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2년 3월17일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열린 대전에서 노무현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는 문성근씨(왼쪽)와 명계남씨. 이들은 최근 열린우리당 분당가능성을 언급해 파문이 일자 “책임지겠다”며 탈당했다. | ||
이들의 발언은 당시 공세에 몰리던 야당의 집중적인 공격의 빌미가 되면서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비판이 쏟아졌다. 이들은 파장이 커지자 지난 7일 “당에 누를 끼친 점에 책임을 지겠다”며 탈당했다.
지난 90년대 영화판에 새바람을 몰고왔던 이들 콤비는 2000년대 들어 정치판을 들었다 놨다할 정도의 힘까지 과시하게 됐다. 이들은 한결같이 “정치에는 뜻이 없지만 시민활동을 계속할 것”이라며 지치지 않는 투혼을 내세우고 있다. 정가와 문화계에서는 총선 후에도 계속될 이들 M콤비의 향후 행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명계남씨와 문성근씨는 30년지기다. 이들이 처음 만난 것은 유신정국이 한창 대학가를 휩쓸고 있던 70년대 초.
당시 명씨는 연세대 신학과에 재학중이었고, 문씨는 서강대 무역학과에 재학중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연대 연극동아리와 서강대 연극동아리 소속이었다. 당시 서울대와 연대, 고대, 이대, 서강대 등 5개 대학의 연극동아리들이 모여서 ‘대학인의 무대’를 올렸는데, 이때 두 사람이 만났다. 나이는 명씨가 한 살 위였지만, 이들은 서로 죽이 잘 맞는 친구로 어울렸다. 당시에 대해 문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계남이와 만난 건 대학시절 신촌이었다. 그의 아지트인 ‘독수리 다방’에서나 아니면 우리 아지트인 ‘왕자 다방’에서였다. 특히 계남이와 나는 서로 죽이 잘 맞아 지냈다. ‘대학인의 무대’가 끝나고서도, 우리들은 그 불안하고 답답했던 70년대 초반의 세월을, 젊음을 그저 부둥켜안고 어쩔 줄 몰라 했었다. 신촌을 헤매고 누비고 그랬었다. 신촌 로타리를 점령하는 것이, 그 시절 계남이네와 우리 대학 데모대의 1차 목표였다. 이쁘고 멋진 여학생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멋지게 사귀고 싶은 게 또 우리들의 목표였다.”
▲ 명계남 | ||
하지만 명씨가 91년 쌍방울 홍보부장직을 그만두고 다시 연극판에 뛰어들면서 두 사람은 다시 신촌 대학가의 추억을 대학로로 옮겨올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이때 이들 틈에 끼어든 또 한 사람이 바로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이었다.
명씨가 이 장관을 처음 만난 것은 82년 대학로에서였다. 명씨가 백수생활 비슷하게 연극판을 떠돌던 시절이었다. 신일고를 나온 명씨는 신일고 국어교사로 잠시 재직중이던 이 장관과 술잔을 기울이며 첫사랑 얘기를 1박2일 동안 나누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92년 박광수 감독의 <그섬에 가고싶다>를 촬영하던 당시 조감독으로 처음 영화판에 뛰어든 이 장관은 거기서 주연배우인 문씨와도 친해졌다. 명씨가 중간 역할을 한 셈이다. 이때부터 세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명씨는 이 장관에게 “내가 반드시 당신 영화 만들어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95년 명씨가 설립한 영화사 ‘이스트필름’에서 이 장관의 첫 작품인 <초록물고기>가 나왔고, 이 영화는 당대 최고의 흥행배우였던 한석규 심혜진까지 가세하면서 큰 히트를 기록했다. 물론 영화계 마당발 명씨의 덕분이었다. 이때부터 사실상 명씨는 소위 ‘의식있는 영화꾼들’의 리더 역할을 했다는 것이 주변의 평가다.
당시 영화 담당 기자로 영화판을 기웃거리던 기자는 <초록물고기> 시사회에서 나란히 자리를 함께한 세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당시 관심 인물은 단연 신인인 이 감독이었으나 그의 언변은 어눌했다. 보다 못한 명씨가 옆에서 대신 답변을 해주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인권 변호사의 이미지에 더 가까웠던 노무현 대통령이 이들의 틈새에 낀 것은 그 다음이다. 노 대통령은 80년대 말 대학로에서 연극을 즐겼다고 한다. 특히 <칠수와 만수> 등 사회성 짙은 작품에 많이 출연했던 명씨와 문씨가 눈에 띄었다. 문씨가 고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라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서로 친해졌다.
92년과 96년 총선에서 노 대통령이 국회의원 선거에 잇따라 낙선할 때만 해도 명씨와 문씨는 그다지 정치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오로지 영화사업만이 최대의 관심이었고, 스크린쿼터와 같은 문화적 이슈가 화제였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대학시절부터 품고 있던 소위 말하는 ‘운동권 기질’이 꿈틀대고 있었다. 특히 문씨는 93년부터 SBS <문성근의 그것이 알고싶다>를 통해 사회성 짙은 문제점을 날카롭게 파고들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명씨 역시 97년부터 인천방송의 <명계남의 제3의 눈>을 통해 사회 문제에 더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 문성근 | ||
그의 낙선 이후 인터넷을 중심으로 노사모가 급속하게 그 세를 팽창했고, 이 모임의 초대 회장에 명씨가 앉았다. “뭔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그 열정은 사뭇 놀랍다”고 말하는 주변의 평처럼 명씨는 이때부터 맹렬한 노사모의 전사가 된다. 그의 대학시절 이후 동지인 문씨와 이창동 장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씨는 “명씨의 활동을 보면 존경스러울 정도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정말 열정적이고 헌신적이다. 그런 정열이 놀랍고 부럽다. 그가 때로 거칠게 느껴지는 것은 세세한 고민을 하기보다는 큰 줄기를 쥐고 밀어붙이는 스타일 때문”이라고 평했다.
일각에선 이론적 뒷받침은 문씨가, 그리고 행동은 명씨가 각각 역할분담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명씨 역시 한 연극계 후배와의 인터뷰에서 “세상에 문성근 같은 ‘논리맨’이 있으면, 나 같은 ‘또라이’도 있어야 재미있지 않겠나. 다 문성근이만 같으면 재미없잖은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문씨는 고개를 젓고 있다. 그는 “명씨는 어떤 판단을 하기까지 주변 사람들과 많은 논의를 하고 결정을 할 때면 결단력이 있다. 특별히 내 의견을 잘 따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지금 다시 시험대에 서 있다. 지난 대선 이후에는 그들 모두 약속한 대로 영화판이라는 자신들의 생업으로 돌아갔지만, 이번에도 과연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 여기에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뒤따른다. 정치적 성향 표출이 한결 자연스러워진 만큼 두 사람의 영화계 복귀도 한결 부드러워질 것이란 견해가 전자인 반면, 두 번씩이나 정치판을 워낙 거세게 휘저었던 만큼 예전과 같은 순수한 활동은 힘들 것이란 견해가 후자이다.
두 사람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한 인사는 “두 사람 모두 지난 대선 이후 숱한 유혹을 용케도 잘 견뎌내며 영화계에 복귀해서 반가웠다. 이번에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번 열린우리당 분당 가능성의 언급을 보면서 결국 정치판에 뛰어들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들기도 한다”고 밝혔다.
또다른 한 인사는 “얼마전 명씨가 현실 정치 참여 가능성에 대해 ‘5년만 살고 말 것도 아닌데…’라고 말했다더라”라며 “이들의 꿈은 노무현 시대 이후에까지 펼쳐져 있는 것 같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