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두 번째 만남은 총선 3일 후인 18일 중앙당사 사무총장실에서 이뤄졌다. 이제는 당선자 신분이 된 노 본부장의 얼굴은 첫 만남 때보다는 많이 편해 보였다. “문자메시지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노 본부장은 말을 꺼냈다. 16일 새벽, 당선이 확정된 시간에 기자가 보냈던 ‘당선축하 메시지’에 대한 답이었다.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 17대 국회의 ‘폭풍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다. 어떤 정책들을 들고 나올지에 대한 갖가지 예측과 셈법이 벌써부터 정가를 긴장시키고 있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예고한 ‘점퍼차림 등원’까지도 화제에 오르내릴 정도. 4년의 먼 항해를 시작하는 ‘민주노동당호’의 항해사 중 하나인 노 본부장을 만나 ‘그의 삶’과 ‘그들이 꿈꾸는 대한민국’에 대해 들어봤다.
─새벽 3시가 넘어서 당선이 결정됐다. 초조하지 않았나.
▲그렇지는 않았다. 당선이 안돼도 지금까지처럼 열심히 일하자고 마음의 정리를 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당선이 확정된 후에도 ‘폭발적으로’ 기쁘지는 않았다.
─총선 결과를 평가한다면.
▲목표치(20석)를 달성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유권자들이 보내준 성원을 아주 값지게 생각한다.
─지역구를 두 석밖에 내지 못했는데.
▲지역구 당선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독일 녹색당은 20년 넘게 지역구 당선자를 못 내지 않았나. 본격적인 ‘지역구 선거는 2008년부터’라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입장이고 생각이다. 지금까지는 ‘투자’였다. 2008년에는 지역구에서 80석 이상을 얻을 것이다. 계산도 다 끝났다.
─원내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어떤 일을 할 계획인가.
▲가장 먼저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민주노동당은 ‘원내교섭단체 요건 5석’을 정치개혁방안으로 주장해 왔다. 그러나 구걸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1인 2표제가 됐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법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20석 이상 혹은 정당투표 10% 이상’인 당을 교섭단체로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한다(17대 총선 민주노동당 정당지지율은 13.1%).
정책 현안 문제로는 먼저 이라크 파병철회를 주장할 계획이다. 이 문제는 민주노동당이 원내에서 얻게 될 첫 성과가 될 것이다. 지금 상황을 보면 갈래야 갈 수도 없다. 범죄와 같은 전쟁이고 국제여론도 반대로 흐르고 있다. 파병의 실익이 없음은 대통령도 인정한 것 아닌가. 철회되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열린우리당이 파병을 강행한다면 민주노동당은 단호히 맞설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을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다.
─파병을 철회한 국가들과 우리는 상황이 다르지 않나.
▲뭐가 다른가.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얘기하는데 파병을 철회한 폴란드가 미국에 대한 경제의존도면에서 우리보다 더 높다.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대화를 해야 한다.
이와 관련, 노 본부장은 개표 당일 “당선된다면 외교통상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가장 고인 물’이라서 물갈이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 “이라크 파병 철회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파병 철회가 실패하면 원외투쟁에 나설 계획인가.
▲당연하다. 전 세계 진보정당이 갖고 있는 일관된 전통이다. 원내에서의 활동에만 집착하지 않고 국민정서를 감안하여 필요한 투쟁방식을 결정하겠다.
─민노당이 기성 정당과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정당 운영의 원리가 다르다. 민주노동당은 진성당원들에 의해 당의 주요의사 결정이 이뤄진다. 지도부에 의한 공천도 제도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가장 개혁적이라고 하는 열린우리당도 상임중앙위원 몇 명이 모여 비례대표를 결정했다고 알고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둘째, 정책의 기본이 다르다. 민주노동당은 철저하게 80%를 위한 정책을 택한다. 20%의 기득권층과 80%의 비기득권층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우리는 80%를 위한 정책으로 당을 운영한다는 것이다. 간단하다.
─아직도 민주노동당을 ‘색깔(빨갱이) 정당’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대중정당으로 자리를 잡는 일이 쉬울 것이라 보지는 않는다. 국민들이 생활 속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정치로 이 문제는 극복할 생각이다. 또한 우리나라 국민들이 정당정책에 대해 무관심한 것도 문제겠지만 그런 식의 정치문화를 조장해온 정치권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 정책은) 대단히 현실적이다. 실효성이 없다는 생각은 문화의 차이라고 본다. ‘저런 식의 사고와 대안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심어주겠다. 상식적인 대안마저 인정되지 못하는 우리의 정치문화가 바뀌면 자연스레 해소될 것이다. 물론 민주노동당의 대국민 설명방식도 좀 더 대중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유럽식 사민주의’의 완성인가.
▲정확히 말하면 아니다. 당 강령에는 ‘유럽식 사민주의의 한계를 극복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유럽식 사민주의의 달성도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독일 등의 사회복지 제도는 우리의 눈으로는 거의 혁명적인 것이다.
─‘사회주의 사상’은 포기한 것인가.
▲아니다. 사회주의는 (당의) 목표다. 포기할 수 없다. 다만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사회주의는 넓은 개념이다. 소련식의 국가사회주의나 북한식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한다. 유럽의 경우 사회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들의 경우 내용적으로 보면 민주노동당의 강령보다도 못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주의의 범주를 그들은 넓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상에 민주노동당이 지향하는 모델은 실재하지 않는 것인가.
▲없다. 굳이 말한다면 브라질 PT당이나 스웨덴 사민당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노 본부장 본인은 ‘민주적 사회주의체제’를 지향한다고 말해 왔는데.
▲맞다.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타당과의 정책공조는 가능한가.
▲물론이다. 내용만 같다면 한나라당과도 공조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이 ‘국회감시자’가 되겠다고 했는데 국회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맡겠다는 것인가.
▲캐스팅보트와는 다르다. 국회의 잘못된 문화와 관행에 대해 ‘공범’이 되지 않겠다는 뜻이다.
노회찬 본부장은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 입대를 했다. 대학에 떨어진 것이 이유. 제대 후인 1979년에 고려대에 입학했고 1982년 졸업을 몇 개월 앞두고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다.
민주노동당의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도 화려한(?) ‘운동’ 경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1세대 과학적 사회주의 조직’으로 유명했던 인천지역 민주노동자 연맹(인민노련)이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진보정치연합 대표와 ‘매일노동뉴스’ 발행인, 민주노동당 부대표와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장 노동자가 된 후에는 ‘먹고살기 위해’ 용접기술도 익혔다. “변혁을 위해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야 된다면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노 본부장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사회변혁에 관심을 가져 자생적인 ‘운동권’이 되었다. 그래서 ‘끈’도 동료도 없이 혼자만의 판단으로 1982년부터 노동현장에서 일했다”고 밝힌 바 있다. 본격적인 노동운동은 노동자가 된 지 2년 후인 1984년 ‘운동서클’을 만들면서 시작됐다. 그가 “내가 알기로는 전국에서 제일 컸다”고 밝힌 이 서클의 이름은 ‘살인강간고문정권 타도투쟁위원회(약칭 ‘타투’)’. 이 서클은 정태윤 전 이회창 총재 비서실 차장, 주대환 민주노동당 마산 합포 지구당 위원장 등과 함께한 ‘인민노련’의 중요한 한 축이 됐다.
─학생·노동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나는 배운 대로 살아왔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했더니 여기까지 왔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배운 대로 안하고 있는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전두환 독재, 광주 민주화운동 등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 같다.
─노동운동을 같이 했던 분들 중 현역 정치인들이 많은데 그들을 평가한다면.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섭섭함이 크다. 본인들은 많은 얘기를 했었지만 이해도 동의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본인의 길은 본인이 정할 문제라고 생각할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뛰어난 분들이다.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분들이 가진 능력을 제도정치권 내에서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민주노동당이 조금만 더 힘을 갖는다면 같이 길을 갈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을 위해 정치관계법을 고쳤다는 얘기를 안영근 송영길 유시민 의원 등이 한다. 그들 중 몇몇은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 우리 정치를 발전시킬 것’이라고 한 번이라도 생각했을 거라고 믿는다. 가식적으로만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노동운동 동지들 중 많은 사람이 떠났다. 그럼에도 계속 자리를 지킨 이유는.
▲사람마다 자기의 철학과 인생관이 있는 것 아닌가. ‘옳은 일 하나만 하자’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꼭 살아서 성취를 이루자는 생각도 경계했다. 김문수 의원의 경우 “네 말이 맞다. 근데 언제 실현되겠냐. 나는 수준 낮은 몇 개만 하겠다. 노회찬, 네가 볼 때는 별 게 아니어도 몇 개만이라도 성취한다면 그것이 국민에게 좋은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러나 난 지금도 그 말을 인정할 수 없다. 특히 그분은 나에게 이해해 달라고 하지 않고 “나도 안할 테니 너도 하지 마라”고 했던 사람이다. 이재오씨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분들은 진보정당 운동 자체를 부정하는 분들이다. 반면에 안영근 같은 사람은 순진한 사람이다.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을 때도 국가보안법 철폐를 공개적으로 주장한 사람이 아닌가. 정치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정당 소속 의원들 중에 정치를 같이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나.
▲많다. 순위를 매길 수는 없지만 안영근, 송영길 등이 그렇다. 좋은 사람들이다. 자기 신념이 확고한 사람들이라고 평소에 생각해 왔다. 한 달여 전 김부겸 의원이 공천 문제로 고생할 당시 TV 토론 후 가진 술자리에서 “공천도 못 받은 당에 왜 있느냐. 민주노동당으로 오라”고 했더니 “나는 너무 때가 묻어서 안된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내가 “걱정하지 마라. 민주노동당에는 강력세탁기가 있다”고 했다. 좋은 사람인데 안타깝다.
▲ 노동운동을 하다 만나 평생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부인 김지선씨(오른쪽)와 함께 노 본부장이 당사에서 활짝 웃고 있다. | ||
▲사실이 아니다. 나보다도 말 잘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많다. 노 대통령도 있고 각 당에 얼마든지 많다. 내가 말을 잘해서 대접받는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럼 누가 말을 잘한다고 보나. 토론하기에 좋은 정치인을 말해 달라.
▲예를 들어 박찬숙, 전여옥 같은 분은 말을 참 잘한다. 그런데 재미는 없다. 내용과 문제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상대의 견해를 간파, 나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 능력이 있는 사람과의 토론은 언제나 흥미롭고 생산적이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의 홍준표, 안택수, 이재오 의원, 열린우리당 김부겸 의원 등과는 토론이 잘 된다. 내용이 서로 완전히 다르지만 ‘싸움’이 된다. 방송사 PD들도 대체로 같은 생각인 것 같다. ‘적장’으로서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싶다는 뜻이다.
─한 인터뷰에서 ‘나의 직업은 노동운동가’라고 했는데 앞으로도 그런가.
▲그렇다. 변할 수 없다. 내 직업은 노동운동가다.
─민주노동당 의원의 세비는 ‘180만원±a’라는데 적지 않나.
▲부족하지 않다. 너무 많다. 언제 그런 월급을 받아 봤어야지.
─운동가로 사는 동안 생계는 어떻게 해결해 왔나.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는데 생각해 보면 할 말이 없다. 처가 받는 월급, 강연·토론·인세 등으로 생활했고 몇 년 전에 책을 하나 써서 수천만원을 벌었다. 그걸로 대충 빚을 다 갚을 수가 있었다. 교보문고에서 5주 동안 1위를 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금융권 다섯 군데로부터 신용불량자 통보를 받고 집, 자동차를 모두 압류당했다. 지금 재산을 정리하면 7백만원 정도나 될까. 작년에 빚을 갚겠다고 10년간 운영해 온 ‘매일노동뉴스’를 매각했다.
그가 말한 ‘대박’ 책은 1997년 발행된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이다.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번역본과 북한에서 번역·출판한 <조선왕조실록>을 두루 섭렵한 뒤 그 가운데 우리 현실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주제나 사건 1백여 개를 골라 노 본부장 나름의 풀이를 단 책이었다.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결혼’이라고 했는데.
▲결혼에 대해서 묻길래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사실이다. 결혼을 하니 너무 좋다는 생각을 평소에 해왔다. 처에게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토론·대화를 많이 안해도 서로에 대해 많이 이해하고 있다.
─집에서는 부인에게 잡혀서 사는 편인가 아니면 정반대인가.
▲가정에서 보수적이었다면 나는 쫓겨났을 것이다(웃음). 나는 가부장적인 것을 우리나라의 ‘클래식한 문화’로 보지 않는다. 여성을 우대하는 것은 동정이 아니고 휴머니즘이 아닌가.
인터뷰를 하는 도중 부인 김지선씨(51)가 중앙당 사무총장실로 들어 왔다. 한 여성지와 ‘부부동반’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인터뷰는 마지막 질문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투사 이미지’의 노 본부장이 가정에서는 어떤지, 남편으로서는 어떤지를 김씨에게 물었다.
─가정에는 충실한 편인가.
▲(김지선) 서로 너무 바빠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산다. 특히 총선이 시작되면서는 더 더욱 그랬다. (노회찬) 그래도 같은 삶을 살아온 부부여서인지 서로의 마음을 잘 안다. 가끔 시간이 나면 아주 일상적인 대화만을 나눌 뿐이다. 예를 들면 “집에 설탕이 떨어졌다”거나 뭐 이런 거(웃음). 집안 일에 신경을 못 쓰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 집에 못 박는 것도 집사람이 다 한다. 난 못하는데.
─(김씨에게) 서운하지 않나.
▲바빠서 그런 건데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내가 못도 더 잘 박고 일도 더 잘한다(웃음).
─부인이 두 살 연상인데 어떻게 만났나.
▲87년인가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중에 만났다. 그때는 내가 수배중인 몸이어서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자녀를 갖지 않는 이유는.
▲이유는 특별히 없다. 안 생겨서 그렇다. 노력도 많이 했다.
─‘노동운동가’ 남편 때문에 힘든 일은 없었나.
▲없었다. 같은 삶을 살아왔다. 아이가 있었다면 노동운동가가 되라고 했을 것이다.
총선이 시작되면서 하루 한 갑 정도 피우던 담배가 세 갑 정도로 늘었다고 노 본부장은 걱정했다. 담배를 줄여야 한다고, 그리고 술도 좀 줄이겠다고 말했다. “술은 아주 좋아한다. 지금은 소주 한 병 정도지만 젊었을 때는 소주 8병도 먹었다”고 했다. 부인 김씨는 “만날 시간이 없어 술·담배에 대해 뭐라고 말을 못하고 있다”며 웃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