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향숙 당선자(왼쪽), 김애실 당선자 | ||
이같은 여성 정치인 시대의 개막은 이번 총선에서 주요 4당이 비례대표 당선 안정 순번의 절반을 여성에게 할애한 정책적 배려에 힘입은 바 크다.
일각에선 여성 정치인들이 숫적으로 급증했지만 ‘대어급’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의 총선 불출마와 민주당 추미애 의원의 낙선 등으로 당장 눈에 띄는 거물 여성 정치인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각 당에서는 이번에 여의도에 진출하는 여성 당선자들이 하나같이 ‘내공’이 심후한 인물들이라고 평한다. 17대 총선에서 여성 정치인의 산실 역할을 한 각 당 비례대표 당선자들, 특히 그 ‘간판’ 격인 1번 당선자들에게 새삼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 중 하나다.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민노당 등 4당이 배출한 비례대표 1번 당선자들은 대체 어떤 인물일까. 이들이 과연 기존 정치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산소’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저마다 각기 다른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온 ‘비례대표 넘버원’ 4인방의 면면을 통해 그 답에 접근해보자.
열린우리 장향숙
“상당히 가파르군요. 혼자서 못 다니겠어요.”
지난 4월22일 김근태 원내대표 등 당내 인사들과 함께 국회를 둘러본 열린우리당 장향숙 당선자가 던진 말이다. 장 당선자는 휠체어 이동 통로가 없는 계단 앞에서 동료의원 6명의 도움을 받고서 겨우 계단을 ‘통과’할 수 있었다. 험난했던 국회 ‘첫 나들이’에 대해 장 당선자는 “나의 등원을 계기로 4백만 장애인에게 국회가 친밀한 공간이 돼 주기를 기대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장향숙 당선자가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으로 전격 발표됐을 당시 ‘의외의 결과’라는 시선이 쏟아졌다. ‘무학력’ ‘무직업’ 경력에 언론에 한 번 알려진 적 없는 여성 장애인 운동가의 전격 발탁에 대해 ‘이벤트식 정치의 일환’이란 비평이 나오기도 했다.
비례대표 1번 선정 당시 나왔던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 장 당선자는 “기자들이 내게 ‘비례대표 신청은 했나’ ‘당원 맞나’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를 급조된 상품으로 취급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난 지난해 12월15일 입당해서 비례대표 당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비례대표 신청하면서 큰 기대는 안했지만 당원으로서 열심히 활동했다. 당 지도부가 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비례대표 1번으로 결정하는 동안 기자들은 김명자 전 장관이나 박영선 대변인 같은 여성인사들만 소개하지 않았나. 기자들이 깨어 있지 못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장 당선자는 태어난 지 1년 반 만에 소아마비에 걸려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됐고 그 탓에 학교에도 다니지 못했다. 온종일 집안에만 처박혀 있던 그의 유년 시절 유일한 벗은 바로 ‘책’이었다. 부모님을 통해 한글을 깨우치면서 혼자 있는 시간 대부분을 독서에 할애했다.
장 당선자는 “내가 읽은 책이 1만 권이 넘는다는 기사가 나갔지만 그것은 유년 시절에 읽은 책이 그 정도라고 이야기했던 것일 뿐”이라며 “책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 사회적·물질적 신분 그리고 학력에 대한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장 당선자는 이후 부산지역에서 청소년·장애인 운동을 해왔다. 98년에는 한국여성장애인연합 결성에 나섰고 이듬해 공동대표직을 맡았다. 소수의 권익 대변을 위해 정계 입문을 결심했다는 장 당선자는 “내 경력이 ‘무학력’ ‘무직업’으로 나온 것은 내가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배우고 싶고 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른 장애인들도 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으니 불평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장 당선자는 일전에 한 인터뷰에서 “결혼은 안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라 밝힌 바 있다. “어차피 학교나 직장에서 맺어진 인연을 통해 결혼하는 게 대체적인 추세인데 나 같은 장애인들에겐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지금껏 가정을 꾸려본 적이 없는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부부생활을 가꾸고 싶은 꿈은 없을까. 이러한 질문에 쑥스러운 듯 “노코멘트할 게요”라고 밝힌 장 당선자는 대신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소개했다.
“사랑은 ‘의지’다. 흔히들 ‘감정’이라고 말하지만 감정엔 ‘끝’이 있다. 순간 불타오르다 금세 식어버리는 요즘식 사랑을 ‘자판기식’ 사랑이라 하지 않나. 언제나 사랑할 수 있고 함께 살며 의지하고 양보하고 만약 필요하다면 상대를 위해 ‘떠나 줄 수 있는’ 것은 강한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최근 정동영 의장의 사퇴 시사 발언과 관련한 당내 상황에 대해 장 당선자는 “당권 경쟁이나 계파 갈등 같은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며 “열린우리당이 원내 과반 의석을 차지한 것은 국민들이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지금까지 소외당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라고 밝혔다.
한나라 김애실
“1등 살림꾼이 의정 활동도 1등으로 해낼 겁니다.”
김애실 한나라당 비례대표 1번 당선자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경제정책을 입안하는 데 굳이 남자 여자의 차이가 있겠느냐”는 기자의 다소 공격적인 질문에 김 당선자는 자신 있게 의정활동 계획을 펼쳤다.
“여성 경제학자로서 나름대로 장점이 많다. 특히 두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직접 해 오면서 실물경제에 대해 피부로 느끼는 점이 많다. 정치권에서는 거시적인 것을 이야기하지만 일반국민들에게는 먹고사는 문제가 곧 경제학이라고 생각한다. 재테크는 어떻게 하고 물가가 왜 오르고 집값이 뛰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민생과 직결된 경제문제를 의정활동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싶다.”
사실 한나라당이 한 달여의 ‘산고’ 끝에 발표한 비례대표 명단에 김 당선자의 이름이 걸리자 당 주변에서는 쑥덕거림도 없지 않았다. 눈에 띄는 이력이라곤 ‘국내 여성 경제학 박사 1호’라는 것뿐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 하지만 김 당선자의 ‘내공’은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경기여중·고를 다니며 남부러울 것 없이 곱게 자랐다. 하지만 가족이 남미로 이민을 간 뒤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김 당선자도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그가 미국 유학을 떠날 때 수중에는 한 학기 등록금과 한 달 생활비가 전부였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벌어 마련했다. 그런데 유학 1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신이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다.
김 당선자는 교수가 되기 전까지 가정부, 식당 종업원, 김치공장 보조, 세탁소 직원 등 무려 14가지 직업을 가지며 학업과 생계를 함께 이어나가야 했다. 바로 여기에 김 당선자가 말하는 실물경제의 ‘뿌리’가 있다. 또한 그는 지난 85년 ‘가사노동의 경제학적 가치’라는 논문을 발표, 국내에서 처음으로 가사노동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김 당선자는 박근혜 대표를 잘 알지 못했지만 선거 기간 동안 그를 접해본 뒤 “박 대표는 정말 신뢰가 가는 인물이다. 세상에 내놓은 말들이 절대로 빈말이 아니고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 같고 겸손한 태도로 사심 없이 정치를 하는 것 같아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다”고 덧붙였다.
그는 비례대표 공천 과정에서 ‘박세일 당선자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일부의 지적에 대해 “박 당선자와는 78년부터인가 학회 활동을 통해 호감을 갖고 알게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그리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공천심사위에서 공식적으로 (후보 수락을) 요청해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정계 진출’에 대해 “평소 국회의 일에 대해 세세하게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고 일반 국민의 눈으로 정치권을 보아왔다. 앞으로도 눈높이를 서민들의 기준으로 낮춰 생활밀착형 정치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또한 4년 동안 가장 하고 싶은 일에 대해 “한국이 세계 속에서 일류 국가로 거듭나고 훨씬 강화된 국가경쟁력을 가진 나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 심상정 당선자(왼쪽), 손봉숙 당선자 | ||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 심상정 당선자는 당내에서 ‘똑순이’로 통한다. 20년이 넘는 노동운동의 ‘내공’으로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모르는 게 없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외모와는 달리 똑 부러지는 성격을 지닌 그를 당직자들은 ‘무서운 시어머니’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 그러나 ‘철의 여인’의 이미지 뒤에는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시대 한 여성’의 모습이 있다.
서른네 살에 늦깎이 결혼을 했던 심 당선자의 ‘평생 동지’는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활동을 할 당시 만난 운수노동자 출신의 이승배씨(48).
몇 번에 걸친 (남편의) 프러포즈를 모두 ‘퇴짜’ 놓을 만큼 심 당선자는 애초 이씨에게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너무 아저씨 같고 남자다운 박력도 없어 보였다”는 이유에서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대한 부담과 집안의 결혼압력으로 고민이 깊어만 가던 중 심 당선자는 우연히 동네 점집을 찾았다. 그런데 당시 만난 역술인이 커다란 대학노트에 크게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 남자는 심상정이를 위해 태어난 남자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심 당선자는 “점을 믿지는 않지만 막상 그런 얘기를 들으니 사람 마음이 움직이더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남편을 만난 지 7년 만인 1992년 11월 단돈 2백만원을 ‘밑천’ 삼아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심 당선자가 “법 없이도 살 사람. 천연기념물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한 남편 이씨는 한마디로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사려 깊은 마음 씀씀이에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는 심 당선자는 남편을 ‘우리 아저씨’라고 부른다.
심 당선자는 “막상 결혼해 보니 같이 살 남자는 남자다운 매력보다는 자상함, 넓은 마음이 더 중요한 것 같다. 결혼 때문에 고민하는 여성들이 있다면 이 얘기를 꼭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축구와 컴퓨터광’인 아들이 하나 있다. 이름은 이우균(12), 현재 초등학교 5학년이다. 심 당선자의 표현대로라면 그의 삶에 “제일 큰 힘이 되는 후원자”다. 최근의 일화 한 토막에선 여느 ‘엄마’와 다를 바 없는 그의 내면이 엿보인다. “얼마 전 아들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우균이처럼 부모님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아들이) 너무나 고맙고 뿌듯했다.”
심 당선자는 자식과의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언제 만날 수 있는지, 엄마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뭘 하고 놀 것인지’를 아들에게 항상 설명해줌으로써 아들도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부모를 대할 수 있게 하려고 한다는 것. 이런 습관은 이미 태교 때부터 계속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대부분의 노동운동가 집안이 그렇듯 심 당선자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남편이 IMF를 맞아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현재 빚만 4천만원을 넘는다. 그동안의 생활은 심 당선자가 금속노조 사무처장으로 일하며 받았던 월급 1백10만원으로 지탱해 왔다. 심 당선자는 “의원 월급을 2백만원 가까이 준다고 하니 생활이 확 펴겠네요”라며 웃었다.
작년 말 전국금속노조 사무처장을 마지막으로 노동운동을 떠난 심 당선자의 삶은 그 자체로 ‘한국노동운동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크고 작은 굴곡 속에는 어김없이 ‘금속노조 심 처장’이 있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하면서 한국 노동운동의 중심에 선 심 당선자는 이후 서노련을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전노협, 전국금속노조, 민주노총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이 가지고 있는 소위 ‘화려한 경력’은 없다. 전노협 쟁의부장, 전국금속노조 사무처장, 민주노동당 중앙위원 등 그의 이력이 보여주듯 그는 주로 노동운동의 ‘야전사령관’으로 일해 왔다. 이에 대해 심 당선자는 “대중지도자가 될 기회가 별로 없었고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손을 거쳐 정리된 노동 관련법도 한두 개가 아니다. ‘유급 노조 상근자’ 제도가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고 민주노총의 ‘주5일제’ 안이 그의 작품이었다.
심 당선자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엄격하기로 소문나 있다. 본인 스스로도 “조직과 사업에 대한 헌신성을 강조하는 성격이어서 언제나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다”고 밝힐 정도. 앞으로 그가 국회 내에서 보여줄 또 다른 ‘야전사령관’으로서의 모습에 벌써부터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민주 손봉숙
총선 개표방송이 진행되던 지난 15일 밤 민주당 중앙당 상황실 맨앞자리에는 추미애 선대위원장 등이 침통한 표정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민주당이 참패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추 위원장의 굳게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말을 건넨 사람이 있었다. 바로 비례대표 1번 후보인 손봉숙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이사장(60)이었다.
이날 추 위원장은 낙선의 고배를, 손 이사장은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지난 90년 사단법인 한국여성정치연구소를 설립해 소장을 맡으면서 15년 동안 ‘장외’에서 여성의 정치 참여를 강조해왔던 손 당선자. 그가 마침내 ‘장내’로 진입한 순간이었다. 개인적으론 ‘경사’였지만, 당내 분위기는 ‘상갓집’이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좌초 위기에 몰린 민주당을 살려내는 것. 지난 19일 민주당 당선자 9명은 비대위를 꾸렸고 ‘현실 정치 초년병’인 손 당선자도 비대위 부위원장을 맡아, 침체된 당내 분위기를 추스르기에 나서고 있다.
사실 손 당선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시민운동의 대모’. 그동안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집행위원장, 정치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시민개혁포럼 대표운영위원 등을 맡으며, 시민운동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사로 자리를 굳혔다. 특히 지난 97년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상 처음으로 여성위원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의 활발한 해외 활동도 눈에 띈다. 지난 92년엔 아시아·태평양여성정치연구소 한국측 이사를 맡았으며, 2001년에는 동티모르 제헌국회의원 국제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도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이사장뿐 아니라 한국정치학회 이사, 의회를 사랑하는 사람들 공동대표 등을 맡고 있다. 자신의 전공인 ‘정치학’을 현장에서 유감 없이 접목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런 화려한 시민단체 경력으로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장관 하마평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손 당선자는 어떤 성향의 시민운동가였을까. 손 당선자는 “내가 급진세력은 아니지만 한나라당에 들어갈 정도로 보수적이라는 판단이 들진 않는다. 열린우리당은 내가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선동적이고 포퓰리즘적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민주당의 중도적 개혁성향이 잘 맞겠다 싶어 민주당을 선택했다”는 것.
손 당선자의 정계 입문에는 현재 민주당 비대위원장인 한화갑 의원이 공을 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추 위원장과는 지난해 12월 민주당 입당 의사를 처음 밝히면서 알게 됐음에도 ‘3보1배’를 할 때 광주에 함께 내려가 눈물을 쏟기도 했다. 그는 열 네 살이 어린 추 위원장을 사석에서는 ‘막내 동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손 당선자는 시민운동을 하던 시절 텔레비전 토론에도 자주 참석했는데 가끔 민주당 편을 들어 “호남인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영남 사람’이다.
1944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영주여고를 나온 뒤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그후 유학을 떠나 미국 하와이대 대학원과 프린스턴대 대학원 등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손 당선자의 동갑내기 남편인 안청시 서울대 교수도 정치학이 전공이다.
손 당선자는 “지난 1973년 결혼해 신혼 초에는 단칸 셋방살이하면서 어렵게 살았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슬하에 출가한 정현과 정민 두 딸이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