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학 입학 후 곧바로 연극동아리인 연희극예술연구회에 뛰어들었다. 그는 73년 제1회 대학연극제인 <동물원이야기>로 데뷔했다. 대학 졸업 후 대학로를 전전하던 그는 85년 극단을 창단하기도 했으나, 결국 현실적인 입장을 선택해서 대기업인 쌍방울의 홍보실에 입사했다. 쌍방울 무주리조트 홍보부장까지 역임하는 등 그는 특유의 번뜩이는 재치와 감각으로 광고맨으로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는 91년 주체할 수 없는 ‘끼’를 어쩌지 못하고 다시 연극판으로 되돌아왔다.
이때부터 그는 굶주린 사람처럼 연기 활동을 맹렬하게 전개했다. 그런 그를 영화판으로 끌어들인 이가 바로 친구이자 동지인 문씨였다. 이때 그는 가장 명계남다운 방법을 선택했다. 어차피 조연급 연기자에 머물 상황이라면 배역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최대한 많은 작품에 출연하겠다는 것. 실제 명씨는 당시 영화사 작품발표회의 단골 출연자 겸 사회자였다. 그는 “대한민국의 모든 작품에 내밀 수 있는 만큼 내 얼굴을 다 내밀겠다”며 호언장담했다.
영화계 후배들은 이때 보여준 명씨의 ‘너스레’가 사실은 향후 자신의 문화적 야망을 실현시킬 토대 마련이었던 것 같다고 평가하고 있다. 명씨의 마당발 행보와 인맥 넓히기는 이때 이미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한 셈이다.
96년도에 그는 극단 차이무와 영화사 이스트필름, 그리고 공연기획사 이다기획을 잇달아 설립했다. 뿐만 아니라 출판사 연기자학원 매니지먼트사에 심지어는 프로야구 선수협의회의 자문위원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2000년에는 인터넷 온라인게임사의 대표도 지냈다.
무모해보일 정도의 사세확장(?)이었으나 그는 특유의 폭넓은 인맥과 함께 인복이 있는 편이었다. 96년 <초록물고기>가 성공을 거두면서 반석 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 이때의 인연으로 문성근씨, 이창동 장관과 함께 오늘날까지 끈끈한 동지적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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