상’이 아닌 자리에서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더군다나 사생활과 관련된 언급은 거의 하지 않는다. ‘미스터리 추’라는 말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나도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동료의원은 “추 의원은 알다가도 모를 정치인이다. 회의석상에서는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것뿐이다. 동료 의원들과 사석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얘기나 정치 활동을 하면서 어려운 점 등을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추 의원과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추 위원장은 기자들 사이에서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취재원’에 속한다. 차기 정치지도자로 거론되기 때문에 기자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취재원이다. 하지만 그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달콤한’ 얘기는 별로 없다. 의원회관 414호실을 찾아가 그를 만나도 용건만 묻고 간단히 답하면 끝이다. 더 이상 의원실에 머무를 까닭이 없다. 오히려 기자들이 머쓱해질 정도다.
여성지 출신인 열린우리당의 한 당직자는 “취재가 어려워 오기가 생긴 기자들이 한마디라도 잡으려고 그의 곁을 맴돌면, 돌아오는 답변은 한결같다. 그것은 바로 ‘주제가 뭔가요’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말이다”고 전했다.
왜 추 위원장은 기자와 가깝게 지내면서 정보를 교환하는 대다수 정치인들과는 동떨어진 길을 걷는 것일까. 지난해 7월 발간된 <인물과 사상>에 기고한 언론인 최보은씨의 분석을 들어보자.
“추 의원의 이런 의도적으로 보이는 (언론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는, 그의 상표와도 같은 ‘원칙과 소신’의 부산물이다. 기자들도 정치인들과 네트워크를 맺고 사적으로 어울리기보다는 열심히 공부하고 정책에 대해 책임감 있게 기사 쓰는 것이 임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기자들이 정책 중심으로 기사를 써야 정치인들도 정책 중심으로 일하게 돼 있다. 그렇지 못하니까 정치인들이 정책개발과 연구를 소홀히 하고 이벤트식 이미지 정치에만 열중하는 것’이라는 것이 그의 비판적인 언론관이다.”
최씨는 이런 추 위원장의 언론관은 ‘자신감’에서 나온다고 덧붙였다. “추 의원이 그토록 초연하고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자신감 때문일 것”이라며 “정치인으로서 한점 부끄러움 없다는 자신감, 정치철학과 소신이 분명하다는 자신감, 자신만큼 공부하고 연구하고 고민하는 정치인이 드물 것이라는 자신감, 나의 의정활동에 대해 비판할 점이 있으면 어디 한번 해보라는 자신감” 때문에 ‘언론과 불화’를 겪는 것으로 풀이했다.
민주당 출입기자들에게 비친 추 위원장은 어떤 모습일까. 한 중앙일간지 출입기자는 “추 의원은 나이 많은 선배 의원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밝힌다. 때론 선배 의원이 무안할 정도로 면박을 주거나 질타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몇몇 의원들은 추 의원과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추 의원이 아무런 근거 없이 선배 의원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적으로는 얼굴을 붉히며 못마땅해도 면박당한 해당 의원이 기자들에게 그런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나마 추 위원장과 가까운 정치인들은 그를 가리켜 ‘원칙과 소신의 정치인’이라고 부른다. 이번 민주당 내분 사태에서 추 위원장과 공동보조를 맞췄던 장성민 전 의원의 말을 들어보자.
“추 의원은 순수한 원칙주의자다. 정동영 의장은 정치적이지만, 추 의원은 정치적이지 못하다. 정 의장은 노회한 정치인이지만, 추 의원은 세련되지 못한 ‘투박한 아마추어’라는 얘기다. 기성 정치 문화가 겉과 속이 달랐다면, 추 의원은 투명한 정치인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흔히 곡선적으로 표현하지만, 그는 직선적이다.”
추 위원장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헌신했다. 하지만 이후 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워온 것을 두고 정가에선 갖가지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일각에선 “논공행상에서 밀려난 소외감 때문”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하지만 추 위원장의 한 지인은 고집스러운 원칙과 소신 때문에 노 대통령과 거리가 멀어졌다고 말한다.
추 위원장은 자신의 원칙과 다르다는 이유로 노 대통령의 대북송금 특검 수용과 대북정책 등에 대해 상당히 못마땅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민주당 분당 당시 신당(현 열린우리당)으로 말을 갈아타지 않았고, 그와 사적으로 절친한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과 ‘정적’으로 돌아서면서도 자신의 소신대로 민주당에 ‘잔류’했다는 것이다.
추 위원장은 ‘제2의 분당’ 직전까지 몰렸던 민주당 내분 사태 때에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강조했다. 그는 “50여 년 역사를 갖고 있는 민주당은 독재정권의 폭압에 맞서 싸운 힘과 저력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정당이다. 민주당은 ‘햇볕정책’과 ‘6·15남북정상회담’ 정신을 유일하게 계승한 적자정당이다”며 “제가 부족하지만 모든 것을 바쳐서 민주당을 일으켜 세우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추 위원장은 “민주당의 정체성에 역행하는 지역구 공천이 있다면 재검토해서 재심사를 하겠다”고 역설했다. 이미 공천이 확정된 일부 호남 중진 의원들을 물갈이할 수도 있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이 같은 추 위원장의 ‘소신’에 대해 민주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옳다고 믿으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게 그동안의 추 위원장 행보였다”고 평했다.
그렇지만 추 위원장의 ‘서슬 퍼런 원칙’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진 않다. 최근 민주당 성북을 공천장을 반납한 손봉숙 여성정치연구소 이사장은 “(추 위원장이) 당의 누구도 탈락하지 않고, 반발하지 않도록 해서 당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손 이사장은 “추 위원장이 모두를 끌어안는 ‘민주당의 어머니’가 돼 줬으면 한다”는 바람을 덧붙였다. ‘직선적’인 추 위원장에게 ‘곡선’의 묘를 살리라는 충고를 남긴 셈이다.
이처럼 꼿꼿한 인상을 풍기는 추 위원장도 다양한 색깔을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내보일 때가 있다. 추 위원장의 한 지인은 “추 의원은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다. 공석에서는 감정 분출을 상당히 자제하는 편이지만, 마음고생이 심할 때는 사석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실 추 위원장은 때에 따라서는 눈물을 보이곤 한다. 이번 민주당 내분 사태 때에도 몇 차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원칙주의자’ 추 위원장의 ‘호탕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오래된 일화도 있다. 광주고법 재직 시절, 추 위원장은 동료 남성 판사들과 함께 룸살롱에 간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동료 판사들 옆에 호스티스 아가씨들이 앉자 추 위원장은 “여기 호스트는 없냐? 나도 남자 한 명 불러 달라”며 분위기를 맞췄다는 것.
▲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남편 서성환 변호사, 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 노무현 대통령(대통령 후보 시절),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2002년 대통령선거운동 당시)과 함께한 사진들. | ||
그는 1958년 대구에서 가난한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추 위원장은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찾아 먹을 수 있는 날은 그래도 괜찮은 날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아버지는 신학교 학생이었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도하차했다는 것. 이후 방직회사에 다녔으며, 군에 가기 전에 가정을 이루게 돼 군복무를 면제받았다고 한다.
방직회사를 다닌 게 인연이었던지 아버지는 세탁소를 차리게 됐다. 그래서 추 위원장을 가리켜 ‘세탁소집 둘째 딸’이라고들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세탁소는 얼마 가지 못해 문을 닫아야 했다. 어느 날 손님들이 맡긴 옷을 몽땅 도둑맞았던 것. 손님들에게 옷값을 변상해주고 나니 아버지는 빈털터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꼬마 추미애’는 남동생이 태어나자 시골 외할머니댁으로 보내졌다. 추 위원장은 “생각해보면 그 가난 때문에 시골의 서정적인 풍경 속에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밝혔다. 아이들과 어울려 보리 이삭을 주우러 다녔고, 새참을 이고 가는 동네 색시를 따라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논두렁길을 다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라는 게 추 위원장의 설명이다. 하루는 휴가 나온 외삼촌의 군화를 엿 바꿔먹고서 외할머니한테 혼날 것이 두려워 저녁 무렵까지 철길 아래 동굴에 숨어 지냈던 과거도 들춰냈다.
어린 추미애는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사글셋방을 전전했고, 기성회비도 못 낼 정도였다고.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기성회비를 마련해오라”고 해서, 수업 중에 집으로 가면서 서럽게 울었던 아픈 추억도 갖고 있다.
전액 장학금을 받기 위해 비서울대(한양대 법학과)를 선택한 그는 훗날 남편이 된 대학선배 서성환씨와의 ‘일편단심’ 러브스토리로도 유명하다. 그의 남편은 고교시절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 그는 남편보다 3년 앞선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남편이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기다린 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던 것이다.
호남 출신 남편과의 사이에는 초등학교 5학년, 중3, 고2의 세 자녀를 두고 있다. 언젠가는 그가 당 회의에 지각했는데 “아이들의 도시락을 싸주는 바람에 늦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집안에서는 세 자녀의 따뜻한 어머니인 셈이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는 추 위원장을 가리켜 “전라도에 시집와서 전라도 자식을 키우는 경상도 여자”라고 말하곤 했다. 추 위원장 역시 가끔 자신을 “경상도의 딸이자 전라도의 며느리”라며 동서 화합의 가교 역할을 하겠다고 말하곤 한다.
추 위원장은 호남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김홍일 한화갑 의원 등 친 DJ 인사들을 당 선대위에 전진배치시킬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해서 추 위원장이 지역주의를 선거 전략으로 내세우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여의도 정가의 대체적인 견해다. 그의 남편인 서성환 변호사가 한 시사지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내용을 보면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서 변호사는 “전라도 출신인 나와 결혼해서 겪은 개인적 경험들이 그의 지역주의 타파 의지 형성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고 밝혔다.
추 위원장은 알려진 대로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관심을 갖고 있는 정치인 중 하나다. 지난해 11월 민주당 대표경선 당시 추 의원은 자신이 ‘추다르크’로 불리는 것에 대해 “그 말은 지난 97년 김 전 대통령 대선 유세 때 저의 고향인 대구를 지역감정 악령에서 구해내겠다며 유세단을 만들었는데 당원들이 이를 ‘잔다르크 유세단’으로 불렀던 데서 유래한 것”이라며 DJ와의 인연을 강조했다. 지난해 12월 초 조순형 대표와 추미애 상임중앙위원 등이 동교동에 인사차 방문했을 때 DJ는 추 상임위원을 “여성계의 독보적인 존재”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DJ와 추 위원장이 다소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게 있다. 바로 ‘여성’이라는 말이다. DJ는 예전에 ‘추미애 판사’를 정계에 발탁한 이유를 “여성, 판사, 대구 출신, 반듯한 외모의 네 가지였다”고 밝힌 바 있다. 당연히 추 위원장은 여성이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여성 정치인’이라 불리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자신은 정치인일 뿐이지 종속적 의미가 내포된 ‘여성’이라는 굴레에 갇히고 싶지 않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를 가리킬 때 섣불리 ‘여성 정치인’이라고 지칭하면, 호되게 면박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추 위원장 스스로 여성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지난해 민주당 대표경선 당시 “바지보다 치마폭이 넓다”고 ‘명언’을 남겨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쩌면 총선을 앞두고 궁지에 몰린 민주당 사람들이 내심 바라는 것은 추상 같은 소신과 원칙보다는 상처받은 민심과 당심을 어루만질 수 있는 여성스러움일지도 모른다.
지난 29일 당사에서 만난 추 위원장은 그야말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총선 후보자 등록일(3월31일과 4월1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는 당장 일부 지역구 재공천 문제와 비례대표 후보 공천 그리고 선대위 구성 등에 ‘오감’을 동원해야 할 상황이었다.
추 위원장은 “밥 먹으면서 전화를 받아야 할 정도로 바쁘다. 손가락과 눈과 입이 쉴 틈이 없다”고 말했다. 빈 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보좌관이 “5분에 한 번꼴로 전화가 올 정도로 정신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면서도 전날 선대위원장을 수락하던 기자회견장에서와는 달리 사뭇 밝은 표정이었다. ‘전날에 비해 여유로워졌다’는 말에 추 위원장은 “민주당을 사랑하는 팬들이 많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이제 민주당이 ‘호남의 자민련’으로 전락하느냐, 과거의 지지율을 회복해서 ‘제2의 야당’으로 올라설 수 있느냐는 추 위원장의 선거 전략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당의 운명을 양 어깨에 짊어진 추다르크가 과연 또 한번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